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중국 산둥(장보고 유적지 답사)

네 번째 이야기: 타이샨(泰山)

Geotopia 2013. 10. 16. 22:45

◆ 셋째 날 : 2013.8.9(금) [Ⅱ]

 

여정 : 웨이팡-중국고차박물관-(쯔보-지난 경유)-타이안(점심)-타이샨-(라이우 경유)-쯔보(3박)

* 이번 글은 빨간색 글씨까지 입니다.

 

<3일째 여정  *원도: Google>

 

 

 그 유명한 '태산'

 

  오늘 가 볼 타이샨(泰山)은 교과서에 나왔던 ‘태산이 높다하되~’로 시작되는 양사언의 시조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산이다. 사실 나는 이름만 같은 산이겠지 했는데 바로 그 산이라고 해서 조금 놀랐다. 산둥반도 일대가 고대 중국의 중심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답사에서 알게 된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태산은 1,545m에 불과하지만 구릉과 평지로 되어 있는 산둥 일대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산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김해평야의 전산이나 호남평야의 백산과 비슷한 이치라고 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백산이나 진산이 해발 50m에도 미치지 못하는 산인 것에 비하면 태산은 엄청난 높이이다. 또한 타이샨이 자리를 잡고 있는 타이샨산맥은 남북 방향으로 두드러진 산열을 형성하기 때문에 좀 더 높은 산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양사언은 우리나라 사대부였으니 그 태산을, 존경해 마지않는 중국의 태산을 보다 크게 전해 들었을 것이다.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진 타이샨 입구>

 

  하지만 타이샨이 중국의 대표적인 산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일대가 바로 황하문명의 핵심지역인 황하의 하구 인근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 큰 산이 수도 없이 많이 있는 중국에서 이 산이 이런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이 지역이 중국 문명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인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즉, 고대 왕조 이래로 통치자들은 이 산에 제단을 설치하고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함으로써 큰 의미를 부여해 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에 비유 하자면 백두산 신단수와 의미가 같은 장소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일대가 고대 중국의 핵심 지역이 되었을까? 대부분의 인구가 예나 제나 동해안 일대에 집중하는 것이 중국의 특징이다. 평야가 발달하고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탄생한 고대 문명 발상지의 공통점은 반 건조지역의 외래하천 유역이라는 것이다. 건조한 환경은 고온다습한 환경에 비해 농업에 불리하지만 질병으로 인한 재해는 훨씬 적다. 따라서 건조 지역을 흐르는 외래 하천은 질병에 안전하면서도 물이 풍부하고 평야가 발달하여 농업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 역시 황하 유역의 반건조 지역에 발달하였다. 이후로 중국인의 활동 무대는 점차 넓어졌지만 고대왕조 이래로 부여된 신성한 장소로서 태산의 의미는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낯익은 산

 

<전형적인 화강암산인 타이샨은 모양이 우리나라의 설악산이나 북한산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커다란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진 입구를 지나면 기념품 매장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고 그리고 개찰구가 있어서 그곳을 빠져 나가면 마이크로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크고 약간 거친 모양이어서 다분히 중국다운 느낌이 드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관광객의 이동 통로에 배치된 기념품 매장에서 풍기는 일본식 상혼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자본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나라임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용케 운전수 반대편 맨 앞자리에 앉게 되어 전망이 참 좋다. 재미있는 점은 계곡을 끼고 차가 올라가는데 제법 긴 계곡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평일이어서 그런가? 궁금증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바로 해결이 되었다.

 

 <계곡에 사람이 별로 없다>

 

  화강암 암반을 흐르는 계곡은 나름 멋진 풍광을 선사하는데 한참 올라가다 보니 길 옆으로 호두나무가 즐비하다. 천안의 상징인 호두나무를 이곳에서 만나니 반갑다. 천안의 호두나무도 중국에서 왔으니 이곳의 호두나무와 먼 조상이 같을 것이다.

 

<타이샨 올라가는 길 옆에 자라는 호두나무> 

 

  구불구불 산길을 이십 분 이상 올라가면 케이블카 승강장이 나온다.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서 있는데 이곳도 역시 중국 사람들은 별로 없고 거의 우리 일행 뿐인 것 같다. 뒤에서 화강암 산지의 특징을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있어 뒤돌아 보니 어제 리우공다오에서 바위에 관심을 표하시던 바로 그 최선생님이시다. 매우 친숙한 화강암론에서 단박에 교원대 냄새가 난다. 역시! 오경섭교수님께 지형학을 사사하셨단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앞뒤로 81학번 동기들이 여럿 있다. 최샘 뿐만이 아니라 제주에서 오신 영어샘, 울산에서 오신 지리샘, 그리고 앞에 서 있던 대학 동기까지 만났다. 상업과를 졸업한 이 동기는 선린인터넷고에 근무하고 있단다. 배에서는 나이 때문에 약간 소침해졌었는데 동기들을 잔뜩 만나니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

 

 <케이블카 승강장과 케이블카>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계곡> 

 

<타이샨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아쉬운 환경인식

 

  케이블카는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익숙한 물건이 아니다. 설악산, 금오산 등 오래된 관광지에는 남아 있지만 최근에 개발된 곳에는 잘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친환경적인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환경 의식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크게 반기지 않는 분위기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빠르게 산업과 기술이 발달하고 있는 만큼 환경보전에 대한 인식은 그에 걸맞게 성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어제 리우공다우의 해변 구조물이나 고속도로 노선 때문에 도로 아래로 들어간 고차박물관 등이 모두 하나의 맥락으로 정리가 된다.

   

<타이샨은 공사중>

 

  케이블카를 내려서 타이샨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설명을 들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위쪽에서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는지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온다. 궁금해서 잠깐 올라가 봤더니 숲 한가운데에 건물을 짓고 있다. '과연 중국이다!' 라는 생각이 두 가지 측면에서 절로 든다. 이 산 속에 막무가내로 건물을 짓는 특유의 뚝심과 국가적, 어쩌면 세계적인 자연유산을 거침없이 훼손하고 있는 반 환경적 태도. 이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등산로 안내 표지판>

 

<태산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 중>

 

<입구에 이런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황제는 걸어서 올랐을까?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계단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가면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상가 거리를 통과한다. 아직은 입점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모두 완료되면 꽤 큰 상가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통과하고 보니 별천지가 펼쳐진다. 갑자기 중국이 된 것이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은데 케이블카를 타는 동안은 사람이 없어서 평일이라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으려니 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 생각이 많이 틀렸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중국이다!

 

<새로 조성된 상가>

 

  관광지에 사람이 많지 않아 '그다지 유명한 곳이 아닌가?' 의심했던 경험이 여러 나라에서 있었다. 경험이 여러 번 누적되면서 사람이 바글거리는 것이 우리나라의 특징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동아시아 3국(한·중·일)의 공통점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물론 사람이 많은 관광지가 더 많지만 동아시아 일대는 특히 인구가 많아 관광지가 붐비는데 최근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더욱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런데 케이블카에서는 볼 수 없던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구름같이 몰려 오는 것일까? 알고 보니 이 사람들은 모두 계단을 걸어서 올라온 사람들이다. 그 유명한 태산의 7천 계단을 걸어서 올라오는 것이다. 공자도 이 길을 걸어 올랐고 역대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위해 오를 때도 이 길을 따라 올랐기 때문에 어도(御道)라고도 부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은 걸어서 올라오는 것 같은데 그 높이와 거리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등산로 출발점의 해발고도가 어림잡아 100m쯤 된다고 보면 해발 1400m이상을 오르는 것이며 등산로의 길이도 9.5km나 된다. 어쨌든 시간이 충분하다면 사실은 이 길을 걸어서 올라오는 것이 정석이라고 생각되었다. 산을 '정복'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경험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더욱이 중국을 대표하는 산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끼리 '케이블카 이용료가 비싸서 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건 중국을 너무 깔보는 '저급한' 사고방식이다. 특히 중국 사람에게 태산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한다면 나올 수 없는 생각이라서 스스로도 부끄럽다. 사실 만만치 않은 비용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케이블카 탑승료가 140위엔(왕복)인데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는 셔틀버스를 타야만 하는데 그 비용도 왕복 60위엔이니까 모두 200위엔, 우리 돈으로 4만원 정도 되는 셈이니까. 내려 올 때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하산할 때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걸어서 오르면서 태산의 의미도 만끽하고 내려올 때는 편안함도 누리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는 진짜로 이 길을 걸어서 올랐을까?

  역대 왕들 가운데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행한 왕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한다. 자격이 안 되어 못 올랐을리는 없고(왕이 누구에게 자격을 판단 받았겠는가?) 태산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의 차이나 정치적 환경 등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이 칠천 계단을 걸어서 올랐다고 전해진다. 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황제가 손수 보여줌으로써 결국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것이 통치자가 봉선의식을 행한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과연 태산! 

 

  태산은 단순하게 높이로 볼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설악산 보다도 낮은 산이며 외적인 경관도 설악산과 유사한 전형적인 화강암 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설악산과 태산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의미로 봐야만 태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태산은 역사에 전하는 역대 왕조의 기라성 같은 왕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장소일 뿐만이 아니라 중국 특유의 도교 경관이 잘 나타나고 있는 매우 특이한 장소이다. 태산을 오르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태산이다’ 이다. 역시 경승보다는 의미로 볼 만한 산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갈수록 더 든다.  

 

<길 옆으로 이어지는 화강암 절벽에는 다양한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태산을 오르는 길에 보이는 타이안시>

 

  많은 사람들을 헤치면서, 또는 함께 가면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타이안시가 내려다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옅은 안개가 끼어 시계는 별로 좋지 않다. 반대쪽은 수직의 화강암 절벽이 한동안 이어지는데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중국말은 참 재미있다. 어떻게 해도 네 글자로 대부분 표현이 되니 말이다. 모든 사물이나 의미가 한 글자로 표현이 되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이런 재미있는 경관이 나왔다. 그러니 우리말로 옮기다 보면 일정한 규칙이 없이 혹은 길고, 혹은 짧아진다. 그러다 보면 어렵게 느껴지고, 독특한 언어의 뉘앙스도 사라지고…

  잠깐 평평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높다란 계단을 만난다. 계단을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여러 사원 건물들이 기다리고 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계단 위에 빅시아시(碧霞祠)가 있다>

 

<도교사원의 관우상>

 

  도교사원에는 관우상이 눈길을 끈다. 관우는 우리 토속 신앙의 최영장군 같은 느낌을 준다. 권력 다툼에서 밀리면서 자연스럽게 정통성이 떨어지는 지배집단에 대한 저항의 표상이 된 최영장군은 조선시대 내내 민중 신앙의 대표적 숭배 대상이었다. 중국에서는 그런 역사적 인물이 바로 관우가 아닌가 싶다. 의리를 지켰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인물이기 때문에 많은 민중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할까? 관우상은 중국을 넘어 우리나라에도 나타난다.

 

<도교사원의 태산성모벽하원군상>

 

<지붕의 동물 장식은 이해가 되는데 구리로 된 듯한 철사는 무엇을 하는 구조물일까?>

 

<기복신앙이 매우 발달한 나라이다. 어디를 가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다>

 

<향이나 초를 태우는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돈을 던져 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앞에 보이는 전각은 커다란 향로같은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그 안에 향을 던져 놓고 기도를 한다>

 

<옥황정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타이안시쪽>

 

<많은 글귀들이 새겨져 있는 암벽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화강암 암벽에 마애불상이 많은 것이 우리나라라면 이곳은 다양한 글귀를 새겨놓은 것이 특징이다. 금색을 좋아하는 것도 특징이다>

 

<마당에 향내음과 연기가 자욱하다>

 

<낯선 모습의 조상들은 도교 관련 신상들인 듯>

 

<화강암 절리의 방향이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오악독존비 앞에 몰려있는 사람들.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을 찍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한무제가 봉선의식을 한 뒤 세웠다는 무자비(無字碑). 경치를 몇 자 글귀로 형언할 수가 없어서 글을 쓰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무리 뛰어난 시인묵객이라도 모든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무런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는 것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정상인 옥황정에는 이런 재미있는 경관이 나타난다. 중국 전통의 기복신앙과 어느 나라에선가 건너온 자물통을 채우는 문화가 결합을 한 것이다. 무엇이든 크기와 규모로 압도하는 것이 중국이다. 이 공간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마당을 가득채우고 있는데 자물통의 크기도 '애교스런' 수준을 훨씬 넘는다. 연인들의 사랑의 증표라기 보다는 재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강한 것 같다>

 

 <옥황정의 옥황대제상>

 

<옥황정 아래 무자비 옆에서 바라본 벽하사와 타이안시>

 

<경치가 좋아서 일관봉(日觀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 봉우리에는 자연경관과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큰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스릴 만점' 점프샷-옥황정과 일관봉 사이에 있는 화강암 암괴 위에서>

 

<일관봉 끝 부분에 발달한 절리의 방향은 남-북 방향에 가깝다>

 

<일관봉 끝부분에서 남동쪽 칠천계단 쪽을 바라본 장면. 저 길을 걸어서 올라 오려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일관봉 끝부분으로 가려면 이런 문을 통과해야 한다. 멀리 보이는 것이 옥황정>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만난 벽하사 동신문> 

 

<벽하사 입구에서 바라본 태산 진입로>

 

 

'태산 장소성'의 변화

 

  무의식중에도 머리속으로 장보고와의 관련성을 자꾸 찾다 보니 이곳의 의미를 격하하게 된다. 게다가 시간에 쫓겨 자세히 보기가 더욱 어려워져서 거의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보고 만 것 같다. 지나고 보니 의미가 큰 장소였는데 당시에는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뿌리'라는 전통적인 장소성이 오늘날에 와서는 개인적 기복의 대상으로 바뀐 느낌이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서 올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거창하게 조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재복과 집안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한 사람들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넘쳐나는 향연(香煙)과 촛불, 그리고 복채에서 그런 느낌이 든다.

  원래 기복이라는 것이 대부분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대규모의 기복 행위는 최근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화와도 일정한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경제적 격차가 확대되고 그것이 개인적 능력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적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기복신앙은 더욱 발호하게 되어 있다. 급속한 사회 변화는 체계적인 계층의 분화를 동반하기 보다는 무언가 무질서하고 편법이 동원되는 사회 현상을 만들어낸다. 결국 구원이 공동체를 기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판단될 때 사람들은 더욱 기복신앙에 매달리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던 국가 차원의 성지였던 태산이 이제는 개인적으로 복을 기원하는 개별적 장소로 변화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소를 공유하지만 그 장소에 대한 의미는 각자 다르게 해석이 되므로 '개별적 장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특권계급의 장소가 민중의 장소로 변화한 발전적 측면도 있지만 반대로 공동체의 장소가 개인적 장소로 변화한 퇴보의 측면도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타이샨 시내의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 버스에서 본 건물이어서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 알 수가 없다>

 

<타이샨국제호텔의 저녁식사. 치즈처럼 생긴 음식은 치즈가 아니고 밀로 만든 음식으로 얇은 종이 질감의 쌈 같은 음식이다>

 

<타이샨 시내의 중국은행.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금융산업이 발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타이샨 시내의 야시장. 웨이팡과 똑같이 저녁이 되면 이런 야시장이 생기는 것을 보면 중국 도시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 

 

<크고 위압적인 타이안시 공안국 건물은 중국 사회에서 공안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대형 마트의 네온사인도 자본주의화의 상징이 될 만 하다.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광고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대형 광고판은 상당히 흔한 시설이다. 휴대폰을 광고하고 있는 광고판>

 

<타이안 인터체인지. 전자인식게이트(우리나라의 하이패스)가 일반화되어 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휴게소. 술을 파는 것이 특징인데 여기서 고량주와 약간의 안주를 샀다>

 

  타이안에서 쯔보로 돌아가는 길은 아까 올 때 왔던 길이 아니다. 타이샨의 서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시내를 통과하여 고속도로에 진입한 다음 동쪽으로 계속 달려서 라이우(莱芜)시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쯔보로 올라가는 노선이다. 이 노선은 산이 없는 평지의 연속이지만 안타깝게도 날이 저물어 주변 경관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올 때는 왜 굳이 지난을 거치는 노선을 택했을까? 고차박물관도 웨이팡과 쯔보 사이에 있으므로 그곳을 들르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별도의 설명이 없으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참 재미있는 여행이다. 몇 시간을 달려 하나를 보고 또 몇 시간을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포인트를 찍는 여행으로는 적당하지 않은 일정이다. 아니 적당하지 않은 나라이다. 이 큰 나라를 단기간에 많이 보려 하는 것은 애시당초 옳지 않은지도 모른다. 차라리 특정 지역을 체험형으로 집중답사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장보고 다큐를 본다. 이번엔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가 나와서 나의 눈길을 끄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지도에 신라가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섬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이미 12세기에 이슬람권에 신라가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