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중국 산둥(장보고 유적지 답사)

첫번째 이야기: 인천항에서 서해바다까지

Geotopia 2013. 10. 3. 22:04

▶ 답사 일: 2013년 8월 7일(수)~8월 12일(월)

▶ 답사 지역: 중국 산둥성 일대

▶ 답사 주제: 장보고 유적지 답사(한국해양재단 주관)

▶ 답사 경로

 

<일정  *원도:Bing Map>

 

   -첫째 날(8월 7일, 수): 인천항-선내 숙박(후아동훼리, 1박)

   -둘째 날(8월 8일, 목): 쓰다오(石島)항-웨이하이(威海, 점심식사)-리우공다오(劉公島)-옌타이(煙台)항-웨이팡(潍坊, 2박)

   -셋째 날(8월 9일, 금): 웨이팡-고차(古車)박물관-쯔보(淄博, 경유)-지난(濟南, 경유)-타이안(泰安, 점심식사)-타이샨(泰山)-쯔보(3박)

   -넷째 날(8월 10일, 토): 쯔보-강태공 사당-순마갱-칭저우(靑州) 박물관-웨이팡(점심)-쓰다오(4박)

   -다섯째 날(8월 11일, 일): 쓰다오-치샨-선내 숙박(후아동훼리, 5박)

 

   

◆ 프롤로그

 

▶ 성공한 역사적 경험에 대한 갈증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만이 아니다. 역사적 경험은 면면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공한 역사의 경험은 그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바라보는 세계관의 수준과 범위를 확장시켜준다. 중국, 몽골, 터키 같은 나라들, 심지어는 일본 같은 나라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도도한 자신감은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몽골 사람들은 징기스칸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구성원 개개인의 자존감을 드높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 대 제국을 건설했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눈높이를 세계적 스케일에 맞추고 있다. 비록 지금은 국력이 축소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성공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나라의 국민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전성기의 눈높이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우리의 역사 중에서 성공한 역사적 경험에 관심을 많이 가져왔고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우리의 역사는 그렇지 못한 측면이 더 많다. 대개 ‘끈질김’, ‘굽히지 않는 저항’ 등으로 묘사되는 우리의 역사는 은연중에 소극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우리에게 심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치밀하게 우리의 역사를 비하했던 것은 민족의 기상을 꺾어서 항구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치밀하고 집요한 전략이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일제의 역사관을 탈피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재생산하고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사실’이지만 또한 ‘해석’이기도 하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부각’시킬 내용들이 달라질 수 있으며 그 결과들이 이후의 역사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또는 의미있는 관점과 해석은 사실의 전수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장보고는 이런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해상왕’, ‘해신’ 등으로 불리는 장보고의 일대기는 한마디로 우리 역사 가운데 대표적인 ‘성공한 역사’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왔을 때 나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기뻤다. 지리학도의 답사는 당연히 역사학도의 답사와는 방법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간의 나의 답사에 비해서는 설렘이 덜했지만 나는 나의 지리학적 경험으로 역사적 사실과 장소를 보리라는 나름 ‘원대한’ 꿈을 꾸면서 답사를 준비했다.

  내가 접할 수 있는 자료는 대부분 거대한 해상제국을 일구어낸 위대한 인물로 장보고를 묘사하고 있었다. 출중한 능력으로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고 한․중․일 삼국을 넘어 동남아시아와 아랍권에 이르는 해상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지도자였음을 한국해양재단의 자료를 포함한 모든 자료들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내용상 차이라면 구체적인 사실의 수록 정도일 뿐 대부분은 비슷한 내용으로 ‘장보고의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자료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의문은 ‘장보고가 건설한 거대한 해상 제국이 왜 그의 당대에서 막을 내려야만 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장보고가 일군 위대한 역사가 진정으로 위대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군 상업 및 군사 체제가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 민족의 삶에 수렴이 되었어야 했다.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수천 년을 ‘위대한 상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시켰던 것처럼. 만약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그의 해양 통치 체제가 진정한 우리의 것으로 수렴되었더라면 그의 죽음과 무관하게 그 체제는 유지되었을 것이며 해양 경영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는 안타깝게도 그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것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보고의 위대함’을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장보고를 ‘바다의 왕자’로 묘사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가 나온 것이 벌써 20여 년 전이다. 더욱이 장보고를 ‘해신’으로 그린 드라마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것도 벌써 여러 해 전이다. 따라서 ‘장보고의 위대함’은 이미 전 국민적인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 국민 거의 대부분은 장보고의 위대함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장보고에 대한 연구는 위대함을 부각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야만 한다. 하지만 내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자료들은 여전히 ‘장보고의 위대함’ 이상의 내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 위대한 역사가 장보고 당대에 끝이 났으며 그 거대한 해상왕국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일까?

  첫 번째 의문은 불경하게도 ‘장보고의 역사는 과연 ‘해상왕’, 또는 ‘해신’으로 불릴 만큼 위대한 역사가 분명한가?’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당대에 끝나버린 역사를 과연 ‘신’, 또는 ‘왕’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역사 속에는 당대에 끝나버린 왕국도 없지 않겠지만 그 체제, 또는 영향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후대에 전승이 된 것이 상례이다. 하지만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안타깝게도 그의 후손에게도, 모국이었던 신라에게도 전승되지 않았다. ‘위대한 인물’의 ‘위대한 업적’이 ‘위대한 역사’가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위대한 역사’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자칫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인물만을 부각시키다 보면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어질 수도 있다. 장보고에 버금가는 위대한 인물이 다시 등장하기 전에는 다시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므로. 또한 그런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린 다시 이룰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열패감만 키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볼 때 장보고를 ‘해신’, 또는 ‘해상왕’으로 추앙하는 것이 결코 후손인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장보고에 대한 관심은 그 위대한 일대기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했던 사회적 원인과, 반대로 그의 죽음과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사회에 대한 천착으로 진화해야만 한다. 그것을 명확히 밝혀야만 비로소 우리는 장보고를 단순히 칭송하는 차원을 넘어 장보고의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기존의 자료를 통해서는 충분히 알 수 없는 이러한 의문점을 답사를 통해 풀어볼 수 있을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답사 코스를 보면서 각각의 답사지에 나의 의문에 대한 힌트들이 들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 보았다. 이번 답사에서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그것, 장보고가 해상 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과 반대로 그의 죽음과 함께 급속하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찾아보는 다소 거창한 것이었다. 정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작은 힌트라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답사를 기다렸다.

 

 

◆ 첫째 날 : 2013.8.7(수) : 인천항 출발-서해상

 

 

중국관광객들에게는 밥솥이 인기

 

  드디어 출발!

  방학 중 보충수업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3일이나 일찍 끝내고 길을 나서는 나를 동료들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미안함을 애써 감추며 동료들의 눈길을 뒤로 하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항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일행이 생각보다 많다. 80여 명이나 되는데 우리가 세 번째 팀이니 한 240여 명 정도가 해마다 이 일정으로 답사를 다녀왔다는 얘기가 된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상당한 예산이 투입되는 큰 행사겠구나 싶다.

 

 <대합실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밥솥들>

 

  중국 관광객들에게는 전기밥솥이 인기가 있는지 대합실 매점에 다양한 종류의 밥솥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모님들도 한 때는 일본 여행에서 코끼리밥솥인가를 사오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중국 관광객들이 지금은 우리나라 밥솥을 사가는 모양이다.

  잡화점에 들러 팔토시를 하나 샀다. 여태까지 한 번도 끼어본 적이 없는데 눈에 띈 김에 혹시나 해서 사보게 되었다. 그런데 값이 3천원, 너무 싼 것이 아닌가 싶다. 옆에서 지켜보던 문승규샘이 사지 말라고 눈짓을 한다. 눈치를 챈 주인아줌마가 국산이니 품질은 걱정하지 말란다. 옆에 있는 물건을 가리키면서 이건 중국산인데 2천원이라면서 만약 품질에 문제가 있다면 돌아오는 길에 반품을 받아주겠다며 사람 좋게 웃는다.

  대합실 매표창구를 보니 인천항에서 배로 연결되는 곳은 쓰다오(石島) 뿐만이 아니라 단둥, 옌타이, 다롄 등 여섯 곳이나 되어 새삼 놀랍다. 그런데 지명이 모두 한글 독음으로 되어 있어서 좀 아쉽다. 지명에 대한 나(지리학도)의 생각은 원어 발음을 쓰는 것이 옳다고 본다. 국제적 기준은 당연히 현지어인데 전 세계에서 우리만 쓰는, 그래서 우리만 알 수 있는 지명을 쓴다는 것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지 않는 오류이다.

 

<중국 지명이 우리식 발음으로 표시되어 있는 매표소> 

 

인천항에 뜬다리부두가 있는 이유는?

 

<후아동훼리>

 

 쓰다오까지 가는 배는 정원이 1,000명인 큰 배인데 멀리서 보기에는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는다. 다섯 시 반경에 승선을 해서 여섯 시 조금 넘어서 출발한다. 배삯이 생각 밖으로 비싸다. 나누어준 티켓을 보니 편도 324,000원이나 되는데 이 정도면 비행기 삯과 맞먹는 수준이다. 저가 항공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비쌀 수도 있겠다. 기본 28만원, 세금 4,300원, 유류할증료(BAF, Bunker Adjustment Factor)가 40,000원이다.

  출발 전에 배의 갑판을 둘러 보았다. 궁금증이 많은 문승규선생님이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 번째는 우리 배가 정박하고 있는 대형 부두에 딸린 작은 뜬다리의 역할과 또 하나는 유명한 인천항(내항)이 갑문식 도크를 사용하는데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왜 갑문이 없는 일반 부두인가 하는 점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단둥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뜬다리를 촬영해 놨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나는 다만 ‘인천항=갑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냥 혼자 뿌듯해 했었는데 문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보니 이 뜬다리의 역할이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경험했다고 새로운 지식을 먼저 갖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시설을 분명 먼저 경험했으나 특별한 의문을 갖지 않았으므로 경험의 의미가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인천 앞바다의 석양>

 

<배에서 바라본 인천항 터미널>

 

<배에서 바라본 인천내항과 자유공원>

 

<널직한 후아동훼리의 갑판과 거대한 배기통>

 

 지리학도 둘이서 한 참 동안 주변을 관찰하고 궁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승객은 사다리를 통해 타고 내리므로 해수면의 높이와 무관하게 승선과 하선이 가능하다. 즉, 해수면이 변동을 해도 사다리의 경사도만 달리하면 되므로 승객들이 오르내리는 탑승 시설은 굳이 뜬다리를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자동차는 다르다. 자동차는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가 없으므로 배의 출입구와 똑같은 높이의 부두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뜬다리의 비밀이었다. 이 배는 자동차가 드나드는 출입구가 배의 뒤쪽에 설치되어 있고 배의 뒷부분이 뜬다리에 연결되도록 되어 있었다. 뜬다리는 그러니까 독립적으로 기능을 수행하는 단독 부두가 아니고 큰 페리호에 탑승한 자동차가 드나드는 시설, 즉 여객선 부두에 딸린 부속 시설인 것이다. 가만히 보니 원체 그 시설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자동차가 오르내리는 출구와 뜬다리부두>

 

  또 한 가지 왜 이곳에는 갑문식 도크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여객선 터미널과 화물터미널의 차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대개 화물선이 여객선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더 수심이 깊은 항만 시설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인천 출신 선생님으로부터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방을 쓰게 된 문승규선생님이 질문을 해서 알아낸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화물선은 여객선이 비해 좁고 깊게 설계가 된다고 한다. 따라서 화물선이 보다 수심이 깊은 부두 시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인천내항에는 갑문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인천내항과 월미도, 그리고 자유공원>

 

 <우리 배보다 먼저 출발하는 단둥훼리>

 

 <갈매기에게 과자를 주는 중국 어린이들>

 

 

 

 

 <인천항을 뒤로 하고…>

 

 <영종신도시>

 

<인천대교> 

 

<인천대교의 가장 높은 교각 아래를 지난다> 

 

 

 

  7:00에 저녁을 먹었다. 특별히 구미가 당기거나 반대로 싫은 음식은 없는 것 같다. 식당이 약간 쾌적한 느낌이 아닌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아무 맛 없는 중국 특유의 빵도 나오는데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첫 식사니까 경험삼아 먹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전에 퉁화에서 단팥빵처럼 먹음직 스럽게 생겨서 덥썩 집어들었다가 먹다 말 수 없어서 꾹꾹 씹어 먹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특별할 것 없는 식사를 간단히 마친 후 갑판에 나가 보았다. 오른쪽으로 소무위도, 왼쪽으로는 자월도가 지난다. 7:20이니까 1시간 20분 정도 항해를 한 것이다. 아직은 휴대폰의 GPS가 작동을 하기 때문에 위치를 알 수 있다. 섬들이 보이지 않게 되면 휴대폰 신호도 끊길 것이다. 배의 속도는 22노트, 시속으로는 약 40km 정도 되는 셈이다.

 

<저녁식사> 

 

만나면 좋은 친구

 

  324호는 네 명이 쓰는 방이다. 여덟 명이 쓰는 큰 방도 있지만 대부분은 4인실인 듯하다. 처음 만난 우리 방 식구들은 얼핏 보기에 나랑 비슷해 보이는 연배인데 대개 이런 경우에는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먼저 관등성명을 토설 했다. 나이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나잇값을 해야 할 것 같아서다. 예상대로 내가 제일 노털이다. 어쩌면 일행 전체에서 최노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이런 행사에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길을 자제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비슷한 것이 고개를 든다. 나이는 스스로 먹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먹는 것이 분명하다.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실제 나이보다 적게 인식이 된다. 사진을 보고 거울의 모습과는 달리 ‘갑자기 늙어 버린’ 내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는 것을 보면 틀림이 없다. 자신에 대한 이런 인식 방법은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젠 내 눈에 나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나와 비슷한 연배려니 한다.

  호적조사를 마치고 보니 방배치가 연령순으로 된 것 같다. 81, 82, 83, 86학번이 324호에 배정된 것이다. 충북전산기계공고 임헌종선생님, 창원 봉림중학교 이봉진선생님, 서울 오류중학교 강정구선생님, 학번 순이다. 앞의 두 분은 각각 역사과, 윤리과이고 강선생님은 나와 같은 지리과이다. 같은 사회과에 팔십년대 학번, 공통점이 많은 듯하다. 임샘은 붙임성이 좋아 누구에게든 먼저 말을 건다. 경상도 사나이 이봉진샘은 시간이 갈수록 많은 얘기를 간직한 분이라는 것이 조금씩 드러난다. 동국대 지리교육과 출신인 강선생님은 첫 날 잠깐 만남이지만 지리과 특유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언짢은 해프닝

 

  여덟시부터 세미나가 시작된다.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달라는 당부가 인천여객터미널에서부터 있었던지라 시간을 맞춰 세미나장인 식당으로 내려갔다. 당부도 당부지만 세미나를 통해 이번 답사의 줄거리를 잡고 내가 생각했던 주제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더욱 컸다. 그런데 세미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두 명이 불참을 한 것이다. 시작이 늦춰지면서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관계자는 두 사람을 돌려보낸다면서 계속 ‘단체 활동’, ‘ 나 하나가 조직에 피해를…’ 식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책망을 쏟아낸다.

  불쾌하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규칙을 어겼다면 원칙대로 처리하면 그 뿐이다. 애써 시간을 맞춰온 우리가 대신 야단을 맞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도 자리에 없는 잘못한 학생을 빌미로 야단을 쳐본 적이 없다. 혹시 이를 빌미로 미리 경고를 함으로써 앞으로의 행사 진행에서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한 예방적 차원의 엄포라면 이건 주최측의 대단한 실수다. 두 명의 규칙을 어긴 사람 때문에 팔십여 명의 자발성을 억누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실수일 뿐만 아니라 이런 행사를 하는 이유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행위이다. 이 행사가 ‘의미를 달성’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무사히 치르기만 하면 되는’ 행사인가? 진행상 배려가 부족하다. 엄밀히 따지면 우린 공생관계이다. 이 사업과 재단의 존재 이유는 우리 같은 지원자가 있기 때문이다. 관료주의로 회귀하는 사회 분위기가 투영된 결과가 아니길 바란다.

관계자들이 한참 왔다 갔다 하더니 뒤 늦게 두 분이 참석을 해서 전원 출석을 달성한 후에야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과음으로 참석을 하지 못했다는데 저녁을 먹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어떻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술로야 나도 남부럽지 않은 편이지만 이 분들은 내 수준을 넘어가는 고수들이 틀림없다.

 

변화의 나라 중국에 대한 기대감

 

  해프닝 때문에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십년 째 이 답사에 참여하지만 매번 재미있다는 명지대 김덕원교수님의 모두 말씀에 귀가 솔깃하다. 10년 째 매력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것이 과연 무얼까? 답은 ‘중국이 매번 어떻게 변화하는가’가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소한 서너 번 쯤은 갔다 와야 ‘중국 좀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인데 나는, 지리학도인 나는 어쩌다 보니 이번이 ‘겨우’ 두 번째 중국 여행이다. 그것도 무려 9년 만이니 아마도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년 다녀 온 분이 그 변화가 궁금하다니 말 그대로 ‘변화의 국가’인 것이 분명하다. 일단 답사에 대한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김교수님은 최치원 전공이어서 양저우(揚州)에 관심이 많다고 하신다. 최치원뿐만 아니라 정몽주 등 역사적으로 양주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 많아서 양주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자신의 별명이 ‘진도개’라고 소개를 해서 일순 ‘긴장’했는데 ‘진도는 반드시 마친다’ 라는 뜻이라고 해명을 해서 좌중을 다른 방법으로 긴장시킨다. 기대했던 나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흥미 있는 정보들도 있다. 예를 들면 옛날 범선 중에서 돛대가 하나인 것은 하천용이고 돛대 두 개짜리는 바다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중국 항로로 랴오둥반도의 다롄에서 산둥반도의 북쪽 덩저우(登州)로 이어지는 항로가 많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당연히 황해를 횡단하는 항로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상당히 새로웠다. 또한 이 항로는 미야오다오(廟島)군도를 징검다리처럼 건너기 때문에 안전하였으므로 거리가 멀었음에도 많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답사 중에 지도를 살펴보니 랴오둥반도에서 산둥반도 사이에는 연속된 작은 섬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 역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섬들은 황해에서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텐진-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심장부를 방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장보고는 당항성에서 직접 황해를 횡단해서 쓰다오로 가는 항로를 활용했다. 장보고는 강과 바다에 대한 관심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다.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이런 인물은 흔치 않으므로 장보고의 바다에 대한 관심은 정말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의미로 나는 해석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그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다에 다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정화함대의 원정이 부각되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한다.

  사실의 전달은 자료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자료를 읽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지만 자료를 만드는 것은 그것을 먼저 읽어보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 내용은 그것을 넘어야 한다. 또한 행사의 의미가 담긴 메시지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세미나에서는 행사의 의미와 그에 걸맞는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고지식한 내 성격 탓인지도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계속 ‘장보고’에 초점을 맞추어 답사 장소를 연결하려는 나를 본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장보고와 전체 답사 일정의 연결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아직 본격 답사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독거렸다. 답사 현장에 가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장보고와 연결이 되리라 기대를 해 본다.

  차는 모두 세 대인데 초․중․고 학교급별로 배정이 되었다고 한다. 방은 나이순으로 배정되었고 식사 조는 또 다른 방법으로 배정되었다. 여러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도 같다. 다시 한 번 ‘원활한 단체 활동을 위해 개인적 행동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는 쐐기 박기와 함께 일기 상 원인으로 일정이 바뀔 수도 있다든가, 음식, 특히 빙과류를 조심하고 과일을 반드시 씻어서 먹으라는 주의사항이 전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탈이 났다는 얘기를 앞 기수로 참석하신 어느 분이 홈피에 올려놓은 글에서 봤던 터라 좀 더 긴장이 된다. 물을 바꾸면 배탈이 나는 것은 선․후진국의 구별이 없는 법인데 중국의 ‘배탈’은 왜 ‘낮은 위생 수준’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후아동(華東)페리는 어느 나라 배일까?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가벼운 술판이 벌어졌다. 강정구샘이 매점에서 칭다오 맥주를 사오는 바람에 판이 시작되었는데 나도 강샘을 따라 매점에 따라 들어갔다가 혹시나 해서 중국술 작은 거 하나를 사왔다.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세 종류의 고량주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을 골랐지만 그래봐야 5천원이다. 근데 상품은 모두 중국 상품인데 왜 계산은 한국 돈으로 하는 것일까? 잔돈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술값을 중국 돈(100위엔)으로 지불하고 거스름돈을 받으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한다. 거참! 직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한-중 합작 회사라서 그렇단다. 그런가 보다 하고 돌아섰는데 가만 생각하니 중국 상품에, 중국 직원에, 한국 냄새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왜? 아직은 중국의 노동력이 싸기 때문에 직원들이 대부분 중국인인 것일까? 상품도 중국 것이 싸기 때문에?

처음 만난 사이지만 제법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옆방의 문승규샘이 건너와서 합방이 성사되었다. 우리방과는 달리 8인실이어서 넓은 방인데 이 방 식구들은 모두들 젊은 샘들로 이루어져 있고 초․중․고 샘들이 섞여 있다. 적당한 술기운은 세대와 지역과 학교급간의 간격을 순식간에 허물어 버린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