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째 날 : 2013.8.8(목)
▶ 여정 : 쓰다오항-웨이하이시-점심식사-리우공다오-옌타이항-저녁식사-웨이팡(2박)
<둘째 날 여정 *원도:Google earth>
▶ 첫인상이 친숙한 쓰다오(石島)
여명과 함께 다가오는 쓰다오항은 짙은 안개에 덮여서 잘 보이지 않는다. 날씨만 좋다면 바다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볼 수도 있겠지만 안개가 끼어 어림없겠다. 여덟시에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정원을 얼마나 채웠는지 모르지만 천 명 승객 가운데 우린 겨우 80여 명인데 식사 시간엔 ‘한국해양재단 장보고유적지 답사팀은 식당으로 내려오라’ 방송이 꼭 나온다. 단체 팀이 아마도 우리 하나 뿐인 모양이다. 아침은 맑은 재첩국이 나왔다. 약간 비린내가 나지만 부추를 잘게 썰어 넣은 재첩국은 해장국으로 그만이다. 어제 밤 먹은 술의 양이래야 해장국 먹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을 좀 풀어주는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좀 더 마실걸 그랬나?
<재첩국이 나온 아침 식사>
아침을 먹고 나서 갑판에 올라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홉시 경이 되자 겨우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육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보다 한 시간이 늦으므로
<날씨가 흐려서 동쪽으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가 없다>
<앞쪽(서쪽) 역시 짙게 안개가 덮여 있어서 시야가 나쁘다>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쓰다오항>
<화강암산인 치샨을 배경으로 쓰다오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쓰다오항에서 만난 목포해양대학교 실습선>
<쓰다오항 전경>
<우리가 탄 큰 배를 미는 작은 배>
쓰다오항은 육지 쪽으로 큰 접안시설이 있고 항구의 남쪽에서 돌출된 곶부리에서 북쪽 방향으로 육지 쪽 접안시설과 평행으로 작은 접안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탄 배가 접안하는 곳은 바다 밖으로 설치된 작은 접안시설이다. 육지쪽에는 크레인과 저유탱크 등이 설치되어 있어 이 항구가 주로 여객보다는 화물 중심의 항구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이 최근 산업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경관이기도 하다.
썰물이라서 그런지 하선할 때의 계단 경사도가 승선할 때 보다 훨씬 완만하다. 아니면 사다리가 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두에서 출입국장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많이 낡았다. 당연히 에어컨도 없어서 찜통인 버스를 타고 간다. 입국 절차는 비교적 간단한데 검색대에서
고등학교 팀이 타는 3호차에는 벌써 많은 분들이 타고 있는데 앞자리가 비어있다. 가능하면 앞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지만 이번엔 안 될 것 같다. 안내를 맡은 교수님과 현지 가이드, 그리고 해양재단 직원까지 도저히 내 차례가 올 것 같지가 않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랬다고 빈자리를 찾아 계속 뒤로 이동하다가 결국 거의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차는 비교적 깨끗한데 의자가 많이 불편하다. 의자의 앞부분이 높아야 편안하게 몸이 뒤로 젖혀지는데 이 의자는 뒤가 높아서 몸이 앞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문승규샘과 둘이 앉으니 카메라 가방이 또 처치 곤란이다. 각자 앉으려고 해도 의자의 여유가 없어서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겠다.
▶ 股份有限公司?
<해석하면 '웨이하이후아동 배 수선 주식회사' 쯤 될까?>
<백화점 외벽의 대형 광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받아들인 결과 주식회사뿐만이 아니라 도시 내의 경관이 이젠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하다. 백화점 외벽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여인이 화려한 방에 앉아 있는 커다란 광고 사진이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인 KFC는 ‘肯德基’라는 상당히 긍정적 어감의 중국말로 바뀌어서 역시 중국인들을 글로벌한 입맛으로 길들여가고 있다.
<KFC 매장>
▶ 산둥성은 노나라이다
웨이하이시로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들려준 얘기 중에 재미있는 얘기들은 이런 것들이다. 산둥성의 지역 총 생산은 전국 2위이며 인구는 9,300만에 이른다. 생각보다 산업이 잘 발달한 곳이 산둥성이다. 강수가 500~600mm 정도에 불과하여 벼농사가 불가능 하다는 정보도 들려준다. 이건 상당히 의외이다. 실제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농업 경관은 옥수수나 채소 같은 것이 주를 이루는데 가이드는 밀농사가 중심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밀을 재배하는 시기가 아니므로 밀밭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멀리 보이는 치샨(赤山)의 경관이 건조지역을 닮았다. 노출된 암괴 사이로 듬성듬성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그 사이로 풀이 자라는. 하지만 푸른 들판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강수량이 적어서 벼농사를 못 한다기 보다는 오랜 관습 때문에 벼농사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수리관개시설이 빈약했던 과거에는 벼농사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따라서 밭농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리관개시설을 이용하여 충분히 벼를 재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의 오랜 식습관과 농업 관성 때문에 밀과 옥수수를 재배하는 농업이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계속 이어지는 경관은 그다지 건조해 보이는 경관은 아니다. 나무도 작물도 습윤한 느낌이 들고 하천과 작은 저수지가 제법 많이 분포한다. 그런데 갑자기 인천항 매점에서 팔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전기밥솥이 떠오른다. 쌀농사를 안 하는데 왜 전기밥솥이 잘 팔릴까?
쓰다오의 인구는 약 15만 명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면급 정도의 취락이다. 웨이하이시에 속하는 도시로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시(市)가 될 만한 크기지만 중국에서는 그다지 위계가 높은 도시 축에 낄 수가 없단다. 과연 대륙의 도시다!
산둥성은 전체적으로 닭 모양인 중국에서 앞가슴에 해당하며 산둥성은 손바닥 모양으로 설명이 된다. 과연 산둥반도의 모양은 손가락을 붙인 왼손의 손바닥을 바라볼 때 모양처럼 생겼다. 산둥성은 중국 역사의 시발점이면서 유교, 도교 등 핵심 동양 사상이 발생한 곳이다. 공자가 산둥 곡두 태생이며 중국의 고대국가 하, 은, 상나라가 이곳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냥 우리나라와 가까운 지역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유서가 깊은 곳이고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산둥성은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화교들의 고향이며, 그들에 의해 전파된 자장면의 고향이기도 하다. 산둥반도의 끝인 성산두(成山頭)에서는 우리나라의 닭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예전에 보령의 외연도에 갔을 때 들었던 말이다. 외연도에서는 날씨가 좋아 파도가 잔잔한 날은 산둥의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었다. 그 때는 그 말을 조금은 믿었었는데 이곳에서 들으니 이상하게도 중국 특유의 뻥이라고 여겨진다.
<'魯'자로 시작하는 산둥성 자동차 번호판>
‘魯’자 다음에 있는 알파벳은 지역별로 붙이는데 예를 들어 칭다오는 A를 붙이지만 일정한 규칙은 없다고 한다. 검은 번호판은 한국인 전용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신경을 안써서 그랬는지 여행 도중에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시골인데도 더러운 냇물은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쓰다오에서 웨이하이에 이르는 길 주변은 고만고만한 구릉이 발달하고 있는 非山非野의 지형으로 드넓은 평지는 아니어서 뙈기 옥수수밭이 많다.
가로수는 플라타너스가 가장 많은데 나무가 크지는 않다. 심은 지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강수량이 적어서 나무가 충분히 자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곳도 이런 특징이 있는지는 앞으로 답사를 하면서 관찰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 방위가 표시되어 있는 도로 표지판
웨이하이 시내에 들어가기 전 도로의 오른쪽 해변에 너른 백사장이 발달한다. 백사장과 도로 사이에는 작은 공원(화단이 맞을까?)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상공원은 무려 27km에 이른다. 과연 대륙의 공원이다. 한 청년이 공원의 풀밭에 누워서 한가롭게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가롭다’ 보다는 ‘하릴없다’ 쪽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뭐하는 사람일까? 멀쩡해 보이는데 이 시간에 왜 그러고 있는 것일까? 예전이 왔을 때 보다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하릴 없이 길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주로 노인들이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항상 이유도 없이 바쁘기만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문제일 수도 있다.
웨이하이시는 200만 명에 이르는 주민 중 토박이는 80만 명에 불과한 신도시인데 '문명도시'로 뽑힌 도시답게 길이 넓고 정갈하다. 새로 지은 아파트로 돈 있는 은퇴자들이 이주 정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로 동북지역에서 석유 산업 등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자동차 우선주의는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는 가이드는 신고하면 벌금 물기 때문이라고 자기 비하적인 진단을 내린다.
최근 이곳에서는 막춤 붐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음악을 틀어놓고 형식 없이 마구 추는 그야말로 막춤이라는데 대개 운동 삼아 춘다고 한다. 옛날 우리 어렸을 적, 카세트 녹음기가 막 보급될 무렵에도 이런 막춤이 유행된 적이 있었는데 얘기를 듣다보니 그 때 생각이 났다.
<방위가 표시되어 있는 도로 표지판>
웨이하이 시내 바닷가에 있는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음 여정인 리우공다오(劉公島)에 가기 위해 유람선 터미널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근처 식당에 가는 것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나서기가 겁이 날 지경인데 차에서 내려서 잠깐 공중 화장실에 들렀다. 주차장 가운데에 있는 화장실은 외관이 깔끔하고 입구에는 여러 명의 노점상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다. 화장실 시설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것이 분명하지만 ‘좋아져 봤자 중국 화장실’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살짝 든다. 정돈된 외형과는 달리 내부의 냄새는 여전하여 입구의 노점상들이 걱정이 된다. 이후에 만난 많은 화장실들이 대부분 이곳 보다는 나아서 내 생각이 옳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었지만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모델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을 비롯하여 주차장 일대가 들고나는 차들과 인파가 섞여서 매우 혼잡하다. 윗통을 벗거나 속옷 차림으로 창문을 열고 운행하는 차들이 많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기름을 아끼기 위해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꽤 오래 전 우리의 풍경이었던 것이 떠오르면서 ‘절약’이란 낱말을 잊은 지가 꽤 오래 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 목욕의자에 앉아 밥을 먹는 중국인들
<한글이 함께 쓰여 있는 음식점 간판>
써빙을 하는 청년들이 반찬을 내오는데 내용은 한식과 비슷한데 상차림을 하는 형식은 반찬이 순차적으로 나오는 중국식이다. 바빠서 그랬는지, 당황해서 그랬는지 오징어두루치기를 가져온 총각이 관성을 못 이겨서 식탁에 음식 일부를 쏟아놓고는 그냥 가버린다. 쏟은 것을 닦을 필요도, ‘죄송합니다’ 하는 인사치레도 없다. 얼마나 바쁜지 조금 있다가 다른 반찬을 가져올 때 보니 아까 쏟을 때 음식이 묻었던 엄지손가락에 빨간 소스가 묻은 그대로이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더운 실내공기 덕분에 식사 속도가 아주 빠르다. 식사조로는 첫 만남이어서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다가 내가 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처음 만난 여선생님들 사이에 앉게 되어 어색해서 식사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수라상?>
<목욕의자에 올라 앉아 식사를 하는 중국 사람들>
옆 자리의 중국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테이블이 아니고 방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바닥에 앉은 것이 아니라 목욕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한다. 의자의 높이가 얼추 상 높이라서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데 왜 그렇게 먹는 것일까? 내 눈에는 그냥 바닥에 앉는 것보다 훨씬 불편해 보이는데 나중에 가이드가 들려준 얘기는 입식문화라서 양반다리가 안 되기 때문이란다.
▶ 산둥에도 대나무가 자란다
식사 후에 잠깐 해변을 둘러보니 다양한 조형물들로 꾸며져 모양을 많이 냈다. 화단도 정갈한 것이 손이 많이 갔음을 느낄 수 있다. 정말 10여 년 사이에 엄청난 진보를 한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도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인다. 바이올린과 눈에 띄는 파란색 드레스로 멋을 낸 모델과 그를 찍는 사진가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엄연한 사회주의 국가지만 자본주의적 생활이 일상에 자리를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델 촬영이란 것은 순수 예술이거나 아니면 광고용 사진을 전제로 한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라도 모두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 활성화되는 것들이다.
<서양인의 모습을 한 음악가와 피아노 조형물>
중국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 또 있다. 해변에 설치된 조형물들이다. 커다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랜드 피아노 앞에 서 있는 음악가로 보이는 사람은 곱슬머리에 연미복을 입은 틀림없는 서양 사람이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하게 하는 조형물도 있다. 퓨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국적불명이라고 해야 하나? 예전 같으면 꿈도 꿀 수 없었던 경관이다.
<퓨전?, 국적불명?>
<해안공원의 대나무>
<웨이하이 해변 공원>
▶ 훌륭한 제도와 엉터리 준법
<웨이하이 시내 풍경. 새로 짓고 있는 건물들이 많고 길도 넓직하게 잘 뚫려 있다>
<리우공다우 유람선 선착장 개찰구>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 같은 느낌이 드는 나라가 중국이다. 여행지가 한적하면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점에서 중국은 아주 익숙한 분위기인 것이다. 유람선 역시 사람들이 많다. 평일인데도 이렇게 많으니 주말에는 난리가 나겠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웨이하이시>
갑판에서 웨이하이 원경을 몇 장 사진에 담고 객실로 들어가니 텔레비전에서 리우공다오에 대한 관광 안내로 보이는 영상이 나온다. 그런데 화면에서는 아름다운 경관이 아니라 청일전쟁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이곳은 관방유적의 일종인 모양이다. 장보고는 이곳에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답사가 주제(장보고)로 몰입되는 느낌이 아직은 적다. 좀 더 기다려 봐야겠지? 하지만 자료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기다려도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유람선 내부. 텔레비전에서는 청일전쟁과 리우공다오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날씨가 엄청 덥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34도라고 예보에는 나왔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37도는 되는 것 같다고 한다. 35도 이상이면 공장이 임시 휴업을 해야 되는 법규 때문에 35도 미만으로 발표한단다. 훌륭한 제도와 엉터리 준법,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불신감의 안타까운 조합이다. 이런 경우엔 법을 고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원칙적 법집행이 옳을까?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제도가 옳으니 지켜야 옳겠고, 불신감이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부정적 효과를 생각할 때도 법을 지키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지만 산업화의 홍수 속에서 생산성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법규를 현실화 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 리우공다오(劉公島)가 화산?
리우공다오는 청나라 북양함대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북양함대는 황해 전체를 관할하던 사령부이고 리훙장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창설한 부대이다. 그래서 이곳은 청일전쟁 당시에 최고의 격전지였다. 청일 양국은 인천 앞바다의 풍도에서 첫 격전을 벌였고 그곳에서 청군이 궤멸된 이후 연이은 패전으로 황해의 제해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패전 기념관이다. 왜 이들은 이런 특이한 기념관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여러 가지 특징들을 고려해 볼 때 이곳은 중국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생각되었다. 군벌 리훙장의 패전을 구체제의 모순에서 온 것으로 푸는 것이다. 더불어 제국주의 일본의 잔악성을 보여주어 내부적 결속을 강화하며 또한 해양과 관련한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홍보하기 위한 기념관이라고 볼 수 있다. 얼핏 ‘패전’이라는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체제 탄생의 정당성과 앞으로의 정책을 홍보하는 양수겸장의 공간인 셈이다.
<화강암 위에 응회암이 올라앉아 있는 이 바위의 정체는?>
배에서 내려서 북양함대 침몰 잔해들을 전시한 ‘중국갑오전쟁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암석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 퇴적암인 것 같기도 하고 화성암 계열 같기도 해서 다가가 보았더니 바로 앞에서 어떤 선생님 한 분이 그 바위를 촬영하고 있다. 특이할 것도 없는 바위를, 그것도 스케일로 물병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지리과 선생님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주고등학교 최병숙선생님이시다. 역시 직업병, 지리학도는 어디를 가도 서로를 알아본다.
유공도의 지질구조가 궁금해진다. 쓰다오 일대는 화강암지역이 분명한데 웨이하이 일대는 육안으로 관찰할 기회가 없었다. 이곳은 섬이지만 거리상으로 볼 때 웨이하이시 일대와 유사한 지질구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출된 암괴는 퇴적층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육안으로 볼 때 콘크리트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화산성 응회암과 유사하다. 응회암이라면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전체적인 지형으로 볼 때 너무 생뚱맞다. 도대체 뭐지?
▶ 답사의 방향에 대한 적잖은 혼란이 생기다
劉公島는 이름 그대로 한나라 유방의 후예인 兪公(劉民)의 이름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와 관련된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도무지 흥미의 촉수가 발동을 하지 않는다. 이번 답사가 ‘장보고 유적지 답사’가 아니었다면 어떤 사실이든 관심을 가졌겠지만 어디를 가도 이상하게 자꾸 ‘장보고’만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고지식하게 답사에 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이게 마음대로 잘 되질 않는다. 함께 온 해군제독께서는 완곡하지만 강정마을에 대한 해군의 입장을 유공도에 빗대어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도 잠깐 내 보이신다.
<침몰한 북양함대의 잔해들>
<정여창 사당 앞에서 참배하는 어린이. 빨간 통 속에 든 것은 참배객들이 낸 복채이다>
게다가 이 패전기념관이 설치된 이유는 무엇인가? 전시관에 일관되게 흐르는 메시지는 청나라 왕실과 군벌의 무능함, 그리고 백성의 위대함이다. 백성의 뜻을 모으지 못한 상태에서 북양함대가 물리적 조직을 키웠던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중국인들은 군벌 지도부의 항복에 항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여창이라는 인물에게 엄청난 신뢰를 보내고 있다. 박물관 앞쪽에 있는 정여창 사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던진다. 혹시 ‘안보의식 고취’가 답사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면 이곳의 본질적인 내용을 볼 때 이곳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나라의 지도층이 세계사적 변화를 읽지 못하여 나라를 빼앗긴 역사에 대한 반성과 교훈의 장소라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 바위도 만드는 중국
박물관에 들렀다 내려오는 길에 아까 올라갈 때 사진을 찍었던 바위를 다시 관찰해 보았다. 내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다시 보니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암석이 서로 다르다. 아랫부분은 화강암이 분명한데 올라갈 때 사진을 찍었던 윗부분은 콘크리트 모양을 하고 있는데 층이 있다. 아무리 봐도 응회암인데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화강암 위에 응회암이 앉아 있는 셈인데 성격이 전혀 다른 암석이 이렇게 작은 공간에 명확한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다니… 자세히 관찰을 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화강암 암반과 위쪽 응회암처럼 생긴 바위 사이가 약간 벌어져 있다. 자연 상태의 절리면처럼 자연스럽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니 경계선 부분이 깊은 공백일 뿐만 아니라 틈에 손가락을 넣고 흔들어 보니 바위 전체가 흔들린다. 가짜 바위, 즉 만든 바위인 것이다.
헐~
<멋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리우공다오 표지석>
또 하나. 여객터미널 앞 광장에는 ‘劉公島’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표지석이 놓여 있다. 한 눈에 봐도 화강암인데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사람들이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통에 잠깐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기다리면서 보니 아무래도 바위의 모양이 약간 이상하다. 화강암은 화강암인데 점점이 박힌 광물질의 색깔이 붉은색 계열로 전형적인 화강암에서 볼 수 있는 검은색의 흑운모류와는 색깔이 다른 것이다. 뒤쪽으로 가서 자세히 관찰을 해보니 이것 역시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또 헐~
계란을 가짜로 만드는 것과 돌을 가짜로 만드는 것은 우리 지리학도에게는 엄청나게 차원이 다르다. 만약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갔다면 우린 이곳이 응회암과 특이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 아닌가!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혹시 학생들에게 생생한 정보랍시고 가르치기라도 했더라면…
<그런데 그 표지석이 콘크리트로 만든 가짜였다니…>
가짜 화강암 표지석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英租威海衛歷史博物館’이 있다. 이 박물관은 섬의 남쪽 가운데 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1898년부터 1939년까지 영국의 조차지였을 당시 영국은 이 섬에 교회, 학교, 가옥 등 영국적 경관을 만들어 놓았고 자신들의 휴양지로 활용하였는데 이 박물관은 당시의 문물과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중에서 일제의 침략과정을 보여주는 전시관만을 둘러보고 나왔다. 일제 침략사는 우리나라와 유사하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낄 수는 있으나 새롭지는 않다. 조차지였을 당시에 이곳의 경관을 볼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은 지리학도만의 느낌일까?
▶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구조물
<백사장에 노출된 화강암과 옹벽>
그런데 이 백사장이 참 안쓰럽다. 뒤쪽에 높은 옹벽을 치고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백사장이 옹색해 보인다. 모래가 입자도 곱고 색깔도 곱지만 휴양지로 활용하기에는 후면이 좁아서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해변을 걸어 다니기만 한다. 더욱이 이 정도의 옹벽이면 밀물 때 파도가 옹벽에 부딪혔다가 튀어나가는 반류를 강화시켜 백사장의 침식을 가속화하리라는 것은 오랜 시간 관찰해 보지 않아도 불문가지이다. 섬 전체적으로 제법 정돈된 경관을 만들었으나 환경과의 조화는 거의 고려되지 않은 것 같다. 이것도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빠른 개발이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는 환경과의 조화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나라는 덩치가 큰 만큼 나중에 이를 복구하는 것도 꽤 힘들 것이다.
▶ 英租威海衛歷史博物館
<날씨가 더워서 박물관 출구에 물을 뿌려 놓았다>
엄청나게 더워서 물을 자꾸 먹는다. 몸에 기본적으로 수분이 많은 나는 그래서 그런지 산을 오를 때 거의 물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계속 물에 손이 간다. 가만 생각해 보니 산에 오를 때 빼고 이런 더위에 이만큼의 시간 동안 노출되었던 것이 대체 언제였던가?
▶ 웨이하이와 옌타이 사이에 발달한 사구
리우공다오를 나와서 바로 옌타이(煙台)로 이동한다. 옌타이와 웨이하이의 거리는 대략 60km 정도로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산둥성 내 총생산 2위의 도시로 유명한 항구도시이다. 답사를 오기 전에 찾아본 위성영상에 따르면 웨이하이에서 옌타이로 가는 고속도로는 해안을 따라 거의 직선상으로 뻗어 있고 해안은 긴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로가 해안과 가깝다면 아마도
<웨이하이와 옌타이 사이의 해변으로 유입하는 하천의 하구>
<이런 크고 작은 하천들이 바다로 유입하면서 사빈과 사구의 모래를 공급하고 있다>
<큰 하천의 하구로는 배가 드나든다>
<사구 중간중간에는 이런 시설이 있는데 아마도 양식장이 아닌가 싶다>
도로와 바다와의 거리가 대략 1~1.5km 정도이고 도로 건너편으로도 사구가 이어지므로 사구의 넓이는 대략 2km 안팎은 되는 것 같다. 도로와 바다와의 거리도 적지 않지만 사구지대는 대부분 소나무를 비롯한 수림으로 덮여
▶ 드디어 만난 장보고의 자취
<장보고의 자취를 처음 만난 곳은 버스안이었다>
예년에 답사 코스에 들어있었던 성산두, 등주, 곡부 등이 올해는 빠졌다고 한다. 대신에 유공도와 옌타이가 추가 되었다. 놓친 고기가 크다던가? 어차피 ‘장보고’라는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답사지가 불가피하다면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성산두,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를 연결하는 북방항로의 종점이었던 등주, 그리고 공자의 고향 곡부가 객관적으로 볼 때 훨씬 의미있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이런 퇴행적인 답사 일정 변경은 우리 차 안내를 맡으신 김덕원교수님 말로는 ‘해양을 강조하기 때문’이란다. 누가, 왜, 갑자기? 이 답사는 원래 해양을 강조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 아니었던가?
▶ 옌타이항과 장보고의 관계는?
<치안질서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호>
<갯벌과 모래가 섞인 하구>
<옌타이시 외곽의 해수욕장>
<옌타이항 가는 길>
<옌타이항>
옌타이시에서 우리가 갈 곳은 옌타이항이다. 산둥성 해안에는 여러 개의 항구도시들이 발달하는데 옌타이는 칭다오와 함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다. 사실 장보고와 관련한 장소라면 옌타이보다는 펭라이(蓬萊)시가 더 의미가 있는 장소로 보이지만 이곳에도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 기대를 하면서 옌타이항으로 들어갔다. 옌타이항은 여객보다는 화물 중심의 항구인 듯 여객터미널은 볼 수가 없고 허가를 받은 다음 부두로 가야만 한다. 우리의 부산항이나 인천항 역시 화물선이 정박하는 부두는 자유롭게 갈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와 가깝기 때문에 이곳은 우리나라와 교류를 많이 할 것 같다. 연간 콘테이너 처리 능력이 2백만 개 정도로 매우 규모가 큰 항구이다. 인천의 연간 처리 능력이 80만개 정도라고 하니 옌타이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옌타이시의 인구는 약 650만 명으로 인천(2013년 3월 현재 약290만 명)에 비해 훨씬 많다. 하지만 중국의 ‘市’는 우리나라의 ‘市’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道’ 정도의 넓이를 가지며 그 안에 다른 시들이 들어 있는 형태이다. 즉, 옌타이시 안에는 여러 작은 시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인구 650만 이라는 얘기는 그런 작은 도시들의 인구를 포함한 인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광역 옌타이시의 다른 곳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옌타이시만 계산하면 인천보다는 인구 규모가 작을 것이다.
그런데 옌타이항에 내려서 옌타이항 직원의 브리핑을 듣는 동안 또 의문이 고개를 든다. 옌타이항에는 왜 왔을까? 중국어로 진행되는 직원의 설명은 주로 옌타이항과 관련된 내용으로 보인다. 거대한 크레인이 설치된 항구 시설과 콘테이너를 가득 실은 배 등 지리학도로서 볼거리는 되지만 기대했던 장보고와의 관련성은 없는 것 같다. 기왕에 왔으니 좀 더 둘러보고 사진도 찍었으면 좋겠는데 사진은 아예 못 찍게 할 뿐만 아니라 부두에 잠깐 내려서 직원의 설명을 들은 후 바로 차에 올라 항구를 벗어난다. 입장을 바꿔서 재단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이곳에 온 이유를 잘 모르겠다.
▶ 가장 겁나는 요리 물고기 요리
<옌타이 시내의 은행>
<저녁식사 장소>
<직원이 많은 식당>
<저녁이 되면서 갑자기 노점들이 잔뜩 생겼다. 근데 쥔 아저씨는 왜 웃통을 벗어 던졌댜?>
할아버지가 중국인인 모양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이봉진샘은 아주 맛있다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별로다. 박대영샘이 쏘스를 찍어서 먹어보라고 해서 쏘스를 찍어 먹으니 좀 낫기는 하다. 나중에 호텔에서 우연히 물고기 요리를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물고기는 그냥 쪄내고 그 위에 쏘스를 붓는 방식으로 요리를 하는 것을 그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알았다. 즉, 물고기 요리의 핵심은 물고기 자체가 아니라 쏘스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물고기 요리는 전체적으로 물고기에 간이 배어들게 해서 짭짤하게 먹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중국 물고기 요리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양념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맨살만 떼어 먹었으니 맛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쏘스를 찍어서 먹는 것이 맞는 것이었다. 어쨌든 점심과는 달리 쾌적한 공간에서 여유있게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특별히 우리 입맛에 맞게 요리를 해달라고 주문을 했는지 중국 음식답지 않게(?) 특유의 향이 적어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 밤과 함께 등장하는 노점들
거의 여섯시 반이 되어서야 옌타이를 출발했다. 지금부터 웨이팡까지 약 250km 정도의 밤길을 달려야 한다. 옌타이를 출발하면서 가이드가 몇 가지 옌타이 얘기를 들려준다. 옌타이는 과일의 도시라고 하는데 특히 사과, 그리고 포도와 체리가 유명하다고 한다. 한 가지 은근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밤이 되면 꼬치 노점이 여기저기 많이 등장하는데 우리나라 사람 열중의
옌타이 시내를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강을 하나 건넌다. 지도를 찾아보니 다이구지아허(大沽夾河)라는 강인 것 같은데 이 일대가 강수량이 적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큰 강이 발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충분히 벼농사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강을 건너자마자 커다란 두산중공업 공장을 지나친다. 토목, 건설 사업이 활발하기 때문에 관련 기계류들의 수요가 많을 것 같다. 돌아오는 날은 인천항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수많은 굴삭기들을 볼 수 있었다. 수출도 하고 이렇게 현지 공장에서 생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기업의 공장>
▶ 초주, 대운하, 신라방
가는 중에 다시 역사스페셜을 시청한다. 영상을 보면서 옛날에 그 먼 거리를 그 열악한 장비로 어떻게 건넜을까? 하는 원초적인 의문이 생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린 은연중에 옛날에는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하지 못해서 원시적인 생활을 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유물이나 유품, 또는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많은 기술들이 오늘날과 견주어도 크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매우 발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항해술만 해도 그렇다. 오늘날의 GPS장치를 놓고 보면 매우 원시적인 장비들이었겠지만 옛날에도 분명히 위치를 계산하고 방향을 잡는 기술들이 발달하고 있었다. 오히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능력만으로 항해를 하는 기술은 지금보다 더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사회적 상황도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인구 통계가 잘 안 잡히고 중앙집권체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오히려 국경을 넘는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을까? 특히 신분적 제약이나 가난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당시의 쓰다오는 여러 민족들이 어울려 살던 국제도시였을 것이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도 썩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과거 문화교류가 아마도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다큐 내용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 중에 옌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책에 대한 소개가 있다. 이 책이 세계 3대 여행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 다큐를 통해 처음 알았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비교가 될 정도로 뛰어난 책이라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이 책 이름을 이 다큐에서 처음 들었다. 돌아가서 꼭 읽어 봐야겠다.
다큐에서는 초주와 대운하 주변, 그리고 장보고의 이름이 비문에 새겨져 있는 신라방 마을 등 장보고와 관련이 깊은 유적들이 나온다. 그런 곳들이 정말 의미가 있는 장소가 아닐까? 가능하다면 다큐에 나오는 곳들을 중심으로 코스를 재조정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술을 판다
<숲 사이로 난 휴게소 식당과 화장실 가는 길>
<휴게소 식당. 퇴근 때가 되었는지 직원 중에 우릴 아는 척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출발하고 두 시간 정도 지난 8:30분 즈음에 휴게소에 들른다. 깜깜한 휴게소에는 밤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많지 않은 차들이 쉬고 있는데 대부분 화물차들이다. 휴게소는 화장실과 식당, 주유소, 그리고 매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휴게소에서 맥주를 판다는 점이다. 하루 만에 술의 고수임을 드러낸 강정구샘이 휴게소에서 술을 사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다. 역시 고수의 눈에는 휴게소에서도 술이 보이는 모양이다. 나도 뒤따라 들어가서 한 세트 여섯 캔의 칭다오맥주와 땅콩 안주를 샀다. 아까 가이드의 경고 때문에 배탈이 걱정되어 안주는 좀 신경이 쓰여서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데 껍질을 까지 않은 땅콩이 눈에 들어온다. 이거라면 괜찮겠지? 합이 62위엔, 대략 12,000원 정도니까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나저나 휴게소에서 맥주를 파는 것은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이 후진적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관대한 것일까?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나오다 보니 주차장 옆 축대 위에 먹고 그냥 버린 컵라면 빈껍데기가 늘비하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文明’과 ‘秩序’를 호소하는 구호들이 붙어 있는 모양이다.
<먹고 그냥 버리고 간 컵라면 껍데기들>
▶ ‘연(鳶)의 도시’ 웨이팡
깜깜한 한밤중에 웨이팡시에 들어섰다. 가이드는 모든 지명을 우리식으로 말하는데 유일하게 웨이팡만 중국식으로 발음을 한다. 아마도 우리말 발음인 ‘유방’이 좀 걸려서 그러는 모양이다. 여선생님들이 많은 우리 사정을 나름 배려한 것이다. 나는 다른 도시도 모두 중국 발음으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웨이팡은 ‘연(鳶)의 도시’라고 한다. 가로등에 나비 모양 장식이 있어서 나비와 관련이 있는 도시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고 나비, 새 등 다양한 모양의 연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한다. 한 때 제나라의 수도였던 곳이기도 하다.
거의 열한시가 다 되어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와 파트너가 된 임헌종샘께 양해를 구하고 문승규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워낙 많은 거리를 이동한지라 둘 다 야간 스케줄을 제안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래도 그 밤에 야간 답사를 결행한 분들도 계셨다는 얘기를 다음날 들었지만 우린 이심전심으로 중국에서의 첫날밤을 그냥 자는 것으로 결정했다. 내일은 6:30분에 식사가 시작되고 7:20분에 승차를 완료해야하므로 시간이 없으니 짐을 싸 가지고 나와서 아침밥을 먹으라는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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