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는 행정구역이 거의 정비되었기 때문에 전기처럼 국가적인 후원 아래 전국적인 측량 사업이나 지도 제작 사업이 추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기 지도를 저본으로 삼아 전국도의 제작은 활발히 추진되었는데, 독자적인 형태보다 전기 지도를 그대로 모사하거나 필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왜란과 호란은 지도발달사의 커다란 전기를 가져와 지도 제작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국방을 위한 관방지도 제작이었다. 즉, 서울주변과 북방지역, 그리고 해안지역의 축성사업과 設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전기와 달리 조선전도 보다는 팔도의 분도와 관방도 등이 주로 제작되었다. 기술적으로는 경위선표(方眼조직)의 도입과 실측방법이 등장하여 비로소 방위와 축척을 바르게 한 지도가 제작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도들은 관찬지도보다는 정상기나 김정호와 같은 가계나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 지도책의 제작이나 휴대용 지도인 수진본 지도의 성행은 그 예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 동안이루어진 관찬지도의 성과를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지도에 나타나기 시작한 두드러진 특징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축척지도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지도에 표시되는 내용이 상세해지고 풍부해졌다. 정상기의 지도와 같은 일부 지도에는 백리척 등 축척이 표시되는 것도 정확한 대축척지도의 제작에 따라 이루어졌다.
둘째, 다양한 지도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다. 일반 지역지도 외에 특수한 목적의 지도나 주제도가 활성화되었다. 이들 지도는 군사적인 측면 외에 행정적인 측면에서 지도가 각 분야의 정리작업에 활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지도가 통치와 행정의 수단과 도구로서 자리잡을 정도로 그 효용성이 일반화되었음을 알려준다.
셋째, 지방 각 군현의 지도 편찬이 급증한다. 군현지도의 증가는 회화식 지도의 발달, 그리고 방안지도의 발달을 수반하였다.
넷째, 지도의 보급이 현저하게 증가하여 일반에도 지도의 소장과 제작이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대량으로 지도를 보급할 수 있는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다섯째, 서양 지도와 서양의 지리지식의 유입과 수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가. 영·정조 시대의 지도
1770년(영조 46)에는 신경준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지도를 제작케 하였다. 이 때 신경준이 제작한 지도는 8권의 <열읍도>와 1권의 <팔도도>, 그리고 족자로 된 <전국도>의 세종류 였으며, 이를 묶어 <동국여지도>라 불렀다. 이는 그 동안에 제작되었던 어떤 관찬지도 보다도 방대한 것으로 이 해에 편찬되었던 『동국문헌비고』와 함께 영조대의 기념비적 문화사업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포항현도>
조선왕조의 중흥기 였던 영·정조 시대를 고비로 하여 국가사업으로서의 대대적인 지도제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들어가서도 물론 특수지역에 대한 지도는 계속적으로 국가사업으로 제작되었다. 서울의 궁궐과 시가지 모습, 평양·전주·강화도궁전 등 주로 궁전과 지방대도회를 중심으로 대형 병풍으로 그린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국방이나 행정을 위해서보다는 왕권 혹은 세도정권의 위엄과 도시적 번영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지도라기보다는 풍경화의 성격이 더 짙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다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금 국가 차원의 지도 제작이 이루어지는 것은 대원집정기인 1871년에 이르러서였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의 충격은 대원군의 척화노선을 부추겼고, 이에 따라 국방 강화를 위한 전국적인 읍지와 읍지도의 제작이 이루어 졌다.
나. 대원군 집정기의 그림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제작된 지 10여년 후인 1872년 대원군은 전국의 각 고을에 지도를 그려 바치도록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459장이나 되는 전국 군현지도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18세기 이후 진경산수화의 유행과 관련하여 활발해지기 시작한 繪畵式지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지도는 색이나 표현법, 내용이 지방마다 각기 달라 각 고을의 개성과 지표인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지도는 문헌으로 전할 수 없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5일장을 표시되어 있어 자본주의적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던 사회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데, 숙박시설이나 주점 등을 통하여 당시의 시장발달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직단 주변에 구천을 헤메는 귀신들을 모시는 '여단'이나 '서낭당'이 표현된 것은 성리학적 질서가 확립되었던 조선 전기에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제작 당시에는 이러한 무속신앙을 국가차원으로 끌어들여 통치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연산 개태사의 커다란 가마솥이 하천변으로 떠내려갔음을 표현하여 1870년 경 이 지역에 대홍수가 일어나 많은 피해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대흥군 태봉산에는 태항아리를 그려놓아 이 산이 역대 왕실의 태를 묻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태안 지도에는 굴포운하의 흔적을 점선으로 표시하여 운하의 위치와 이를 완성하기 위한 노력들을 짐작할수 있다. 조선시대에 몇번의 시행과 실패를 반복했던 사창제도가 대원군에 의해 다시 실시되었다는 사실도 지도에 사창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으며 해남, 진도, 순천지도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어서 1872년까지 거북선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그림지도는 도면식 지도와는 달리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표현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남원지도 중 동림 부분>
그림지도의 읍성 위치나 읍성내 건물 배치는 당시 지배층의 對民의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읍성은 주민편의를 위해 각마을과의 거리가 고려돼 위치가 정해졌다. 즉, 대부분 3,40리 거리에 마을이 있고, 하루만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일일생활권내에 읍성이 있었다. 위치뿐 아니라 읍성내 건물배치도 주민편의에 따라 배치됐는데 그같은 사실은 관아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진 천안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쪽에 객사, 동헌이 위치하고 주민들 드나들기 쉬운 남쪽, 바깥쪽으로 주민 행정담당하는 행정청들이 위치했다. 남원 지도에는 이러한 사실이 더욱 잘 표현되어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 이용하기 편한 곳인 남문 가까이에 보민청과 연호청이 위치하고 있는데, 보민청은 지방민들을 구제하는 기관이었으며 연호청은 부역을 담당, 관리하던 기관이었다. 그뒤에 작청이 있는데, 작청은 향리근무처로 백성들이 많이 들락날락하는 곳이었으며 유지, 선비들의 자문기관인 향청도 북문 가까이에 설치하였다. 이를 통하여 당시의 권위적인 봉건왕조하에서도 읍성의 위치와 건물 배치를 주민편의 위주로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도를 통해 조선의 읍성이 약130년전 이미 계획된 도시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는 특히 해안 지역을 상세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두 번에 걸친 양요를 겪으면서 대원군이 척화노선을 강화했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戰船, 망루, 수심 등이 자세히 표현되었음은 물론, 이양선이 지나간 자리나 해로를 점선으로 표시하여 남연군 묘의 도굴 등 서양인의 침략에 대한 대원군의 반응이 잘 드러나고 있다.
19세기 이후의 전국적 지도제작 사업은 대원군 집정기의 전국지도를 마지막으로 하지만, 그 후 광무년간에 편찬한 읍지에도 채색지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크기도 작고 수준 면에서 오히려 위 지도보다 한 단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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