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기와 함께 조선 후기의 2대 공로자로 꼽히는 사람은 김정호이다. 김정호는『大東地志』,『東輿圖誌』,『輿圖備志』등의 3대 地誌書를 저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의 뛰어난 지도를 제작하였다.
① <靑丘圖>
<청구도>는 필사본으로 축척이 대동여지도와 같은 1/16만 정도이므로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크기가 7m에 달할 만큼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 남북 100리, 동서 70리의 방안을 책의 1면으로 하는 지도첩을 만들었다. 지표면을 일정한 크기로 나누어 지도를 만드는 방법은 현대식 대축척 지형도와 같은 방법이며, 배수의 지도제작 6원칙을 충실히 이행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평환법, 유클리드의 기하원리 등을 과학적으로 활용하였다.
가. <청구도>의 제작원리
<청구도>의 제작원리는 최한기가 쓴『靑丘圖題』와 김정호가 쓴 범례, 지도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다.
첫째, 방안을 그어 제도하되 전국을 같은 비례로 제도함으로서 축척 비례가 정연하고 주현의 分合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재래 지도는 종이의 크고 작음에 맞추어 334개 주현을 똑같이 그렸기 때문에 작은 고을은 넓어지고 큰 고을은 도리어 축소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주현도를 일일이 맞추어 전도를 만들려면 늘 맞지 않고 문란함이 많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방안을 긋고 지도를 그려 나갈 때 큰 고을은 축척의 비례가 10리를 1치로 나타냈다면 작은 고을에서는 5리를 1치로 나타내어 그 비례가 같지 않아 혼잡을 가져 왔었다.
둘째, 정조 15년(1791)에 천문 관측한 결과를 가지고 지형·위치·방위 등을 바로잡았다. 숙종 39년(1713)에 청나라 何國柱 일행이 와서 한성부 종가에서 북극 고도를 실측하였다. 이렇게 실측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정조15년에 <여지도>에 입각하여 8도의 경위도를 量定시켰다. 이와 같이 8도의 경위도가 확실해지자 비로소 8도의 分幅과 전국 州의 分俵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졌고 실제의 크기와 큰 착오 없이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원칙에 입각하여 그린 지도 중 정철조·황엽·윤영의 여지도가 특히 우수하였는데 김정호는 이들을 참고하여 <청구도>를 만들었다.
셋째, 방안선을 그을 때 가로 70리, 세로 100리로 나누어 분율을 고려하였고 지도식에서 준망이라고 할 수 있는 동서남북 4방위 대신에 12간지의 12방위법을 써서 방위를 바르게 하였다. 이러한 준망의 적용으로 『동국여지승람』,『동국문헌비고』등의 지리서에 잘못되어 있는 지명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넷째, 거리의 均正을 위하여 일정한 지점(특히 한양과 각 주현 읍치를 중심 삼음)을 중심으로 원을 10리마다 둘러 그려서 道里를 바르게 하였다. 이를 平環法이라고 하였다.
다섯째, 幾何原本을 참고하여 서양의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확대·축소의 정확성을 기하였다.
나. <청구도>의 성격
첫째, 建置연혁을 비롯하여 古蹟에 이르기까지 38개 항목에 대해서 표기하고 있다. 그 중 약 1/3을 註記하고 있다. 이처럼 주기가 많은 것은 지도표가 개발되지 않았고 종래의 '지도는 지리지의 附圖'라는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전국도로서 현존하는 지도 중 가장 크며 축척이 약 1:216,000에 해당되는 지도로서 전국도로서는 당시에 가장 정밀한 지도이며 이전까지의 어떤 지도보다도 제작방법이 과학적이다.
셋째, 군현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특히 飛地와 斗入地를 표시하여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으므로 매우 실용적이며 便覽하기에 좋도록 冊帖으로 만들어져 있다.
넷째, 圖式을 전통적 방식으로 택하였고 방위는 12방위를 써서 정확하지만 地點표현이 보다 불분명하다. 다섯째, 水系만을 정확히 표현하고 산맥을 표시하지 않고 鎭山을 중심으로 표시함으로써 두 지점 간의 거리가 실제보다 늘어나 산악이 많은 동쪽이 넓게 그려졌다.
② <大東輿地圖>
김정호의 3대 지도중 <東輿圖>는 <大東輿地圖>를 판각하기 위해 제작한 선행지도로서 <大東輿地圖>와 같이 23糾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나라 고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지도이다. <大東輿地圖>가 목각의 어려움 때문에 생략한 3,800여개의 坊里名을 비롯하여 중요도가 2,3차 적인 내용인 5,548개의 註記名이 <동여도>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는 거의 <大東輿地圖>와 일치하므로 본고에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대동여지전도>
가. <大東輿地圖>의 특징
<청구도>가 완성된지 27년 후인 1861년에 <대동여지도>가 제작되었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지만 목판본의 分帖折疊式이므로 청구도와는 매우 다른 양식의 지도이다.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와 같이 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方眼으로 하여 한 개 面으로 하고, 2개 面은 한 개 圖葉인 목판 한 장에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대동여지도>의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이고 製冊되었을 때의 면수는 213면이다. 그러나 여기에 부록격인 地圖類說·都城圖·京兆五部圖등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도엽으로 126목판본이고 전체 면수는 227면으로 구성되었다.
<대동여지도>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목판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필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막을 수 있으며 대량 생산의 길을 터놓았다. 둘째, 지도표를 사용하여 지도의 주기 내용을 간결화하고 고지도를 근대화시켰다. 셋째, 분합이 자류롭게 22첩으로 만들어 상하를 연결하면 도별지도도 되고 전부 연결하면 전국도가 되도록 제작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하였으며, 접으면 책 크기만하여 휴대하고 다니기에 편하도록 제작하였다. 넷째, 전통적인 고지도 제작 양식인 배수의 6체를 사용하고 방안도법을 이용하였으며, 확대·축소할 때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미하여 고지도의 정확성을 기하였다. 다섯째, 각 군현간의 직선도로에 10리마다 눈금을 찍어 놓아 실질적인 축척을 도면에 표시하고 있으며, 산계와 수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산맥을 선으로 표시함에 있어 선의 넓이와 형태로 산맥과 산의 모양과 크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범례와 군현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 목판본>
나.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3대 지지를 편찬하였지만 자기의 생애나 사상을 나타내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地圖類說』등은 김정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나름대로 인용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동여도지』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자서문이 있어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개 여지학에는 지도와 지지가 있는 것은 오래 되었다. 지도는 職方씨가 있고 지지는 漢書가 있다.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 역대의 제작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圖籍이 없는데 삼국사기나 고려사부터 지지가 실리게 된다. 신라 통합 이전에는 군현이 설치된 경우 이름은 있으나 가리키는 곳이 없으며, 강역의 진퇴도 역시 기록은 있으나 준거할 만한것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역사가라 하더라도 확실하게 가려 낼 수가 없다. 다만 중국이나 우리 나라 여러 역사책에 실려 있는 사실을 근거로 혹은 옳다고 하나 잘못됨이 없지 않아 후에 논변자들이 갖다 맞추나 확실히 질정할 수가 없다.
이를 통하여 김정호의 역사지리 인식을 살펴보면 첫째, 김정호는 圖와 志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圖와 志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爲國 곧 治國의 大經이라고 하여 圖와 志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둘째, 김정호가 圖와 志를 제작한 것은 치국경제에 유용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동여도지』에서 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사원 등 42개 편목을 상술하거나 표기하여 도와 지가 서로 體用하여 나라의 다스리는 道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소원을 표명하고 있다. 김정호는 이외에도 <대동여지도>의 1/92만 축소판인 <대동여지전도>와 상징적인 서울전도로 알려진 <首善圖>를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지도학의 발달에 미친 그의 영향력과 공헌이 지대함이 분명하지만 그동안 김정호의 활약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김정호의 활약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정부관리를 통해 관찬지지 및 지도를 입수하여 새롭게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학계가 지나치게 김정호에 관심을 둔 나머지 조선후기 지도발달사의 연속성을 소홀하게 취급한 것은 반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는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 즉 지도를 필요로 하였던 당시 사회의 구조를 파악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게 되었던 배경을 이해하는 일이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상인 등 일반인들이 지도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요구는 국가 주도의 지도제작 관행을 벗어나 민간차원의 지도제작을 활성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호의 지도는 목판본으로서 대량제작의 길을 열어 대중적 수요에 부응하여민간에 널리 유포시켰다는 데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이는 국방, 행정용 지도가 상업용지도로 전환하는 중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둘째는 이러한 정확한 지도의 요청이 어떠한 방식으로 당시 사회에서 실행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김정호의 지도 제작은 지도의 과학화와 현대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기호를 도입하여 현대화에 공헌을 한 점이 인정된다. 그러나 <대동여지도>가 제작되기 이전에 어떠한 지도 제작의 전통이 있었으며 <대동여지도>는 전통적인 지도와 어떠한 맥락에서 탄생하였는지를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새로운 과학기술의 개발과 수용은 이러한 요구와 어떠한 관련을 맺었는가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로 <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의 발달 속에서 탄생되었던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김정호가 지도 외에 지리지의 편찬에도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지도의 편찬이 단순히 국토의 윤곽을 그리는 작업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국지리지를 편찬하기 위해 전국 각 군현에 관한 자연적·사회적·문화적인 자료들을 섭력하였으며, 그것은 정확한 전국 지도 편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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