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위치&지도

조선시대 전기의 지도

Geotopia 2013. 3. 17. 22:18

  지도 제작과 관련된 측지술은 일찍이 2세기에 중국의 張衡에 의해 창안된 方格法(바둑판 눈금 방법)을 거쳐 3세기 후반에는 裵秀라는 학자가 나와 6體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한층 과학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6體란 分率(축척), 準望(평행선의 모눈), 道里(길이), 高下(고저측정), 方邪(직각과 예각), 그리고 迂直(곡선과 직선측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려인들이 한반도의 모습을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러한 6체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까지 축적된 지도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조선시대는 유례없는 지도제작의 융성기로서 과학과 실측에 의한 관찬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했던 때였다.

  

  가. <八道地圖>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 다음 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하였다. 1402년(태종2년)에 제작된 <전국지도>는 건국 후 10여년 간의 행정구역 개편 결과를 담은 지도이다. 이 지도-李회의 <팔도지도>-는 직접 전하는 것은 없으나 그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우리나라 부분을 통하여 그 특징을 알아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現傳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로서 우리나라 해안선의 모양이 거의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팔도지도>

 

 

 그러나 고려시대 <오도양계도>를 기초로 하였으므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로나 국경부분이 부정확하다. 특징은 우선 전국의 주현을 표기하고 있고 수군만호가 설치된 국방의 중요지점만을 수록하고 있으며 삼각산·금강산·태진 등 국가에서 中祀, 小祀를 드리는 명산대천만을 골라 표기하고 있다. 이는 이 지도의 제작 목적을 드러낸 것으로 통치, 군사적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맥과 하계망이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개별 산보다는 산맥을 강조하여 일찍부터 이러한 지리인식이 우리나라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 세종·문종 代의 지도

 

  세종 때부터는 고려시대 지도를 재편집하던 한계를 넘어, 보다 정확한 실측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여진과 왜구를 몰아내고 영역을 확정하였으며 지속적인 토지측량 사업의 성과가 축적됨에 따라 지리지와 함께 지도가 제작되었다. 1434년(세종16)에는 전국의 지방 수령에게 각 고을의 지도를 그려 올리도록 함으로써 그간에 있었던 전국지도의 잘못된 점을 고치고자 하였다. 1436(세종18)년에는 북방 지역인 함길도와 평안도에 대해서 정척에게 相地官과 畵工을 데리고 가서 산천형세를 자세히 살펴서 그려오도록 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북쪽 변방 지역의 경계가 명확해졌으며 군현도의 오류가 많이 바로잡혔다. 세종 때 제작된 전국의 군현지도는 지금 남아있지 않으나 북방지도와 마찬가지로 수령 주도하에 상지관과 화공의 협력을 얻어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실측지도인 만큼 고려 시대 지도보다는 한층 정밀한 지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文宗代에는 중국에서의 達達族의 동향과 관련하여 국방에 대한 관심이 비상히 높아져서 북방지역에 대한 한층 정밀한 국방지도의 필요성이 높아져서 동서남북의 4방위법을 12방위법으로 바꾸어 방위 표시를 한층 정밀하게 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위해 泛鐵(나침반)을 사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내의 명산과 대천, 大嶺, 古關防, 고읍 등까지도 상세히 그리도록 하였다.

  

  다. 鄭陟, 梁誠之의 <東國地圖>

 

  세조는 조선초기에 지도제작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 대표적인 임금이었다. 문종 때에 높아지기 시작한 국방에 대한 관심은 세조 때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요새지 중심의 방위체제를 탈피하여 이른바 진관체제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국적 방위체제를 구축하였으며, 고구려 故土 수복을 내걸고 만주로 진출하려는 팽창노선을 추구하였다. 1463년(세조 9년)에 완성된 <동국지도>는 이러한 관심의 결실로서 鄭陟(북부지방 양계도)과 梁誠之(下三道지도)가 제작, 편찬을 맡아 이후 정상기의 <동국대지도>가 완성될 때까지 조선시대 지도의 표준이 되었다. <동국지도>의 제작에는 조선초기에 발달한 과학기술이 반영되어, 동서간의 비율이나 해안선의 정확한 표현등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 경, 위도를 측정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조선방역도>

 

  정척, 양성지의 <동국지도>는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특징을 알 수는 없으나 조선 중기까지 관찬 지도의 基圖로 활용되었으므로 이를 基圖로 작성된 지도를 통하여 그 특징을 알아 볼 수 있다. <동국지도>를 基圖로 하여 제작된 지도로는 <조선 방역도>가 대표적이다. 1557년(명종12년)경에 제용감에서 전국의 공물진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지도로 現傳하는 것 중 가장 정확한 지도이며 유일한 원본지도이다. 지도의 내용과 특징은 8도 주현을 파악하는 것이 첫째이고 다음으로는 우리나라 전역의 산천형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둘째 목적이었다. 전기의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산계와 수계가 정확히 파악된 것은 조선전기의 일반적인 지형 인식체계를 반영한 것이다. 이회의 <팔도지도>나 동람도가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던 두만강 유역의 북방 경계 지역이 현재에 가깝게 표현되었고 만주와 대마도가 표기되어 있으나 울릉도와 독도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조선방역도>는 우리나라의 영토가 만주를 포함하는 '만리'라는 인식이 조선초기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6세기에 유행했던 契會圖 형식으로 제작되어 16세기 회화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방역도>

 

  <조선방역도>와 비슷한 성격의 지도로 <華東고지도>가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합성시킨 이 지도는 <조선방역도>와 마찬가지로 8도 군현의 이름이 5방색으로 칠해져 있고, 백두대간이 뚜렷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지도 역시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조선전기의 지도 제작 수준을 보여준다.

  

  라. <東覽圖>

 

  성종조에 이르면 세종 이래의 관찬지지 편찬사업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다. 여기에는 <팔도총도>와 <도별도>가 첨부되었는데 이 지도들은 간행된 우리나라 전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東覽圖>라고도 불리운다. 지도의 정확성으로 보면 앞의 <동국지도>에 비해 해안선의 윤곽이나 남북-동서간의 비율차 등에서 정확도가 떨어지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양성지가 참여했던 것으로 보아 제작기술이나 정보의 부족에 의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木板의 규격에 맞도록 의도적으로 왜곡을 시켰으며, <동람도>는 山神祀와 관련되어 제작된 지도여서 일반지도와는 그 목적이 다른데 기인한다. 또한, 당시에는 지도를 국가적인 기밀로 다루었으므로 인쇄되어 널리 알려질 지도를 상세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확성에도 불구하고 <東覽圖>는 조선후기의 대부분의 우리나라 전도가 이에 따르고 있을 만큼 그 영향력이 컷다. 

 

 

<동람도>

 

   <동람도>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이 지도는 山川祀典祭에 의한 中祀處와 小祀處를 표기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므로 <팔도총도>에 기재된 내용은 이러한 제사처를 제외하고 표기된 곳이 없고 단지 백두산만 예외적이다. 이는 풍수적인 측면에서 백두산을 우리나라의 祖山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백두산이 반드시 그려져 있다.

  둘째, <동람도>는 위치가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예를들면, 제주도가 순천 밑에 판각되어 있다거나 우산도(독도)가 울릉도의 안쪽으로 표기되어 있다거나 두만강이 압록강보다 위도상으로 낮게 표기되어 있는 점 등이다. 이는 판의 크기에 지도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셋째, <동람도>에는 대마도가 명기되어 있는데 이는 대마도에 대한 영토의식의 발로이다.

이외에도 바다를 파도무늬로 판각한 조선전기 고지도의 독특한 표현양식을 반영하고 있고 前述한 것처럼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 등도 <동람도>의 특징이다.

  

  마. 조선전기의 세계지도 -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조선 전기는 본국지도 제작과 함께 세계지도의 제작도 매우 왕성했던 시기였다. 이때에는 두 갈래의 세계지도가 제작되었다. 하나는 세계의 지리에 관한 자료를 과학적으로 수집하여 편집한 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중화관에 입각하여 상상적인 세계관을 표현한 중국 중심의 추상적인 세계지도이다. 전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며 후자로는 '원형세계지도'가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태종 2년에 이회가 중심이 되어 제작한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중국에서 들여온 세계지도인 李澤民의 <聲敎廣被圖>와 역대제왕(國都)의 연혁을 나타낸 淸濬의 <混一疆理圖>를 합친 지도이다. 여기에 이회 자신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추가하여 하나의 지도를 완성하였다. 원본이 전하지 않으나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같은 계열의 지도인 <大明國地圖>를 통해서 그 특징을 살펴보면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채색방법과 지명에서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세계를 바다로 둘러싸인 큰 섬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역시 조선 전기에 제작된 세계지도인데 체제와 내용에 있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유사하다.

  당시의 세계지도는 중국에서 제작된 지도를 세계지도의 원도로 삼았으므로 여전히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그러나 중국중심의 세계관에서 우리나라가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세계지도를 제작함으로써 국가적인 권위와 왕권의 확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Introduction to Geography People, Places & Environment(2014, 6-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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