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위치&지도

고지도에 나타난 지리인식

Geotopia 2013. 3. 8. 15:39

① 疆域에 관한 인식

 

   우리나라의 고지도에 표현된 彊域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現傳하는 지도를 고찰해야만 하는데 조선 전기 이전에 제작된 지도는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조선 이후의 지도만을 대상으로 할 수 밖에 없다. 明宗代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방역도>는 정척, 양성지의 <동국지도>를 基圖로 하여 제작한 지도이므로 조선 전기까지의 강역에 관한 인식을 알아볼 수 있는 지도이다.

   <조선방역도>에는 만주지역과 대마도가 표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마도는 조선 전기까지 우리의 영토라는 의식이 있었다. 단지 바다 멀리 떨어져 있어 관리가 어려우므로 空島策을 써서 비워 두었는데 왜구들이 강점하였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대마도가 예외없이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만주지역까지 포함하여 그린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 하나는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아 북방에 대한 지식이 불확실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 다른 이유는 만주가 고구려의 구토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토라는 영토 의식이 강하게 표출된 것이라도 볼 수 있다. 당시 지리학의 제일인자였던 양성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의 국경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나라를 '萬里의 나라'라고 하였는데 <조선방역도>에는 이러한 그의 영토관과 유사한 정신이 반영되어있다. 노사신이 쓴 『동국여지승람』箋文에서도 '우리의 국토가 만리'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또 서거정도 『동국여지승람』서문에서'고려는 서북지방은 압록강을 못 넘었지만 동북지방은 先春嶺을 경계로 해서 고구려 지역을 더 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에는 우리 나라의 영토가 만주까지 포함하는 만리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음을 <조선방역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방역도>

 

 

   제주도는 우리땅인 만큼 당연하지만, 우리 땅이 아닌 대마도를 지도에 그려넣었다는 것은 대마도가 적어도 지리적 관념으로는 국토의 한 다리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전도를 그리는 경우 만주지역을 포함시키는 것은 15세기의 적극적인 故土 수복정책과 만리국가 의식이 지도에 반영된 결과이다.

  

② 풍수지리적 인식    ☞ 클릭! 풍수지리 사상 

 

  풍수사상은 신라말기에 전래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지도에도 이러한 인식이 표현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지도 가운데에는 現傳하는 지도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특징을 알 수는 없으나 1396년(태조5) 李詹이 쓴 『三國圖後序』에 고려지도를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 있어서 이를 통해 고려시대 전국도의 모습을 추적할 수가 있다.

 

   삼국을 통합한 뒤에 비로소 高麗圖가 생겼으나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산맥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철령에 이르러 별안간 솟아오르며 楓岳이 되었고, 거기서 중중첩첩하여 대백산, 소백산, 죽령이 되었다. 中臺는 雪峰으로 뻗쳤는데 지리와 지축이 여기에 와서는 다시 바다를 지나 남쪽으로 가지 않고 청숙한 기운이 서려 뭉쳤기 때문에 산이 지극히 높아서 다른 산은 이만큼 크지 못하게된 것이다. 그 등의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薩水, 浿江, 碧瀾, 熊津인데 모두 서해로 들어가고, 그 등마루 동쪽으로 흐르는 물 중에서 伽倻津만이 남쪽으로 흘러갈 뿐이다. 원기가 화하여 뭉치고, 산이 끝나면 물이 앞을 둘렀으니…

 

   이 글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리 나라 산맥의 흐름이 백두산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언급한 대목과 원기가 和하여 뭉쳤다는 표현이다. 우리 나라 지리를 이해할 때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대간을 산맥의 대종으로 인식하고, 거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하여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하고자 하는 지도 제작 태도는 한국고지도의 특성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미 고려시대 지도에서 이러한 특성이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몽주가 쓴 『여진지도』에도 '雪立白山南走遠(눈 덮인 백두산이 남쪽으로 뻗었다)'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은 풍수도참사상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지도에는 풍수적 지리인식이 많이 드러나 있다. 우선 지도제작 과정에 반드시 相地官을 대동하였음이 여러 기록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 즉, 조선 초기부터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상지관, 거리를 측량하는 算士, 地誌 전문가인 官吏, 그리고 지도를 직접 채색하여 그려내는 畵員(지방의 경우는 畵師軍官)으로 구성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전형적인 형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풍수적 지리인식이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첨이 묘사하고 있는 고려 지도의 풍수지리적 특성은 이회 지도의 우리나라 전도 부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중국 지도부분이 강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지도는 산맥과 강을 함께 강조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조선방역도>는 팔도의 주현을 5方色으로 채색하였다. 5방색은 우리나라 지도의 고유한 특징인 풍수지리 사상을 담은 것이다.

   <대동여지도>역시 산계와 수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동여지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일반적인 지도에서는 산지 하나 하나에 대해 표현하고 있으나 <대동여지도>에서는 산맥, 더 정확히 말하면 분수계와 하계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대동여지도>에서는 산지가 아니더라도 하천의 분수계가 되면 그것을 산계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산지와 산지가 떨어져 있더라도 그 중간을 연결하는 분수령이 있으면 이 2개의 산지는 산줄기로 연결시켰다. <대동여지도>를 축소하여 우리나라 전도를 만든 <대동여지전도>에서도 이러한 산계와 수계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지도에서는 산맥과 수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러한 특징은 오랫동안 우리민족의 자연관에 자리잡고 있는 풍수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③공간인식

 

  고지도, 특히 그림지도에는 건물을 비롯한 인문적 사실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공간인식을 알아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얼굴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동람도>에는 山川祀典祭에 의한 中祀處와 小祀處 외에는 표기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앞에서 살펴본 것 처럼 이것은 印本으로 널리 알려질 책이었으므로 機密에 해당하는 지도를 자세히 그리지 않았던 의도적인 측면도 있겠으나 당시의 공간인식의 일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고려시대 이래로 지속되어온 山川神에 대한 제사문제는 1413년(태종13년)에 정비되었다. 사직, 종묘 등은 大祀를 드렸다. 선농단과 문선왕 등은 中祀를 드렸고 風師神과 雲師神과 함께 주현의 성황신도 중사를 드리도록 승격시켰다. 산천사전제가 확립된 것은 1414(태종14년) 8월로, 당나라의 『禮樂志』와 『문헌통고』등을 참고하여 비로소 제사 등급을 나누어 확정하였다.

 

<읍지도-광주>

 

   海嶽瀆神은 중사, 山川神은 小祀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경성의 삼각산신과 한강신, 경기도의 송악산신과덕진신, 충청도의 웅진신, 경상도의 가야진신, 전라도의 지리산신과 남해신, 강원도의 동해신, 풍해도의 서해신, 영길도의 비백산신, 평안도의 압록강신과 평양강신 등 13개소의 해악독신은 중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경성의 목멱산신, 경기도의 오관산신과 감악산신, 양진신, 충청도의 계룡산신과 죽령산신, 양진명소신, 경상도의 우불산신과 주흘산신, 전라도의 전주 성황신과 금성산신, 강원도의 치악산신, 의관령신, 덕진명소신, 풍해도의 우이산신, 장산곶신, 아사진신, 송곶신, 영길도의 영흥성황신과 함흥성황신, 비류수신, 평안도의 청천강신, 구진익수신 등 23개소의 산림천택신은 小祀를 드리게 되었다. 이러한 中祀와 小祀는 해당 소재관이 行祭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 경기도의 용호산과 화악산, 경상도의 진주성황, 영길도의 현덕진, 백두산 등은 국가에서 지정하는 제사처는 아니지만 소재관이 自行토록 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 치제하던 영안성, 정주목감, 구룡산, 인달암 등은 모두 제사를 폐지하였다. 또 개성의 大井과 牛峯의 朴淵은 이미 명산대천에서 제외되었지만 화악산의 예에 따라 소재관이 자행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 확립된 산천사전제가 상당기간 계속된 듯 하며 <동람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표기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동람도>에는 당시에 제사처로서 중시했던 名山大川들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군현도에는 읍성이 중심적 위치로 설정되어 있으며 대부분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그 지역의 상징이 될 만한 것도 역시 크게 그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72년에 제작된 남원 그림지도에는 광한루, 오작교가 매우 크게 그려져 있다. 광한루와 오작교는 춘향의 정절과 함께 남원의 상징으로 당시 사람들도 이곳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역시 광한루 옆에 울창한 숲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 東林이라 불리우는 이 숲은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조차 없는 숲이지만 남원의 氣를 보충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풍수지리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조성된 것으로서 당시의 남원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징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지도에는 이와같이 사람들이 공간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던 바를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과장과 부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제작 당시의 인문적 특징을 유추하는데도 매우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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