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위치&지도

관찬(官撰) 지도

Geotopia 2013. 3. 9. 12:51

  인간은 예부터 자기가 알고 있는, 그리고 자기가 가 보지 못한 먼 나라와 지역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자기 주변에 대해 이미 알고있는 지리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지역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가상의 지도를 통해서나마 표현하고자 하였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이미 기원전 2400년경에 점토판 위에 지적도와 각종 경계도를 그려 놓은 지도가 제작되어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삼국시대 이래로 세계지도(천하도), 동아시아지도, 전국도, 도별도, 군현도(읍지도), 관방지도 등의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종류의 지도가 제작되었지만 제작의 주체로 볼 때 종류에 관계없이 관찬지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중엽 鄭尙驥의 지도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제작된 이후에도 그 성과를 흡수한 관찬지도가 여러 차례 제작되어, 18세기 말까지는 지도제작의 주도권을 국가가 쥐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이전까지 제작된 지도의 역사는 관찬지도의 역사라 해도 큰 무리가 없다.

   

   ① 관찬지도 제작의 배경

 

  가. 방어와 군사정보 수집

 

  어느 나라든지 지도는 국가 기밀로서 대외유출을 금지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부득이 대량으로 인쇄되어 유출될 수 밖에 없는 印本에 들어있는 지도가 매우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들어있는 <동람도>가 간단하고 자세하지 못한 것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사실은 관찬지도의 주요 제작 목적이 국방에 있었음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국가간에 보다 상세한 지도를 얻기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여 외교사신의 주요임무 중에는 지도의 입수가 큰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거나 사신이 희생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熙寧年間(1068∼1077)에 고려에서 공물을 가지고 사신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도중에 통과한 주나 현의 도시에서 지방도를 청구했으며, 그때마다 제작된 지도를 얻었다. 산악·하천·도로·급경사면·隘路 등 어느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들은 양주땅에 도착하자 전과 다름없이 지도를 요청했는데, 당시 지사였던 陳秀는 책략을 썼다. 그는 사절등에게 이때까지 제공받았던 兩浙지방의 지도를 모두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것들을 흉내내어 원하는 지도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도를 손에 넣게 되자 전부 태워버린 뒤 황제에게 이 사건을 보고 했다.

 

   이 글은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전하는 송나라 沈括이 쓴『夢溪筆談』에 들어있는 일화이다. 당시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지도 입수를 둘러싼 첩보전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 숙종32년(1706)에 李命이 제작하여 왕에게 올린 <遼 關防圖>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仙克謹(明末人)의 <籌勝必覽> 속에 들어있는 <요계관방도>와 淸人이 그린 <山東海防地圖>를 데리고 간 畵師로 하여금 移寫케 하고, 여기에다 우리나라 지도를 합하여 만든 편집지도이다. 원본이 작고 이를 급히 이사한 까닭에 그림이 정밀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변사가 다시 10폭 병풍으로 확대하여 정확하게 제작한 것이다. 반대로 1713(숙종39)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우리나라 지도를 보여달라고 하였으나 비변사 지도는 너무 자세하여 보여주지 않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러한 사실 역시 당시의 關防에 대한 관심의 정도와 지도를 정보 수집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고려지도를 재편집하던 한계를 벗어나 보다 정확한 실측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 세종 때부터 였다. 북으로 여진족을 구축하여 4군과 6진을 개척하고, 남으로 왜구를 토벌하여 연안지역을 확보하므로써 疆域을 정확히 표현하고 국방을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문종 代에는 중국에서의 達達族의동향과 관련하여 국방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이때에는 『東國兵鑑』이라는 우리나라 전쟁사가 편찬되기도 하였으며 북방지역에 대한 한층 정밀한 關防지도의 필요성이 높아져서 동서남북의 4방위법을 12방위법으로 바꾸어 방위 표시를 한층 정밀하게 하도록 하였다. 문종 때에 높아지기 시작한 국방에 대한 관심은 세조 때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요새지 중심의 방위체제를 탈피하여 이른바 진관체제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국적 방위체제를 구축하였으며, 고구려 故土收復을 내걸고 만주로 진출하려는 팽창노선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지도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양성지의 주도로 이루어진 <동국지도>의 제작이다.

   조선후기 지도 제작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둔 것도 역시 국방을 위한 關防지도의 제작이었다. 관방지도는 무엇보다도 정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방지도 제작사업은 조선전기 지도 제작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북방지역 파악의 미숙성을 시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光海君代에는 여진족이 후금을 건설하는 사태와 관련하여 북방경비 문제가 조정의 큰 관심사로 대두하고, 서북지방의 방위가 대폭 강화되었다. 또한 유사시의 피난지로서 안동과 강화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1610년(광해군2) 張晩은 여진인 거주지역의 <산천지리도>를, 1618년(광해군10) 의주부윤은 압록강 유역의 理山·碧潼·昌州 등지의 도형을 각각 올려보냈다. 같은 해 개성의 昌陵古城을 그곳 耆老軍民이 그려 바치고, 안동과 강화도에는 관원을 파견하여 상세한 지도를 그려 바치도록 명하였다. 특히 강화지도 제작을 명하면서 고려시대 궁궐터와 칸수를 조사하도록 명한 것은 이곳에 피난 行宮을 건설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듯 하다.

숙종대에는 <울릉도 지도>와 <江華一島地形圖> 등이 작성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강화도 지도는 다섯 번에 걸쳐 작성되었다. 이는 강화도가 서울의 외곽 방어 요새지일 뿐 아니라 간척사업의 호적지로서 숙종대의 대규모 간척사업과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또 이 곳이 서울 및 개성과 연결된 상업중심지라는 점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강화부도>

 

   英祖代에 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備邊司지도 역시 기본적으로 관방에 관련된 내용과 도로, 도서 등의 파악에 중점을 두었던 군사적인 성격의 지도였다. 특히 도로를 대로·중로·소로로 나누어 색을 달리하여구별한 것은 이 지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으로서 도로를 중시하였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건물이나 군사 시설 등의 표현에 상당한 정도의 기호화가 진전되었던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高宗代에 작성된 그림지도에도 방어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실려있다. 대표적인 전략 요충이었던 강화도 지도에는 구체적인 수비체제가 그려져 있으며 읍치 안에 포량창과 해안가 포대, 발사대의 숫자까지도 기록해 놨다.

  

   나. 군진의 설치와 築城

 

  조선 전기에는 제도가 정비되면서 전국의 방어체제도 정비되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전국의 道 중에서 거진을 설치할 만한 곳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도가 바탕이 되었다. 좁은 지역을 상세히 그리는 지도는 성곽을 축조하거나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특정한 목적 아래 만들어 졌던 지도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다. 전기에는 주로 세조, 成宗代에 이러한 논의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중기 이후로는 정묘(1627), 병자(1636) 호란의 충격을 겪으면서 서울 주변과 북방지역, 그리고 해안지역의 축성사업과 設鎭이 꾸준히 지속되면서 이 지역들에 대한 지도제작이 필수적으로 뒤따랐다. 仁祖代에는 북방 지역의 축성 사업과 남한산성 및 강화도에 대한 방비가 더욱 강화되었다. 호위청, 총융청, 수어청의 三營이 설치된 것도 이때이다. 축성 사업과 관련하여 많은 관방지도가 작성되었다. 1624년(인조2)에는 남한산성과 평양성이 잇달아 수축되었는데, 특히 평양성 축성 때에는 비변사 소장이 <평양지도>를 참고하였다. 정묘호란 이후에는 <兩西관방도>(1627년·인조5), 서울 근교의 산성도(인조6), <강화도지도>(인조16), <금오산성도>(인조17) 등의 관방지도가 잇달아 제작되었다.

 

<해주 수양산성도>

 

  孝宗, 顯宗, 肅宗代는 북벌론이 무성했던 시대로서 북방을 비롯한 전국 요새지의 축성사업이 활기를 띠는 것과 함께 관방지도의 제작이 뒤따랐다. 孝宗代의 북벌론과 이에 따른 축성사업및 관방지도의 제작은 북벌을 실제적으로 준비하는 의미 외에도 왕권 강화의 의미도 컷 것으로 보인다.

  

   다. 왕권 강화

 

  영·정조 시대에는 채색 서울지도가 여러점 제작되었는데 이는 군사적 목적보다는 왕권의 강화에 지도가 이용된 경우이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왕조의 중흥을 꾀하기 시작했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대규모 편찬사업과 함께 지도제작을 실시하였다. 正租代에도 이러한 경향이 이어져 君主의 시각으로 그려진 지도들이 많이 작성되었다. <都城圖>는 서울을 북쪽에서 바라보고 그린 유일한 지도인데, 이는 북쪽에 위치한 왕궁에서 군주가 바라본 서울의 형태이다. <도성도>는 세련된 진경 산수화로 도시 주변의 산세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으며, 궁궐의 위엄, 그리고 도시적 번영을 표현하고 있다. 정조는 1782년(정조 6)에 전주 乾止峰과 전주성내 형국을 그리고 하고, <평양전도>와 평안도 도내지도를 각각 병풍으로 만들어 바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군사적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라 왕권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서 <도성도> 제작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성도>  

 

  라. 행정구역 개편

 

  관찬지도는 통치 행위를 원활히 하기 위해 작성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행정구역 개편에 지도가 활용되었던 예들을 역사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통일 후 행정구역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도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수차례에 걸쳐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지도가 활용되었다. 즉, 성종 14년(995)년에는 당의 제도를 따라 10도로 구분하였고, 현종때에는 5도양계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지도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은 건국 후 중앙집권체제를 추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주군과 속현의 병합을 실시하였다. 세종∼성종 代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행정구역의 개편은 자연적 경계와 행정적 경계가 불일치함으로써 오는 폐단을 줄이고 越境地나 犬牙相入地를 정리하거나 군현을 통폐합하는 것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이러한 주군병합 작업도 지도를 참고하여 이루어졌다.

  

  마. 조세·공물 수취

 

  조세나 공물의 수취를 원활히 하는 것 또한 관찬 지도의 주요한 제작 목적이었다. 조선 영조대에는 북방의 여러지역이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북방의 농지개척에 주안점을 둔 북방정책이 실시되었고, 많은 북방지도들이 작성되었다. <평안도지도>(영조12), <北關지도>(영조17), <廢四郡地圖>(영조22) 등, 잇달아 제작된 지도들은 농지개척과 이와 결부된 收稅목적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收稅와함께 공물 진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지도도 제작되었는데 現傳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 방역도>가 있다. 이 지도는 濟用監에서 제작되었는데 濟用監은 모시[苧]·마포(麻布)·피물(皮物)·인삼(人蔘) 등의진상과, 사여(賜與)되는 의복·사라(沙羅)·능단(綾緞)에 관한 일, 교환수단으로 통용한 포화(布貨)의 관리 등을 맡아본 곳이다. 따라서 제용감에서는 이 지도를 8도의 진상품을 파악하기 위해 이용하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조선 영조대(1759, 영조35)에는 청계천 준설을 위해 松杞橋에서 5間水門까지의 形止를 그려 바치도록 명하여 이듬해 제작됨으로써 이에 활용하기도 하였으며 1765년에는 <四山禁標圖>를 목판으로 간행하여 한양의 禁山 지역의 규제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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