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문화 역사

관찬(官撰) 지리지

Geotopia 2013. 3. 9. 11:22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찬지리서인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은 그 체제와 목적에서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체제면을 보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 지리지인 세종실록 지리지는 각도의 내용구성이 관원, 연혁, 四境, 행정구역, 명산, 대천, 호구, 군정, 墾田, 貢賦, 약재, 鎭營, 역 등의 순서로 되어있는데, 군명의 변천, 행정단위의 승강, 소관 군현의 이속, 월경처 등 연혁 부분과 호구, 군정, 공부, 전결, 토산, 조운 등 조세 力役 수취에 필요한 경제관계, 명산, 대천, 군영, 역관, 성곽, 목장, 봉수, 관방 등 군사 관계, 성씨, 인물 등 주민들의 신분 구성에 관한 사항 등이 상세하다. 즉 세종실록 지리지는 조선왕조의 새로운 정치, 사회,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데 필요한 통치자료를 수집 파악하기 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동국여지승람』은 내용의 기술순위가 대체로 그 지방의 연혁, 성씨, 형승, 산천, 토산, 누관, 학교, 역원, 불자, 祠廟, 능묘, 고적, 인물, 명환, 題詠 등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주제들을 설정한 목적을 편찬자의 해석을 통해 알아보면 '廟社를 적은 것은 祖宗을 높이고 神祗를 공경하는 것이며, 다음 궁실을 적은 것은 상하의 체통을 엄하게 하고 권위의 소중을 표시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토산은 貢賦가 나오는 곳이다'고 하여 그 목적을 드러내고 있다.

   『輿地圖書』는 1757(영조33)∼1765(영조41)에 각 읍지를 모아 엮은 전국 읍지이다. 17세기 중엽 이후 사회 질서가 서서히 정비되어가고 지방사회에 대한 국가의 파악도 진전되어 갔다. 행정력이 하부 단위에까지 침투되고 정비되면서 지방 행정 자료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정부는 군현 단위로 개별적인 필요에 의해 작성하였던 읍지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작성된 후 150여년이 지나 전국 각 지역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담은 종합적인 지리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원래는 여지승람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회, 경제, 행정적인 내용이 매우 강화된 것이었다. 즉, 지도, 방리, 도로, 제언, 교량, 전결, 부세, 군병 등의 항목이 새로 설정되어 지역의 사회 경제적인 내용이 매우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이는 16세기 후반 이래의 읍지 편찬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가장 큰 특징은 첫머리에 연혁 대신에 방리, 도로, 부세에 관한 제조항과 채색지도를 삽입한 것이며 충청, 강원, 평안, 경기 일부는 리 단위로 호구수를 기록한 것이다. 조세수취와 관련하여 進貢,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등이 독립된 항목으로 설정된 것 또한 중요한 변화인데 조세량의 정확한 파악과 수납은 국가의 지방통치력 장악 및 중앙 지방재정에 긴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이후 점차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도로 및 교량(교량조 신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회에서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도로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지역간의 교류가 증대되면서 지역간 및 지역내의 구체적인 유통망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다. 군병 항목이 신설된 것은 전란후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관찬지리지에 깔려있는 지리관은 '왕의 땅'으로서 중앙 중심의 국토관과 이에 대한 정보를 통하여 유교적 가치관을 토대로 하고 있는 신분질서의 유지및 조세수취, 국방 등을 주 목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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