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는 우리나라의 지리서 중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평가와 함께 애독되어온 책이다. 『八域志』·『可居志』·『八域可居志』·『山水錄』·『東國山水錄』·『震維勝覽』·『總貨』·『동국총화록』·『팔역가거처』·『사대부가거처』·『吉地總論』·『東嶽小管』·『팔역紀聞』·『博綜誌』·『形家要覽』등의 많은 異名을 가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책이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애독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많이 읽혔을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읽고 자신의 관점으로 제목을 붙였다.『東國山水錄』·『震維勝覽』등은 산수 경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물산의 종합'을 의미하는『總貨』,『동국총화록』은 상업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그리고『形家要覽』·『吉地總論』등은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붙인 제목으로 보인다.
첫째는 사대부, 즉 양반계층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발견하는데 길잡이가 되는 귀중한 책이라는 점이다.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한말에 이르기까지 주로 몰락 사대부 계층에 의하여 많이 애독된 것은 당시의사회 정치적인 사정 때문에 권력체제로부터 유리된 몰락한 사대부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둘째는 우리나라 인문지리학의 시초라는 점이다. 택리지 이전에는 국가의 행정적인 필요와 왕권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관찬지리서가 전부였지만 택리지는 그와는 달리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의 관계를 논술한 최초의 책이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 평가 외에도 많은 세부적인 평가들이 지리학계 뿐 아니라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계 등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 글에서는 택리지에 드러나고 있는 지역에 대한 관점들을 주로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1) 배경
택리지가 당시의 지배계급들이 가지고 있던 지리관을 대변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이중환이 이 책을 저술하게된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이중환은 당시의 명문가문이었던 여주이씨 집안에서 도승지, 예조참판, 안동부사를 지낸 李震休의 아들로 태어났다. 1713년(24세)에 增廣試의 丙科에 급제하여 관직은 병조좌랑(1722, 경종2)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모든 사대부들이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관직을 잃고 전국을 떠돌게 된다. 성호 이익(李翼, 1681~1763)의 재종손인 그는 당시 실학자들이 속했던 남인계열에 속했고 경종2년(1722)에 일어난 임인옥사에 연루되어 후에 삭탈관직을 당하게 된다.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정권에 몰려 영조원년(1725)부터 네 차례나 형을 받게 되고 38세 까지 두 차례에 걸쳐 유배를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매우 곤궁한 처지에 있었던 것을 추측된다. 이러한 와중에서 저술된 것이 택리지이며 仕宦의 길에서 탈락된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데 그 저술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택리지는 이 땅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고 관계에서 활동하다가 당쟁에 휘말려 불우한 일생을 마친한 지식인이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회의 모순점을 분석, 비판하고 동시에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 수있는 방법에 대하여 논한 책이다. 이러한 택리지의 기본 정신은 자신이 낳고, 자란 국토와 그 땅에 살고 있는 동족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의 집필 의도는 자신이 안주할 장소의 탐구라기보다는 오히려 혼탁한 사회에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하여,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백성들 스스로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갖도록 일깨워 줄만한 지침서의 완성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비록 이중환이라고 하는 한 지식인의 노력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지만 조선사회의 지리관을 정리한 책으로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지리관 - 팔도총론
택리지는 地誌를 논함에 있어 각 지역의 지역성을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을 관련시켜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면은 地誌로써 지리학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구조로서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계통지리학과 地誌의 이원화라는 문제점의 해결을 위한 시사점이 될만하다. 또한 지역 중심지에 큰 비중을 두는 서양식 地誌와 달리택리지에서는 각 지방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기술 방법을 취하고 있다. 즉 이중환은 각 지방이 지닌 개성과질을 중요시하였으므로 결코 모든 지방을 하나의 획일적인 틀에 맞추려 하지 않았다. 팔도총론은 서술 방식에서도 종전의 지리서에서 볼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데, 이는 중국적 우주관의 탈피와 王都 중심의 기술방법이 아니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부터 중앙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점이다. 팔도총론의 기술 순서를 보면 평안도, 함경도에서 시작하여 한양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돌아 경기도로 올라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한양은 별개의 절로 취급하지 않았다. 한양은 각 지방을 서술하면서한양과의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를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독특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경기도, 충청도와 강원도의 일부지방은 문화와 풍속이 한양과 비슷하며 재경지주의 농장으로부터 생산물을 운송하기 편하므로 살기 좋다는 표현을 하면서 한양을 중심으로한 수도권 경제, 문화지역을 설정하고 있다.
3)지역관 - 복거총론
당시에 향촌사회에 까지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던 당쟁의 폐해에 대한 경험적 통감은 그의 실학적 사고와 결합하여 독특한 지역관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즉 복거총론에서는 구체적 기준(지리, 인심, 생리, 산수)을 바탕으로 지역을 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지리와 산수, 토질과 같은 자연환경적 요소와 함께, 수운, 도로, 인심 등 인문적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었다.
보다 일반적인 개념이었던 지리와 산수에 비해 인심과 생리는 '택리지'만의 큰 특징으로 복거총론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며, 따라서 '택리지'의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심'조가 어쩔 수 없이 당쟁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던 한 사대부로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생리'조는 대개의 사대부들은 거의 직접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던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지리에 관한 서술이었다.
생리조에서는 먼저 토지의 비옥도를 고찰하고 목면을 비롯한 담배, 생강, 모시, 왕골 등의 상품작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토지의 비옥도는 당시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면, '부자들이 이익을 독점하는 물자가 된다'고 언급한 상품작물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변화하는 경제구조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과 아울러 이중환의 실학적 지역관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탁월한 견해는 물자의 유통과 집산지의 중요성에 대하여 지적한 점이다. '재물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땅이 기름진 곳이 제일이고, 배, 수레와 사람 및 물자가 모여들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그 다음이다.'는 말에서 그의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내포에 대한 '생리'조의 언급은 '충청도에는 내포와 차령 이남은 기름진 곳과 메마른 곳이 반반이다'라고 하여 토지의 비옥도가 뛰어나지 않다고 보았지만 '내포에는 아산 공세호와 덕산 유궁포가 수량이 많고 근원이 길다. 홍주 광천과 서산 성연은 비록 시냇물 항구이나 조수가 통하는 까닭에 장삿배가 머물러서 화물을 싣고 부리는 곳으로 되었다'고 하여 수로교통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심조'를 보면 '대개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심히 나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들은 당파를 만들어 유객을 끌어들이고, 권세를 부리며, 소민, 즉 민중을 침노하고 있다. 다른 당파와는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못하며, 마을, 골목에서는 서로 꾸짖고 헐뜯어서 뭐가 뭔지 분간할 수 없다.'고 표현하여 당시 사색당쟁의 여파가 향촌사회에까지 미쳐서 혼란지경이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자신이 당쟁의 심각한 피해자였지만 객관적 입장에서 당쟁의 배경과 진행과정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지역에 대한지리적 평가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심각한 문제점으로 당쟁을 인식하고 이의 타파를 주장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특정지역의 인심을 논함에 있어서 약간의 편견을 노출한 측면도 있다. 평안도와 경상도를 '가장 인심 좋은 지역'이라고 표현한 반면, 전라도는 '오로지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 데에 쉽게 움직인다'거나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만을 좇는다'고 한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정보의 부족이나 私的 이해관계로 인한 오해와 편견의 확대해석으로 인한 결과일 수 있다 또한, 평안도와 함경도는 일찍이 사대부의 宦路가 막힌 지역이었으므로 당쟁의 폐해가 적었으며 오직 남인만이 분포하여 정치적 견해가 하나로 통일되었던 경상도를 가장 인심 좋은 지역이라고 한 것 같다.
☞ http://blog.daum.net/lovegeo/6781175 전라도에 대한 박한 평가 뒤집은 택리지 필사본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가거지의 질을 복지, 길지, 피병지, 피세지, 경승지로 구분하여 실례를 들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여 위와 같이 지도화를 해 볼 수 있다. 사회가 혼란할 때 사대부가 숨어 살만한 곳을 避世地, 亂을 피할 수 있는 곳을 避兵地, 평시나 전란시에 다 같이 살만한 곳을 福地, 吉地 또는 德地라 하였다. 그런데, 피병지나 피세지는 대체로 토양이 척박하고 자원이 부족하며 또 교통이 불편한 곳에 위치하므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오래 거주할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海居를 가장 열악한 환경으로 꼽아서 해안을 따라서는 가거 부적지가 많은 것으로 보았던 반면, 가장 좋은 곳은 溪居로 보았으므로 최상의 복지들이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이른바 兩白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에는 하회, 예안, 도산 등의 명문 사대부의 同姓村을 형성한 곳이 많으나 지형적으로 넓지 않으므로 도시가 발달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다. 따라서 들이 열리고 수운과 도로가 발달하여 유리한 곳은 江居라 볼 수 있는데, 여물평, 내포, 섬진강 유역, 낙동강 중류지역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중환은 앞에 열거한 여러 입지적 조건이 갖춰진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택리지』가 갖고 있는 特長은 조건에 부합하는 가거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조건들 가운데 일부가 갖춰진 곳을 선정하여 인간 스스로 노력하면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다는 낙관론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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