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문화 역사

풍수지리 사상

Geotopia 2013. 3. 8. 13:27

  풍수지리설은 傳來 이래로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경관, 나아가서는 한국 문화자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아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도시와 마을의 위치 및 구조는 대체로 풍수에 대한 안목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고려의 개경이나 조선의 한양과 같은 수도의 입지 결정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풍수적인 해석들은 진위를 떠나 풍수적 지리관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풍수사상은 지형과 기후, 풍토 등, 넓은 의미에서의 지리관, 토지관이자 자연에 대한 해석 방법이다1).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시대별로 풍수사상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지리관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풍수사상의 이론적 체계는 논외로 하고 시대적으로 풍수사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과정, 즉 언제 어떤 사람들이 무슨 까닭으로 풍수지리설을 필요로 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명당 개념도>

 

 

  1)풍수지리설의 형성과 전개2)

 

  우리나라에 풍수사상이 도입된 것은 8세기 말, 신라 下代 쯤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입 초기에는 주로 경주지역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간에 유포되어 사원의 건축이나 분묘의 축조에 이용되었다3). 수용의 주체가 왕실을 중심으로 한 중앙귀족들이었다는 점과 수용 시기가 신라 말기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라 말기는 왕위쟁탈전을 중심으로 하는 진골귀족들의 정치적 투쟁이 치열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풍수지리사상은 불교와 함께 그들에게 안정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신라말기에 이르면 풍수지리설이 중앙 귀족으로부터 지방의 호족으로 파급되어 가는데,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道詵이었다. 신라말기 후삼국을 비롯하여 지방에 할거하던 호족들은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근거에 대하여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였으며, 도선이 이들과 직접 관련을 갖고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를 떠나 도선은 풍수의 대중화에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호족들의 근거지가 금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고, 특히 서해안 지대에 대호족이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히 국토의 재편과 같은 결과를 낳게 하였으며4), 이같은 현상의 사상적 뒷받침을 풍수지리설이 감당하였다. 즉, 신라말에 지방을 무대로 세력을 부식하던 호족들로 하여금 경주 중심에서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중핵지를 옮기고자 하는 국토 재편성의 안목을 풍수지리설이 길러줄 수 있었던 것이다5). 그러나 왕건에 의해 통일이 되면서 각기 자신을 정당화하던 지역 풍수사상들이 서로간의 배타성으로 인하여 송악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소멸해가기 시작하였다. 이 이후의 풍수사상은 새시대의 역사를 담당할 새로운 세력을 위하여 도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세력의 성장을 억제하는 구실을 담당하는 모습으로 변질을 하게 되었고 음택풍수 위주의 풍수도참적인 사고관념으로 일반화 되었다6).

       

 2)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풍수설 그리고 도참사상이 사회를 이끈 주도적 사상이었다7). 특히, 훈요십조의 경우는 지배자의 논리에 따라 풍수사상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정치적 계산에 따라 풍수지리가 내세워 졌는데 따라서 일관된 원리보다는 다양한 원리가 지역의 해석에 적용되었다. 地氣多寡論·地氣不變論8), 地氣盛衰論·地氣變化論9), 人間決定論·土地決定論10) 따위가 고려의 풍수설을 뒷받침하고 있던 원리들이다11). 이들 원리들은 상호 모순되는 경우가 많으면서도 공존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풍수사상이 확고한 논리체계이기 보다는 태조의 왕권확립을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풍수지리와 정치의 만남 속에서 풍수지리설은 자신의 모순을 덮어둘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굳건한 지위까지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가의 권력은 풍수가의 권위를 요구하였고, 반대로 풍수가의 권위는 정치가의 권력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고려 초기의 정치와 풍수지리의 관계는 상보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사상은 정치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지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서로 모순되는 원리들을 양산하는 논리상의 한계를 노출함으로써 음택풍수 위주의 풍수도참적인 사고체계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지역에 대한 관점에서도 정치적 요구에 따라 상반되는 논리체계를 전개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결국은 고려의 정치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편, 전국의 여러 지역에 대한 해석에 풍수사상을 접목시키는 태조 이래의 통치방법은 풍수사상의 일반화를 유도하였다.

      

  3) 한양천도와 풍수지리12)

 

  漢陽定都과정은 거의 풍수설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즉, 무학대사의 전설이나 정도전과의 논쟁에 관한 전설이 定都 과정을 설명하는 정설로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正史인 왕조실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것으로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창건된 왕조이며 유교사상은 풍수사상을 배척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잘 알려진 전설들이 漢陽定都의 정설로서 타당성을 갖는지를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의견대립은 儒者들과 術士들 사이에 있었다. 도읍지 선정은 본래 書雲觀員들의 소관이었으나 그들의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의견이 자주 일관성을 잃어 국왕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이에 조정의 사대부 재상들은 국가의 기틀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입장에서 풍수지리설의 한계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양 정도는 사실상 풍수지리설보다도 사대부들의 유가적 식견에 의해 결정이 되다시피 하였다. 고려말 공양왕은 "천도를 하지 않으면 廢君臣 즉 정변이 일어난다"는 당시 떠돌고 있던 秘錄의 참설에 따라 천도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다. 이성계는 역성혁명이후 이러한 사실들을 크게 염두에 두어 남경천도의 의지를 갖게된다. 따라서 천도의 배경에는 도참설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계층간의 견해차이에서 서운관원들이 일관성있는 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개경에 머물고자 하는 "世家大族"의 이해를 대변함으로써 천도 논의의 주도권을 신진사대부들의 儒家的 견해에 넘기는 결과를 자초하였다. 대표적인 견해로 정도전의 의견을 들 수 있는데 정도전은 교통과 면적 등을 요건으로 들고 '사람에게 治亂이 있지 땅에 성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제왕의 도읍터는 자연이 정해진 곳이 있기 때문에 술수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하여 儒者로서의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漕運·道里 등 인사 중심의 유학적 지리관이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왕자의 난으로 개경으로 還都한 이후 태종 때의 2차 천도 과정에서는 술수 지리서들의 사용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으며 결국, 도참설에 따라 毋岳을 주장하는 의견들을 누르고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결국 조선초까지 전래의 풍수설·풍수도참설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직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근본적으로 전래의 풍수지리설을 담당하는 서운관의 지관들은 定都의 대사를 감당할 수 없는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반해 사대부를 대표하는 재상들의 주장은 합리적이고 논지가 확연했다. 한양의 산수에 대한 설명에서 풍수가의 용어가 사라진 것은 아니나 도읍으로서의 타당성을 논하는 기준이 조운과 道里 등이 절대적으로 우선시된 것은 분명히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유학적 지리관의 출발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초기 관찬 지리서를 대표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京都에 대한 지세론만 보더라도 음양 술수적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풍수사상이 사회운영 원리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렸으며 당시의 주도세력이었던 사대부들의 유학적 지리관에 비해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4)조선후기의 풍수지리

 

  조선후기에 이르면 풍수가 일반백성에게 까지 널리 보급되어 음택풍수로 발전하는 한편 이상향 탐색의 도구로 변화하여 풍수의 주술적 특성을 수용한 『정감록』이 등장하는 등 사회변혁 내지 새로운 우주질서의 성립을 기대하는 풍조가 나타나게 되었다13). 지배층의 유학적 지리관의 이면에서 이루어진 이와 같은 대중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임진왜란·병자호란이라는 충격과 혼란을 겪은 후유증과 소빙기로 가뭄과 홍수 등이 번갈아 기근이 연속되고 전염병이 자주 돌아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가는 사회적 위기(1670년까지 인구가 200∼300만이 감소)와 관련하여 도참사상의 형태로 풍수지리사상을 부활시켰을 가능성이 있다14). 한양정도와 관련된 무학과 정도전의 풍수논쟁이 소개된 것도 이 때부터 인데, 차천로의『五山說林』과 이중환의 『택리지』가 대표적이다15). 실제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무학과 정도전의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어떤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다16). 홍만종의 『旬五志』1678(숙종 4)에는 도선과 일행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또한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이후 동대문과 수구문 사이의 풍수 결함을 보완하는 뜻으로 假山이 만들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기본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이 후기에 이르러 왕도정치의 와해와 함께 대중적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고 더욱이 심각한 전란의 후유증은 백성들 사이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크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풍수도참사상의 부활을 유발하였으며 실학자들이 이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17)에서 드러나듯이 상당한 수준으로 팽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당 개념의 실질적 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 침식분지(해안분지)>

 

<각주>

 

1) 최창조, 1991, "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한국의 전통지리사상』, 민음사, p. 59

2) 이기백, 1994, "한국풍수지리설의 기원", 『한국사 시민강좌』14집. pp. 1∼17

3) 최병헌, 『도선의 생애와 羅末·麗初의 풍수지리설』, pp. 126∼128, 이기백, 앞의 글에서 재인용.

4) 이용범, 1969, "처용설화의 일고찰", 『진단학보』32, pp. 37∼38, 이기백, 앞의 글에서 재인용.

5) 최창조, 1991, "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한국의 전통지리사상』, 민음사, p. 63

6) 최창조, 앞의 글, p. 63

7) 최창조, 앞의 글, p. 63

8) 태조의 위업을 완성한 배경인 개경이나, 주변의 서경, 남경 등에 대한 찬양은 대개 지기의 왕성함과 관련이 되어있는 반면에 후백제 지역은 그렇지 못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후백제 지역에 대한 풍수적 해석은 고려시대 내내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다.

9) 道詵이 '절을 마구 지으면 지덕을 손상시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왕업이 길지 못하다'고 한 점이나 태조가 '120년 뒤에 예성강가의 餠岳 남쪽에 궁궐을 지으면 국업이 연장될 것이다'고 언급한 점은 地氣가 변화, 성쇠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10)『道詵記』에 '개국후 160여년에 木覓壤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나 『踏山歌』에 '개경의 도읍지로서의 운명이 백년으로 끝난다'고 한 점 등은 운명적으로 땅이 인간에 미칠 영향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裨補를 통하여 지기를 연장하거나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이 토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11) 홍승기, 1994, "고려시대 정치와 풍수지리", 『한국사 시민강좌』14집, 일조각, p. 24

12)이태진, 1994, "한양천도와 풍수설의 패퇴", 『한국사 시민강좌』14, pp. 44∼69

13) 최영준, 1994, "풍수와 택리지", 『한국사 시민강좌』14, p. 106

14) 이태진, 앞의 글, p. 52

15) '택리지의 풍수적 사고는 이중환 자신의 사상이라기 보다 당시 사회를 풍미했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최영준, 1990, "택리지:한국적 인문지리서", 『진단학보』69, p. 170

16) 이태진, 앞의 글, p. 52

17) 임덕순, 1991, "다산 정약용의 지리사상", 『한국의 전통지리사상』, 민음사, p. 47

'인문지리 > 문화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찬(官撰) 지리지  (0) 2013.03.09
擇里誌  (0) 2013.03.08
아르헨티나의 독특한 문화  (1) 2013.01.21
전주 한옥마을  (0) 2012.12.24
하코네(箱根)신사의 토리이  (0) 201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