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의 지리환경/하천(천안)

천안 시내 하천 답사(4)

Geotopia 2012. 6. 3. 08:19

 

 

▶ 공감대는 나이를 뛰어 넘는다

 

  갑자기 학교에 상가가 둘이나 생겨 두 곳의 상가를 동시에 가야 하는 친목회 간사 원기와 남산을 내려와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알고 보니 두 상가가 모두 나도 잘 아는 집이어서 봉투를 부탁하고 헤어지는데 원기가 최대한 일찍 올테니 뒷풀이를 일찍 끝내지 말란다. 이런 열정들을 만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단지 술이 좋아서 그럴 사람은 결코 아니니 많게는 십 수 년 나이를 뛰어 넘는 공감대가 있다는 뜻이다. 버스를 전세 내서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라서 간사의 의도대로 되기가 쉽지 않겠지만 힘 조절해서 최대한 버텨 보리라 다짐을 해 본다.

  중앙시장에 들어오기 위해 중간에 천안천과 원성천의 합류지점 위쪽에서 동쪽으로 하천을 이탈했었는데 이탈했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직접 남부오거리 아래의 원성천과 삼룡천의 합류지점으로 가서 삼룡천을 따라 상류 방향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원성천은 유량동 태조산 기슭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아무래도 낯이 익은 곳이다. 하지만 삼룡천 유역은 거의 가보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그 쪽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삼용천은 아직 천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데 공정으로 보아 금년 중에는 완성이 될 것 같아 보인다.

 

 

<1번국도와 충절오거리를 연결하는 도로(광교로) 중간의 광교에서 바라 본 하류 방향>

 

 

▶ 원칙은 효율성보다 중요하다

 

  제방 옆으로 발달한 좁은 도로를 따라 이동하려니 조금 불편하다. 길이 좁은데다 주차된 차량이 계속 있어서 차라도 한 대 만나면 비킬 공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이런 불법 주정차는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까? 차고지 증명제 같은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단속마저 느슨해진 요즘에는 주차질서 지키는 것이 바보스러울 지경이다. ‘생계형 음주는 단속하지 말라’든가, ‘생계형 노점은 단속하지 말라’는 얘기가 국법을 누구보다 준수해야 할 높은 분의 입에서 나왔으니 질서가 서기란 애시당초 글러 버린 것은 아닐까? 길을 가다보면 가슴 아픈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동사무소 앞 삼거리 교차로에, 그것도 지구대가 코앞에 있는, 운전면허 시험 때 열나게 외웠던 주정차 금지 구역인 교차로 5m 이내의 지점에서 버젓이 트럭 노점상이 몇 달 째 영업을 하고 있다. 동사무소 직원을 탓할까, 지구대 경찰을 탓할까? 공무원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행정부의 일인데 격려는커녕 제한을 하고 있는 꼴이다. 아마도 단속하러 나오면 ‘왜 나만 단속하느냐?’고 되레 항의를 할지도 모른다. 공공연하게 기초질서를 어기는 행위를 ‘친서민’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무질러 버리는 정부의 수장 밑에 있는 공무원들에게 어떤 자발성을 요구하고 기대를 한단 말인가? ‘친서민’과 ‘원칙 준수’는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틀림없이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자본의 움직임은 점점 자유롭게 하면서 친 서민 정책(?)으로 노점을 허용하고 생계형 음주를 단속하지 않는다니… 재벌의 골목 상권 침략을 차단하는 정책, 음주를 하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원칙적으로 추구해야 할 선진 정부의 자세가 아닐까?

  언젠가 나의 학생들을 태우고 지리올림피아드 대회에 가다가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 진짜 속도위반 안하세요?’ 편도 2차선 도로에서 80km 준법 운행을 하는 나에게 나의 승객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이다. 이젠 신호 대기하고 있던 차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그냥 위반하고 지나가는 것은 다반사가 되었다. 배달 오토바이들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횡단보도를 빨간 불에 건너는 것도 너무도 흔한 풍경이다. ‘횡단보도란 신호와 무관하게 사람이 걷는 길’이라고 배운 사람들인 것 같다. 학생들은 이제 아주 자연스럽게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한다. 운전하다가 중앙분리대를 넘어 무단횡단 하는 아이들을 보고 놀란 적도 여러 번 있다. 이젠 사람도 차도 믿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든다. 이것이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지켜야 하는 세렝게티 평원이지 어찌 법치국가란 말인가?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초등학생들이 버젓이 신호 위반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이건 진짜 아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떻게 원칙이 선 나라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오죽하면 나는 이런 생각을 다 해 보았다. 하루 날 잡아서 종일 질서 위반 현장 사진 찍기를 해 볼까? 아마 한 나절 만에 전시회 한 번 할 만큼은 작품(?)이 쌓일 것 같다. 제목은 ‘아, 대한민국…’

  무엇보다 질서가 서야 나라가 산다. 2000년대에 들어 서면서 한 동안 내가 피부로 느꼈던 달라진 점들은 원칙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기본적인 교통질서 위반 단속이나 음주 단속 등이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원칙적으로 잘 적용되어 갔었다. ‘음주 단속에 걸리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말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었다. 공무원의 비리 역시 지위고하와 무관하게 예외 없이 처벌되었다. 오죽하면 비리와는 전혀 무관한 국무총리가 수해가 일어난 날 골프를 쳤다고 그만두었겠는가? 정책이 수립되기 전에 공청회가 실질적으로 열렸고 교통신호 연동과 같이 관련 전문가가 꼼꼼하게 시민의 입장을 챙긴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상명하달의 경직성 보다는 일하는 사람의 의견이 반영되는 통로가 늘었고 정치권력과 무관한 다양한 시민․문화 활동이 활성화 되었다. 인권의식이 향상되었고 권력에 의해 억울한 과거를 겪은 사람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명예회복 작업이 이루어졌다. 중고딩들이 청와대에 학교에서 두발단속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글을 올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것이 지나쳐 방종으로 흐르는 경우도 있었지만(내가 본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경제나 나빠져 장사가 안 된다고 음식점 운영자들이 솥단지를 들고 시위에 나섰던 장면이다.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와 지하경제로 일컬어지는 경제의 이면을 고쳐가고자 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지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대 자본의 요식업 진출에 의한 동네 음식점의 몰락과 외식 산업의 이상 비대 현상 등 구조적 문제들은 방조 하면서 다만 대통령 앞에서 솥단지를 두드리는 이율배반을 통하여 어떤 것이 해결이 될 수 있을까? 지금 그 분들은 장사가 잘 되기 때문에 솥단지를 들 생각을 안 하는 것인지…) 백성의 목소리는 터놓아야 하고 전문가의 자발성은 존중되어야 하며 상명하복의 조직체계 보다는 소통이 원활한 조직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지금은?

  아마 국무총리가 수해가 난 날 골프를 친다고 해도 그 정도는 신문에 날 일 축에도 못 낄 것 같다.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라는 어마어마한 부정행위와 비도덕적 행위가 정부부처의 수반이 되는 데 아무런 결격 사유도 되지 못하는 현실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백성을 돌아보기 보다는 윗선에 충성을 다하는 것만이 자격 조건일 뿐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은 여전히 통하는 진리이다. 둘 중 하나가 바뀌어야 한다. 윗물이 맑아지거나 아니면 윗물과 아랫물의 도식적 구별이 없어지거나.

 

 

▶ 재미있는 교통 표지판 

 

  삼룡천을 따라 삼룡교, 광교를 지나 구곡교를 지나면 삼거리초등학교가 나온다. 길을 걸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인도에 전봇대가 두 개나 서 있는데 그 폭이 너무 좁아서 그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마치 무슨 묘기라도 부린 것 같아서 자랑스러울 지경이다. 삼거리초등학교 앞에서 두 개의 지류가 만난다. 하나는 남쪽에서 흘러 내려오고 다른 하나는 북동쪽에서 흘러 내려온다. 남쪽에서 내려오는 지류는 취암산에서 도리티고개로 이어지는 분수계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다. 이 하천은 삼거리 공원 북쪽에서 도리티-선문대·천안여고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만난다. 북동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는 구성동 구률 마을에서 시작되는데 이 마을의 남쪽에 있는 청룡동 새골에서 내려오는 개천과 동중학교 북쪽 250m 지점에서 합류한다. 이들 지류들은 모두 금북정맥의 작은 지맥 사이를 흘러 내려오는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모두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곳이지만 가장 북쪽 지류인 구성동 구률마을로 목적지를 정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지만 지도에 보니 ‘죽전원’이라는 시설이 있는데 학생들이 봉사활동 확인서를 가져올 때 자주 봤던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봉사활동을 하러 가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으므로 위치도 확인해 볼 겸 가 보기로 한 것이다. 구곡교를 건너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1번 국도가 나온다. 횡단보도가 없어서 삼룡사거리까지 내려가서 도로를 건넜다. 1번 국도에서 200여미터를 올라가면 구률과 새골에서 각각 흘러나오는 개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나온다. 합류지점에 고물상이 하나 자리를 잡고 있는데 오른쪽으로는 동중학교가 보이고 뒤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구률과 새골에서 흘러 나오는 하천의 합류지점. 오른쪽에 동중학교가 있고 왼쪽에 죽전원이 있다>

 

  구률마을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으로는 하천을 따라 논이 펼쳐져 있고 하천을 따라 버드나무들이 한창 봄물을 올려대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특이한 교통표지판(?)이 있다. ‘어르신들이 많은 곳이니 서행 하시오’ 바로 노인 복지 시설인 죽전원 때문에 생긴 표지판이다. 최상류의 한적한 마을인 이 마을은 의외로 공장이 많고 무슨 공사인지는 모르지만 중장비 소리로 부산하다. 마을회관 앞에서 마을을 가로 지르는 하천을 건너 상류 쪽으로 올라가니 마을의 맨 위쪽에 죽전원이 보인다.

   

<삼룡천 최상류 발원지 앞에서 인증샷>

 

 

▶ 오천재에서

 

  죽전원 아래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자니 북쪽으로 사당처럼 보이는 전통 건물이 보인다. 잠깐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언덕길 앞 입구에는 오천재(烏川齋)라는 안내 표지판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멀리서 보아도 전통 건물이지만 새로 지은 건물이고 이렇게 큰 안내 표지판은 문화재나 보물에는 붙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가문의 사당이나 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전거로 간신히 오를 정도의 경사로를 올라 언덕위에 다다르니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는데 전시관 건물과 잔디밭 등이 모두 새로 조성한 느낌이다. 맨 안쪽으로 이곳의 주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오천재가 자리를 잡고 있고 왼쪽으로 단정한 한옥 가정집이 오천재와 연결되어 자리를 잡고 있다. 오천재 앞에는 건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모양이 얼핏 보기에 문화재를 설명하는 안내판 비슷하다. 이 건물은 仁川李氏 李文和라는 분의 사당인데 이 분의 호가 烏川이다.

 

<오천재와 그 앞에 설치된 안내 표지판>

 

  마침 집안에서 농기구를 든 아저씨 한 분이 나온다. 오천의 후손이라는 이 분은 얼핏 듣기에 말투가 이곳 토박이 말투가 아니라 표준말에 가깝고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 온 사람이라기보다는 은퇴 후 정착한 샐러리맨의 느낌이 난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역시 건물이 잘 지어진 아주 새 건물이다. 새 건물이니 특별히 양식이나 역사성 등을 살펴볼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마침 옆의 가정집에서 가족들이 나물을 말리려는 듯 오천재로 건너온다. 가족 관계를 자세히 물어볼 수는 없었으나 아까 밖에서 뵌 분의 부인인 듯한 분에게 간단하게 들은 내력은 최근에 후손들이 이 일대의 땅을 사서 가묘와 사당을 조성했으며 서울에서 토지를 보상받아서 내려왔다고 한다. 조상의 내력을 물었을 때 대부분은 업적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하지만 조상의 내력에 정통한 사람의 부인들은 꼭 그렇지는 않다. 내 경험으로는 항상 그랬다. 할머니들은 대개 남 이야기 하듯이 시댁 조상 이야기를 한다. 출가를 하면 그 집 귀신이 되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의 바람일 뿐인 모양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여성도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니 평생 그 고향이 그립고 그 곳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인천이씨 공도공 이문화 신도비>

 

 

▶ 특이한 신도비 

 

  잔디가 막 퍼지기 시작한 너른 마당 끝에 커다란 비석이 보인다. 귀부 위에 안치된 비석은 멀리서 봐도 새로 조성한 것인데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새로 조성한 비라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고관을 지낸 사람이 사망했을 때 나라에서 내린다. 비문의 내용도 당연히 당시의 유명한 문장가가 쓰는 경우가 많다. 이문화는 참찬(정2품)에 이르렀으므로(증직은 영의정(정1품)에 이르렀음) 신도비 하사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의 신도비는 1971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이전했다고 하는데 소실되어 새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후손들이 세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개 후손들이 세우는 것은 묘갈(墓碣)이라 하여 신도비와는 구별을 한다. 두 번째 위치이다. 神道란 말은 ‘무덤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이다. 즉, 길에서 묘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서 묘의 입구임을 표시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신도비는 가묘가 있는 오천재 뒷산과는 방향이 많이 다르다. 원래의 자리가 아니고 옮겼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세 번째는 형태이다. 이곳의 신도비는 커다란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모양을 하고 있다. 귀부는 통일신라 이후 등장한 구조물로서 고려시대까지는 상당히 유행을 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크기가 작아지거나 도식화되었다. 내가 그동안 본 것 중에는 예산 봉산에 있는 이의배의 신도비가 유일하게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 신도비이다.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고 병자호란 때 목숨을 잃은 이의배의 신도비는 그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신도비들은 규모도 작고 장식된 조각이 도식적이다. 이것도 새로 조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도비 뒷편에 한글로 해석판 비석을 따로 조성해 놓았다는 점이다. 한문이 낯설은 후손들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해석판 신도비>

 

  그런데 이런 시설들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규모와 내용으로 볼 때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 분명한 이런 시설들은 지금의 현실에 비춰봤을 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나는 항상 의문을 갖게 된다. 전통이란 것은 어떤 사회집단에게나 일정한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속한 가문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오면 그만큼 후손들의 정신적 세계는 넓어질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영의정'이라는 직위에 대해서 알고 자란 사람과 관직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상태로 자란 사람이 있다고 가장해 보면 어느 쪽의 정신세계가 더 넓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조선사회의 핵심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적 가치가 가장 강하게 내재되어 있는 종족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일까? 한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체제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동안 관성을 가지고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이 땅의 유교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유력한 사회집단으로서의 종족집단은 그 실제적 효용성을 상실한 것이 백여년이 넘었다. 전통 경관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경관을 생산해냈던 사회적 조건이 바뀐 상황에서 재생된 전통경관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 갑자기, 그러나 이심전심

 

  다시 출발! 이제는 하천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이다. 1번국도 앞에 이르자 앞서 가던 승규가 패달을 멈춘다.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생각이 같다. 1번 국도를 건너지 않고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야트막한 고개를 두 개 넘으면 유량동에서 내려오는 원성천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꽃재라고 불리는 첫 번째 고개는 우리가 좀 전에 답사했던 죽전원-오천재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이어지는 고개로 구성삼거리 남쪽에 있다. 이 줄기는 삼룡교 근처에서 끝이 나기 때문에 여의주를 다투는 다섯 마리 용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다. 두 번째 고개는 유량로 바로 건너에 있는 고개로 고래울에서 내려오는 줄기이다. 이 줄기는 원성천과 삼룡천의 합류지점, 즉 남부오거리에서 끝이 나는데 여의주를 다투는 다섯 마리 용 가운데 하나가 분명하다.

  두 번째 고개를 내려가면 바로 유량동으로 들어가는 태조산길이 나온다. 원성천을 건너는 동부교 다리를 건너 우회전을 하여 경부고속도로 못 미쳐서 천변 산책로로 들어섰다. 승규는 이미 여러 번 와본 경험이 있어서 제집 드나들 듯 구석구석 길을 잘 안다. 

 

<원성천 산책로>

 

<중원교 앞에서 징검다리를 건넌다. 멀리 상류쪽으로 보이는 다리가 동부교이다>

 

  원성천 역시 천변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교보사거리 동쪽 원동교 아래를 통과하여 교보사거리 남쪽의 원성교 아래를 지난다. 원성1교-원성2교-여중교 등 자잘한 다리를 지나 남부오거리 북쪽 중앙교 앞에서 천변 산책로가 끝이 난다. 남부오거리에서 중앙시장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왕복 8차선의 충무로까지 구간이 모두 복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천변 산책로를 따라서 원성천과 삼룡천의 합류지점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로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걸어가야만 한다. 자전거를 가볍게 어깨 위로 들어 올리고 계단을 사뿐사뿐 올라가는 승규와는 달리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 올라가야하는 나는 다른 길이 없나 두리번거려 봤지만 역시 그길 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남부오거리-원성천과 삼룡천의 합류지점>

 

<삼룡천과 합류한 원성천을 따라 하류쪽으로(오른쪽은 영성동, 왼쪽은 청수동)>

 

 

▶ 천안천과 원성천의 합류지점-천안시행정지도의 오류 

 

  남부오거리에서 충무로를 건너자 승규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내 생각엔 왼쪽으로 가야만 하천 제방 도로를 타고 하류 쪽으로 계속 내려갈 수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원성천과 천안천의 합류지점 인근에는 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승규는 선배의 짬밥에 밀려 하는 수 없이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남부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천변 산책로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산책로를 따라 남쪽으로 300여 미터를 내려가면 청수교가 나오고 그 아래 쪽 오른쪽에 하천의 합류지점이 나온다. 승규는 이곳이 천안천과 원성천의 합류지점이란다. 내가 일봉산에 와 본 경험으로는 일봉산 바로 앞으로 천안천이 지나갔었기 때문에 아니라고 주장을 했다. 그러니까 합류지점의 서쪽으로 일봉산이 보여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일봉산이 건물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천안천의 유량이 아까 우리가 내려오면서 봤던 유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옛 천안천과 원성천의 합류지점. 오른쪽이 원성천>

 

  승규가 얼른 지도를 꺼내 놓는다. 지도에 따르면 이곳이 합류지점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약간의 의구심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니, 앗! 지도에는 분명히 그렇게 표시가 되어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내 생각엔 아닌데 지도는 분명히 그렇게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잘못 알았나? 일단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아래쪽에서 천안천과 원성천의 합류지점을 찾는다면 이건 분명히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다시 300여m를 더 내려가 경부선 철도를 지나니 예상대로 천안천과 원성천의 합류지점이 나타난다. 왜 지도가 잘못 표기된 것일까? 잠시 머리를 맞대고 원인을 찾아보았다. 단순히 지도 제작과정에서 실수로 잘못 표기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하천의 유로가 바뀌었는데 바뀐 내용이 지도에 반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눈으로 보기에도 합류지점 바로 위쪽의 천안천은 일봉산 끝자락을 따라 좁게 직선상으로 내려오고 있다. 유로를 인위적으로 변경했을 가능성이 커 보이는 것이다. 아까 봤던 청수교 아래쪽의 합류지점은 물의 양에 비해 하천의 폭은 상당히 넓은 편이고 상류 쪽으로는 복개된 듯 건물들이 보였던 것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

 

<천안천과 원성천의 합류지점>

 

  그렇다면 이유는 뭘까? 언제? 누가? 왜?

  내가 처음 일봉산과 천안천을 답사했던 것이 내가 천안에 처음 왔던 2004년이었으니까 만약 유로가 바뀌었다면 적어도 8년 보다 더 전에 바뀌었다는 얘기가 된다. 일제 때 풍수상의 이유로? 그건 아닐 것 같다. 특별히 맥을 끊는 위치도 아니지만 그 때 벌어진 일이라면 아무리 오기라도 지금까지 수정이 안 되었을 리가 없다. 수해 때문이었을까? 지도로 볼 때 구 하도가 좀 더 곡류가 심하고 중앙시장 쪽으로 붙어 있으므로 수해를 줄이기 위해 유로를 바꿨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승규는 아까 남부오거리에서 원성천의 오른쪽으로 내려와도 합류지점에서 하천을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을 지도를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 지도에 따르면 원성천의 오른쪽을 따라 내려오다가 천안천과 원성천의 합류지점을 확인한 다음 합류지점 바로 위에 있는 청수교를 건너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니 그 길로 오는 것이 옳았다. 그 정체불명(?)의 지류의 비밀도 풀어보고 합류지점의 안쪽도 답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통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다리가 없다면 되돌아오면 될 것을 어찌 그렇게 소심하게 판단을 했더란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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