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로 만든 평양냉면, 감자 전분으로 만든 함흥냉면.
둘은 '냉면'이라는 돌림자가 같아 사촌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가문 출신의 음식이다. 굳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벼농사가 어려운 환경에서 등장한 음식이라는 점이다.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은 벼농사가 잘되기 때문에 옛부터 쌀이 주식이었다. 밀을 비롯한 곡식들은 雜穀이라는 한마디로 싸잡아 묘사되었던 것을 보면 쌀은 雜의 반대인 純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밀가루 음식을 한 수 아래 음식으로 쳤다. 예를 들면 '국수는 헛 것이다'고 하여 간식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나 밀가루 빵이나 부침개 같은 음식 역시 간식 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 등이 좋은 예이다. 나의 옛 친구 하나는 잔치집에서 잔치 국수를 일곱 그릇이나 먹어치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게 다 '방귀 한 방이면 다 내려가 버린다'는 밀가루에 대한 고래의 가치판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지역에서 밀 음식을 먹었을까?
밀은 기후 적응력이 강하다. 겨울 최저 기온 -14˚C까지도 견디며 강수량이 500mm를 넘지 못하는 곳에서도 잘 자란다. 우리나라의 중부 이북지역에서도 잘 자란다. 보리의 북한계선인 1월 평균 -5˚C(대략 황해도) 이북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주로 북부지역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따라서 밀은 벼농사가 어려운 지역에서 이용되었다. 설날 중남부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떡국을 먹었던 반면에 북부지역에서는 만두국을 먹었던 것도 이러한 기후 조건과 관련이 깊다.
곡물 가운데 쌀과 맞짱을 뜰 만한 유일한 대안 세력인 밀이 그 지경의 대우를 받았는데 하물며 다른 잡곡의 처지는 어떠했겠는가? 어엿한 곡물인 옥수수는 감자나 고구마와 급이 같은 간식에 불과했고, 메밀이나 수수 같은 잡곡들은 '求荒작물'이라는 흉년에 부득이 먹었던 핀치히터에 불과 했다. 그러니 쌀을 충분히 재배할 수 있는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메밀이나 감자가 원료인 평양냉면, 함흥냉면 따위를 먹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만난 메밀냉면. 이젠 음식의 지역색이 거의 사라졌다>
보너스!
함흥냉면의 역사에 관한 기사 하나 - 시사In 제239호(2012.4.14) 휴먼&휴, 함경도 아바이가 이리 질겼을까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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