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삶과 지리

주여 당신의 어린 송아지를 굽어 살피소서!

Geotopia 2012. 3. 23. 12:08

<울란바타르 북부 스텝지역의 유목>

 

  만약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탄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는 우리의 牧者'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당신의 어린 양'은 '당신의 어린 송아지'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하느님은 곡식을 바친 카인의 정성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이 무슨 발칙한 얘기?

  순전히 지리학도의 눈으로 삶의 방식을 인간과 환경의 관계로 볼 때 얘기다.

 

  기독교가 발생한 서남아시아는 전형적인 건조사막과 스텝기후지역이다.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쌀은 고사하고 밀농사도 어렵다. 사우어(C.O.Sauer)는 메소포타미아를 세계 3대 농업의 기원지 가운데 하나로 꼽았지만 물이 풍부한 강 주변을 제외하고는 서남아시아에서 농업을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나마도 보리 같은 건조에 강한 작물이 겨우 재배되는 수준이다(보리의 원산지가 바로 메소포타미아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는 농업보다는 유목을 할 수 밖에 없다. 

  인류가 환경에 적응한 형태 가운데 가장 극단적 환경에 적응한 예가 바로 유목이다. 일정 기간 가축을 기르다가 이동하는 유목은 매우 절제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모든 것이 극한의 상황이다. 이슬람의 금식이나 무릎을 세우고 식사를 하는 습관(무릎을 세우고 밥을 먹으면 훨씬 식사량이 줄어든다.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응용해 보시라^^) 같은 것들은 모두 이런 극한의 환경과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어떤 가축을 키워야 할까? 유목으로 사육되는 가축은 양이나 낙타(건조기후지역), 순록(툰드라기후지역), 랴마나 알파카(안데스산지) 등이 있다. 공통적으로 극한의 기후 환경이며 이러한 기후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가축들이다. 사바나를 오가면서 소를 유목하는 마사이의 예도 있지만 소는 유목으로 사육하기가 어려운 가축이다. 따라서 서남아시아 일대에서는 물을 많이 먹는 소를 키우기가 어렵고 건조에 강한 양이나 낙타를 키워야만 한다. 오죽하면 이슬람에서 돼지고기가 금기 음식이 되었겠는가! 돼지는 물을 많이 먹을 뿐만 아니라 풀을 주식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키우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는 강수량이 풍부하고 여름 기온이 높기 때문에 농업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다. 여름이 고온다우하여 열대성 작물인 벼를 재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우리나라는 벼농사의 북한계선이지만 생산성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벼 외에도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연중 자라는 열대성 작물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불가능한 작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는 곡물 농업이 인구 부양력이 높기 때문에 인류는 농업이 가능한 환경에서는 당연히 목축 보다는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목축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나라에 목자(목동)이라는 직업이 있었을 리가 없다. 나라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말을 키우는 목장이 운영되었으므로 목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일군의 직업을 형성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주는 우리의 목자'라는 표현이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논의 벼를 돌보는 '부지런한 농부'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을까?

  물론 가축이 전혀 사육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농업의 부산물들을 이용하여 소규모로 가축을 키웠다. 소, 닭, 돼지, 개 등등… 많이 키우지는 않았지만 물과 농업 부산물을 많이 먹는 이들 가축을 키우는 것이 강수량이 풍부한 우리나라에서는 가능했던 것이다. 양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가축이었다. 내가 처음 양을 본 것이 대학3학년 정기답사 때 남원 운봉 지리산 자락에 있는 시험사육장에서였으니 내 경험으로 보면 아주 귀한 가축이 분명하다. 지금도 양은 대관령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을 만큼 귀한 동물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사육되어 온 가축 가운데 으뜸은 당연히 소였다. 고기를 얻기 위한 목적보다는 주로 농삿일에 활용하기 위해 키웠던 소는 거의 가족과 같은 대접을 받는 재산목록 1호였다. 그러니 '당신의 어린 양' 보다는 '당신의 어린 송아지'가 더 자연스런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어떤 영화에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처음 봤을 때 아주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왜 하느님은 카인이 바친 곡식보다는 아벨의 양고기를 선택하셨던 것일까? 구하기도 어려운데다 게다가 살아있는 양을 잡아 바치는 것은 격려할 만한 행위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곡식을 바치는 것이 훨씬 '착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양을 제물로 선택하신 하느님은 농민의 아들이었던 어린 내 눈에는 '자애로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고기라야 명절이나 되어야 겨우 맛을 볼 수 있었던 때라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이 곡식보다는 양을 선택한 것은 그곳의 환경에서는 곧 살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이었다. 우리나라였다면 당연히 곡식을 선택하셨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그것이 바로 살 길이었을 테니까.

 

  '주님은 우리를 보살피는 자애로운 농부', '우리는 길을 잃은 어린 송아지', '우리는 농부의 후손'  발칙한 상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