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삶과 지리

地理學=Geography?

Geotopia 2012. 3. 11. 12:24

  "Geography"는 "地理學"으로 번역이 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地理學=Geography"라는 등식이 성립이 된다. 지리학이 학문으로 정립이 된 후 많은 발전을 거듭해 왔고 동서양간의 학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사실상 '지리학'과 'Geography'는 내용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처럼 당연하고 상식적인 사실에 감히 문제를 제기하는가?

 

  地理의 뜻을 직역하면 '땅의 이치'가 된다. 그러므로 '지리학'이란 '땅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 된다. '地理'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도선국사가 風水地理를 체계화한 것이 통일신라말이므로 그 역사적 연원은 그 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그토록 오랫동안 '땅의 이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석기시대 유적은 물가에서 많이 발견이 된다.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물을 얻기 쉬운 것이 첫번째 이유이며 그 외에도 먹을 것을 구하기 쉬운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특히, 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조개무지가 많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원시적인 도구와 장비로 석기시대인들이 육상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돌도끼를 던져서 들판에 뛰어 다니는 동물을 정통으로 맞춰서 최소한 부상을 입히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박찬호나 유현진 정도 되는 원시인이라면 혹시 달리는 짐승의 몸뚱이라도 맞췄겠지만 무딘 돌로 급소를 정통으로 맞춰서 사냥에 성공하기란 사실상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사냥에 성공하기는 커녕 잘못 건드려서 오히려 도망을 다니거나 심지어는 다치고 죽는 일도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땠을까? 위험하기는 육상 동물보다는 덜 했겠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그물이나 낚시 같은 장비들이 발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물고기도 맨손으로 잡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물 속에서 맨몸으로 물고기와 맞짱을 뜨는 것 또한 매우 만만치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사냥감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조개였다. 맛과 영양이 풍부한 조개는 기동성이 떨어져서 잡기가 아주 쉬웠으므로 사실상 사냥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즉, 물가에 살면 최고의 영양식품인 조개를 잡기가 아주 쉬웠기 때문에 인간은 일찍부터 물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서 살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물에 가까운 입지는 인간이 선호하는 입지인데 유리한 농업환경이나 교통편의 등 그 원인은 옛날과는 달라져 있다.

 

  그런데,

  그것이 원시인의 비극이었다. 적어도 이곳 한반도에서는 그랬다. 먹을 것이 풍부한 물가는 반대로 순간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덫이기도 했다.

  한반도는 여름철 강수 집중율이 세계적인 땅이다.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시설을 갖춘 지금도 우리는 해마다 엄청난 집중호우와 이에 따른 홍수 소식을 빠짐없이 듣곤 한다. 년간 내릴 강수량의 1/10 정도가 단 하루에 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흔해 빠진' 일이다. 단 하루에 연 강수량의 1/4, 심지어는 1/2 이상이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물 가'는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지만 원시인들은 물 가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마다 되풀이 되는 홍수는 안타깝게도 수많은 원시인들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해마다 홍수가 되풀이 된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은 개개인이 스스로 깨달은 결과이기 보다는 학습의 효과이다. 원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주기적으로 되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1년'의 개념을 깨달아야 하고 또 '계절'의 개념을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그 전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힘이 있어 물가를 차지한 원시인이 한여름 홍수로 속절없이 떠내려가 버리면 아마도 힘에 눌려 뒷전에 물러나 있던 다른 원시인 가족이 좋아라 그 자리를 차지하고, 또 다시 홍수에 떠내려 가는 일을 1년, 10년, 아니 100년, 1000년을 되풀이 했을 것이다. 수천, 수만년을 거듭하면서 '해(年)'의 개념과 '계절'의 개념을 파악했을 것이고 자연환경의 규칙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규칙을 발견한 이들의 선택은 자명하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물가를 포기하고 안전한 근처 산기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초보적인 형태의 '背山臨水'가 개념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청동기 시대의 유적 가운데는 물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곳이 많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청동기 유적지>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깨달은 중요한 '땅의 이치'였다. '여름에 강력한 집중 호우가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는 이 땅에서는 먹고 살기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집을 물 가에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에 짓는 것이 안전하다'는…

 

  '땅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아지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보다 체계화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산을 남쪽으로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는 위치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겨울이 몹시 추운 것은 물론이고 습기도 많고 농사도 잘 안될 뿐만 아니라 하다 못해 빨래도 잘 안 마른다. 난방시설과 옷가지가 원시적인 환경에서 추운 겨울은 견디기 어려운 정도를 넘어 자칫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남쪽을 바로보는 배산임수형의 입지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땅의 이치' 즉, '地理'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Geography'란 어떤 의미일까?

  우선 'Geo'는 '땅'이란 뜻이니 '地理'의 '地'와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Graphy'는 '이치'라는 뜻일까? 당연히 아니다. 'Computer graphic', 'Graphic design' 등 '그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용례는 주변에 아주 많다. 실제로 'graphy'는 그리스어 'graphien'에서 온 말로 '그리다', 또는 '묘사하다', '기술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Geography'란 '땅을 묘사한다', 또는 '땅에 대해 기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직접적인 뜻만으로 보면 '地理'와 'Geography'는 다른 의미를 가진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물질명사의 경우는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정확한 뜻을 옮기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념의 경우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낱말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개념은 많은 경우 문화적 배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地理'와 'Geography'도 상이한 문화에서 탄생한 약간은 의미가 다른 개념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서양의 지리학은 탄생 때부터 '땅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는 것'이었다.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다가 귀환하던 중 길을 잃고 지중해를 헤매었던 오디세우스의 모험기인 'Oddissey'는 역사서이면서 지리서이다. I.Kant의 '공간의 학문'이라는 고전적인 지리학에 대한 정의를 적용해 보면 '오디세이'는 지중해라는 공간을 다룬 책이다. 그것이 시간이 흘러 역사가 되었지만 지리학은 과거의 공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므로 당연히 지리서에 포함시킬 수 있다. 땅, 특히 미지의 땅에 대한 기술은 지리상의 발견기에 급격하게 증가한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것이나 난파되어 우리나라에 왔다가 탈출한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썼던 것 등등 일반에게 알려진 것만도 상당하다.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H.Lautensach는 1930년대의 조선을 자세하게 기록한 'Korea'라는 책을 1945년에 발표했다. 당시의 열악한 교통과 통신 환경을 고려해 보면 Lautensach의 저작은 놀랍기만 할 뿐이다.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적 서구학문을 받아들인 일본은 우리나라를 본격적으로 침탈하기 훨씬 전인 1895년에 한반도 전역을 샅샅이 측량을 해서 지형도를 제작했다.

 

  왜 그랬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교역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침략 또는 정복에 유리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Geography'의 목적이었다. 'Geography'의 본질은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예를 들면 미국이 우리나라에 쇠고기를 강요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한국을 치밀하고 정확하게 'graphien'했다. 한국의 자연환경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과 같이 값싼 쇠고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잘 'graphien' 하고 있었다. 이런 'graphin'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항상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북한지리'를 공부하는 것이 미국이다. 분단 이후 우리는 북한의 지리에 대해서 거의 무지해진 것을 생각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Geography'속에는 인간 중심의 '이용'의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앞서 살펴본 것 처럼, '地理學' 속에는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 개념이 들어 있다. 결국 '地理學=Geography'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개발과 이용을 강조하고 인간 중심의 인간-환경관계 인식이 발달한 서구의 사고방식과 Geography는 상통하는 측면이 있으며 적응과 조화를 강조하는 환경 중심의 인간-환경관계 인식은 동양적 사고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용'과 '적응'이라는 개념은 지리학의 대표적인 탐구 주제인 '인간-환경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양날개이다. 상반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리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두 개의 개념이 'Geography'와 '地理學'이라는 용어 속에 각기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땅의 이치를 잘 따져서 거기에 적절하게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땅의 특징을 세밀하게 읽어 냄으로써 효과적으로 땅을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리학(Geography)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