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논산

왜 논산일까?, 논산은 어디일까?

Geotopia 2024. 5. 11. 19:29

2024 논산·계룡 신규 교사 연수 지역 답사(II)

▣ 광석마을학교: 광석면사무소

조선후기 광석면은 들이 넓고, 저수지가 많으며, 포구와 장시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1872지방지도(노성현)
'광석의 모두가 꽃이다' 멋진 지역 브랜드다.
면사무소 옥상에서 바라본 논산평야와 동부 산지. 사진 왼쪽 가장 높은 산이 계룡산, 사진 오른쪽 전봇대 뒤쪽 높은 산이 대둔산, 가장 오른쪽 끝 멀리 보이는 산은 미륵산(익산)이다. 사진 왼쪽 2층건물 뒤로는 노성산이 보인다.
면사무소 뒷쪽으로는 금남정맥이 보인다. 이 산줄기는 부여 부소산에서 끝을 맺는다.

▶ 왜 논산(論山)일까?

  '산을 논한다', 하지만 논할 산이 가까이에 없다. 오히려 '들을 논하는 것(論野)'이 더 이 지역에 맞는다. '놀뫼'라는 이름도 자주 쓰인다. '노는(遊) 산'일까?

  논산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조선시대 은진, 노성, 연산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전국의 대부분 지역들도 모두 2~3개 군현을 합쳐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들었는데 이름은 그중에서 한 군현 것을 골라 썼다. 그런데 논산은 이전 군현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전국적으로 봐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충청남도에서는 옛 이름을 아주 잃은 행정구역이 논산만이 아니라 대전과 홍성까지 모두 세 곳이나 된다. 이 또한 아주 특이한 사례다.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은 주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졌고, 이름 역시 특별한 원칙 없이 붙여졌다. 그렇지만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지역과 연관성이 있는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이름을 붙이는 원칙을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추측만 할 뿐이다. 

  논산은  군현의 이름은 아니었지만 일찍부터 지명으로 쓰였다. '논산리'라는 마을 이름으로 쓰였고, '논산'이라는 실제 산 이름으로도 쓰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논산은 '논산'이라는 산 이름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논산'에 대한 기록은 많은 사료에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여지도서」(1757-1765)인데, '논산리'라는 마을 이름과 함께 책에 수록된 지도에는 논산천 가까이에 있는 작은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 여러 문서와 지도에 산 이름, 마을 이름, 포구 이름, 다리 이름 등으로 등장한다. 

「여지도서」의 논산
「1872지방지도」(은진현)에는 논산, 논산리, 논산교가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산 이름은 왜 '논산'이었을까?

  「세종실록지리지」와 「여지도서」는 공통적으로 은진현을 '논이 많은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들이 넓은 만큼 일찍부터 많은 땅이 경지로 쓰이고 있었으며, 물이 풍부한 곳이었으므로 특히 논이 많았던 것이다. '論山'이라는 한자로 문서에 기록되기 전 사람들 사이에서는 '놀뫼', 또는 '논뫼'라는 이름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논뫼'란 '논과 산이 많은 곳', 또는 '논 사이에 있는 작은 동산'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논하다(論)'가 아니고 '논(畓)'이었는데 이것이 한자로 옮겨질 때 음차된 것이다.

'논산'은 어디일까?

  그렇다면 논산은 어디일까? 당연한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논산이 표시된 지도들을 보면 모두 논산천 가까이에 있는 작은 산을 논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논산천 가까이에 있는 산은 모두 세 개이다. 그중 하나는 봉화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 둘은 특별한 이름이 없는 작은 산이다. 셋 모두 '논산'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19세기말까지 '논산'이라는 산이 있었는데도 1915년 지형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1915지형도와 지금의 위성지도. 위성지도에 분홍색 별표가 산이다. 1915지형도에는 같은 위치가 주변에 비해 약간 높은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셋중에 하나가 논산임은 틀림없지만 어느 산을 논산으로 불렀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셋 중에 가장 높은 산인 봉화산(73.8m)은 '논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에 이 산은 '황화봉대'라고 따로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둘 중에 보다 논산천에 가까운 작은 동산은 주변이 모두 저지대로써 도시화로 주변이 모두 주택지로 바뀌었지만 옛날에는 너른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또한 동산에는 지금도 관음사라는 절이 있고 작은 숲이 유지되고 있어서 '논 가운데 산'이 될만한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광석면사무소에서 바라본 논산
관음사 텃밭으로 쓰이고 있는 논산. 숲 너머로 부창동 일대가 얼핏 보인다.

▶ 조선 개국과 천도 계획 : 동여도, 계룡산전도, (신도안 명당도), 

산태극, 수태극과 신도(新都) *「동여도」

 

신도(新都) 천도 계획

▣ 천도계획: 기득권 세력과의 헤게모니 싸움 1392년 7월17일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한달 후인 8월13일 한양으로 천도를 발표한다. 즉위 하자마자 천도를 단행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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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호학파의 본산

 -돈암(遯巖)서원: 세계문화유산

  ·1634년(인조 12) 유생들이 세움

  ·김장생(1548, 명종 3 ~ 1631, 인조 9)

  ·1658(효종 9) 김집(1574, 선조 7 ~ 1656, 효종 7) 추가 배향

  ·1688(숙종 14) 송준길(1606, 선조 39 ~ 1672, 현종 13) 추가 배향

  ·1695(숙종 21) 송시열(1607, 선조 40 ~ 1689, 숙종 15) 추가 배향

  · 1660년(현종 1) 사액

 

 -노강(魯岡)서원

  ·1675(숙종 1)년 김수항(1629, 인조 7 ~ 1689, 숙종 15) 등이 세움

  ·윤황(1571, 선조 4 ~ 1639, 인조 17) 배향

  ·1682(숙종 8) 사액을 받으면서 윤문거(윤황의 아들, 1606, 선조 39 ~ 1672, 현종 13) 추가 배향

  ·1723(경종 3) 윤선거(윤문거의 동생, 1610, 광해군 2~1669, 현종 10), 윤증( 윤선거의 아들,  1629, 인조 7~1714, 숙종 40) 추가 배향

노강서원(광석면 오강리). 한창 복원 공사중이다(2024.4월).
얼마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노강서원 재실. 곧 복원을 시작한다 하니 늦었지만 천만다행이다.

▶회덕과 니산 사이: 노론과 소론 

회덕과 니산 사이에는 금남정맥이 가로놓여 있다. *「팔도분도 호서도」

 

 

회니시비(懷尼是非)와 노소 분당

우암 송시열과 명재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말한다.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살았고 윤증은 니산(尼山)에 살았기 때문에 첫 글자를 따서 '懷尼'라는 이름이 붙었다. 숭명 의리론과 주자 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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