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논산·계룡 신규 교사 연수 지역 답사(I)
▣ 답사 주제 : 다름이 만나 만든 새로움, 논산·계룡
▶ 산지와 평야가 만나는 곳: 동부 산지와 서부 평야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 계룡산
·신라와 백제의 결전지: 황산벌
▶ 호남과 충청의 경계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곳 황산
·견훤, 모악산을 바라보며 잠들다
·경계에서 핀 꽃, 반야산 미륵불
▶ 기득권과 새로운 권력의 충돌
· 계룡산 신도(新都)
▶ 회덕과 니산을 가르는 금남정맥
·노론과 소론의 대립
▶ 내륙과 바다가 만나는 곳: 금강 감조권
·수운과 육상교통의 결절점: 강경포, 논산포
▣ 일정 : 2024. 5. 13(월)
14:00 논산문화원 - 14:30 관촉사 - 15:30 광석마을학교(광석면사무소) - (노강서원) - (관음사/부창동 195-3) - (봉화산/등화동 산2) - 17:00 강경 옥녀봉-19:30마무리
▶참고 지도
답사안내도, 은진현지도, 연산현지도, 노성현지도, 지형도+지질도(충남평야-호남평야), (신도안도), DEM, 대동여지도(동여도), (지질도), 산경도, 대동여지전도, 강경상권변화도
▣ 관촉사
▶ 답사 훑어보기 : 다름의 만남, 논산·계룡
*장소: 삼성각
*자료: 답사 안내도
▶계룡산 장소성의 변화
*자료: 답사안내도
-백제시대 계룡산의 장소성: 나라를 지켜주는 방어선
백제 시대 왕도 웅진의 배후 산지로서 금강과 함께 고구려의 압박으로부터 백제를 지켜주는 방어선이었다. 사비 천도 후에는 신라와의 갈등 관계에서 역시 방어선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계룡산은 점차 군사적 의미를 넘어 정신적 안식처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또한 지방에 있던 산에서 수도를 배경으로 하는 국가적 의미의 산으로 격이 올라가게 되었다. 당나라 張楚金의 「翰苑」에 '國(백제)東有鷄藍山'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鷄藍山'은 바로 '鷄龍山'으로 당시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던 명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 통치권 확립을 위한 국가 기도처
신라가 백제를 점령하고 당나라를 몰아낸 뒤 실질적으로 옛 백제 영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백제 백성들을 위로하여 자신의 통치권에 편입시키기 위해 신라는 백제의 상징이었던 계룡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신라는 전국 명산, 대천을 지정하여 大祀, 中祀, 小祀로 나누어 제를 올렸다. 대사는 경주를 비롯한 3곳에서, 중사는 전국의 5개 명산에서, 그리고 소사는 24개의 산에서 이루어졌다. 계룡산은 이중에서 중사를 올리는 5악에 속했다. 5악은 東岳土唅山(大城郡), 南岳智異山(菁州), 西岳鷄龍山(熊川州), 北岳太白山(奈己郡), 父岳公山(押督郡) 등이었다.
▶ 황산벌 :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
*자료: 지질도, 답사 안내도, 산경도
황산벌은 논산의 동부지역에 발달하는 산지와 서부 평야지대가 만나는 곳이다. 동부산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퇴적암 지대인 옥천층군이 분포하는 곳으로 산의 밀도가 높고 골이 깊으며, 기복이 심하다. 퇴적암은 층 구조여서 수직절리가 발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분이 깊이 침투하기 어렵고, 따라서 심층풍화가 잘 진행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이 일대가 산이 깊고 산의 밀도가 높은 원인이다.
반면에 서부 화강암 지대는 너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이 일대는 대부분 중생대 쥐라기에 관입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층풍화가 잘 진행되는 화강암 지대는 너른 평야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황산벌은 이처럼 매우 대조적인 지질구조를 가진 땅이 만나는 곳이다.
이 산덩어리에는 대둔산을 비롯하여 바랑산, 월성봉, 깃대봉, 함박봉 등 높고 낮은 산들이 포함된다. 산의 밀도가 높은 만큼 계곡도 깊어서 물자원이 풍부하고 숲이 잘 발달한다. 논산천을 막은 탑정저수지는 어지간한 가뭄에도 끄떡없는 매우 좋은 저수지인데 바로 이 산덩어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이 산덩어리가 산의 양쪽 사이의 교류를 방해하는 큰 장벽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형 장벽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옛날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논산에서 대전이나 금산으로 가는 길은 좁은 협곡을 따라 이어져서 심하게 구부러져 있는 곳이 많다. 이것이 이 산덩어리가 신라와 백제의 접경을 이룬 이유이며, 계백이 이 계곡의 끝에 최후 방어선을 만든 이유이다.
▶완산주를 바라보며 잠든 견훤
*자료: 지형도(충남평야-호남평야), 지질도, 은진현지도
936년 9월 일리천(구미시 선산)에서 왕건에게 패한 신검은 후퇴하여 황산까지 후퇴하였다가 결국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백제가 멸망하게 되는데, 황산 일대는 이때도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와 후백제의 접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들 신검에 쫓겨 고려에 항복한 뒤 신검 공격의 선봉에 섰던 견훤은 신검이 항복한 뒤 처형을 당하지 않자 화병이 나서 이곳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무덤이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다. 이곳은 그의 본거지였던 완산주(전주)의 모악산(793m)을 바라보는 자리로 그의 슬픔이 담긴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경계 지대로서 논산의 위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견훤의 묘가 있는 곳은 논산평야가 호남평야로 연결되는 위치로 이 일대는 오늘날 호남권과 충청권의 경계지대이기도 하다.
▶개태사와 석조여래삼존상
*자료: 답사 안내도(위치), 1872지방지도 연산현
-왕건이 개태사를 지은 이유는?
개태사는 관촉사가 세워지기(968년, 광종19) 32년 전인 936년(태조19)에 세워졌다. 32년의 시간 차가 나지만 관촉사와 은진미륵을 이해하는 데 개태사와 개태사 여래삼존상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왕건이 직접 지은 「개태사화엄법회소(開泰寺華嚴法會疏)」 에 따르면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을 완수한 곳이 이곳이며, 후백제의 영토였던 이곳에 절을 세워 통일을 기정 사실화하고, 후백제 주민을 포섭하기 위해서 이곳에 절을 세웠다. 고려군은 936년 일리천(지금의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하여 전세를 굳혔는데, 후퇴하는 신검을 쫓아 이곳에 와서 진을 치고 후백제군과 대치하다가 마침내 신검이 항복을 함으로써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고려군이 진을 친 곳은 마성 (馬城)으로 전하는데 대체로 지금의 개태사 주변으로 추정된다. 개태사(開泰寺)라는 이름은 '국가의 태평을 연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며, 뒷산의 이름도 '부처와 하늘이 보호하여 통일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천호산(天護山)'으로 지었다.
왕건은 절과 함께 여래삼존입상을 세웠다. 거대한 삼존불상은 새로운 지배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큰 불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많은 자본과 노동력이 투입되어 절과 불상을 조성하는 과정은 일종의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 되었으며, 이를 접한 인근의 백제 유민들에게 새로운 권력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삼존불상은 크기 뿐만 아니라 수인(手印)으로도 새로운 권력의 자신감과 위압감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을 위로 든 본존불의 수인은 시무외인 (施無畏印)으로 '두려워 하지 말라'는 뜻이며, 왼손을 펴서 앞으로 내민 오른쪽 협시불의 여원인(與願印)은 '모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다. 새로운 왕조의 자신감을 보여주면서 백제의 유민들을 위무하기 위한 의도를 드러내놓고 보여준다.
▶ 고려초에 전국적으로 큰 불상이 만들어진 이유 신라 말기까지 불상은 대부분 신라의 수도 경주 주변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상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경상도·경기도·충청도·강원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불상이 조성되었다. 이것은 신라시대의 신앙 경향이 귀족 중심적이었던 데 비해 고려시대에는 기층민까지 확산되었다는 것과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진 것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불상을 만든 이들은 새롭게 성장한 지방 호족들로 이들은 세련된 모습의 신라 불상과는 달리 규모가 크고 위압적인 불상을 만들었다. 일반 백성들이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불상은 백성들을 압도하여 그들을 지배권력의 품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왕건이 개태사와 삼존불상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품의 수준이나 형식은 전대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선종(禪宗)의 유행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도 선사(禪師)의 언행을 따르고 사색하는 풍조가 일면서 불상 조각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불상 조각이 퇴보하였고 표현력도 떨어졌다. 불상 조각 쇠퇴의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원의 지나친 비대함, 승려들의 국정에 대한 지나친 관여, 몽고 침입으로 인한 라마교의 전래 등이다. 이로 인해 불교 조각은 새로운 양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고려시대 불상은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표현은 더욱 둔화되고 위축되었다.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신비성이나 통일신라시대에 보이는 이상을 향하는 내재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눈 꼬리가 옆으로 길게 돌아가고 입은 괴상한 모습으로 변하여 세속화된 느낌을 자아내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 충청남도 일대의 고려시대 돌부처 이같이 고려 불상이 보여주는 거대성과 추상성의 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의 개태사 삼존석불입상에서 시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불상은 936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 군대를 격파한 후 조성한 것으로, 전혀 인자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괴상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형식이 이후의 불상에 영향을 주어 각지에 거대 불상이 출현하였다. 이는 각 지역 호족 세력의 대소 및 동향과도 관련이 있다. 거대한 불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했으므로 건물 밖에 많이 세워졌다. 그중 대표적인 불상이 바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비슷한 성격의 불상으로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예산 삽교읍 석조보살입상,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등이 있다. 크기는 대부분 은진미륵보다는 좀 작지만, 몸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한 뒤 차례로 올려 세우는 방법은 같았다. 天蓋(하늘 가리개)를 머리 위에 씌워 눈비를 맞지 않도록 한 것도 이 불상들의 공통점이다. 은진미륵은 거대하면서 입체감 없는 돌기둥 형태, 비례감 없는 간략한 신체 표현 방법, 천개 등 고려 시대 충청도 일대 석불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관촉사와 석조미륵보살 입상
*자료: 지질도
-관촉사를 지은 이유는?
968년(광종19) 혜명이 광종의 명을 받아 세웠다. 수도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왕실의 명으로 절을 지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갖는다. 즉, 왕실 차원에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더불어 관촉사를 세우고 2년이 지난 970년(광종 21)에는 거대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은진미륵으로 일컬어지는 이 불상은 무려 37년이 지난 1006년(목종 9)에 완성되었다. 오랫동안 많은 공력을 들여 불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은진미륵은 관촉사에 속한 불상이지만 오히려 관촉사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은진미륵을 위해 관촉사를 지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따라서 관촉사를 세운 이유는 은진미륵을 조성한 이유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통치권력을 확립하여 전국에 고루 미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은진미륵은 고려초기 불상의 대명사라 할 만하다. 높이가 무려 18m로 우리나라의 돌부처 가운데 가장 크다. 크고 위압적인 불상으로 고려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불교의 힘으로 정복지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은진미륵은 이 일대의 지역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은진미륵을 만든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태사 석불을 만든 이유와 얼추 같다. 다만 불상을 만든 주체가 태조에서 광종으로 바뀐 것만 다를 뿐이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임금이며, 광종은 고려의 기틀을 굳건하게 잡은 임금이다. 광종은 고려의 4개 임금이지만 태조(즉위918-사망943)의 사망과 광종(즉위949-사망975)의 즉위 사이의 시차는 겨우 6년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 정세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광종은 태조의 뜻을 받들어 호족 세력을 누르고 통일 전 후백제와 신라의 유민들을 고려의 백성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거대한 은진미륵은 이러한 광종의 정책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불상이다.
호족을 누르기 위해 엄청난 숙청을 마다하지 않았던 광종이 유화정책으로 돌아선 것은 즉위 19년 후인 968년이다. 바로 관촉사가 지어진 해이다. 광종은 이때 관촉사 뿐만 아니라 전국에 많은 절을 지었다. 불교의 힘으로 숙청의 피비린내를 지우고자 했던 광종의 의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후백제가 멸망한 장소인 은진은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 대규모 불사를 일으킬 이유가 충분했다.
▶ 왜 광종은 이곳에 불상을 만들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견훤의 무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견훤의 무덤은 황산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견훤 묘는 은진현(고려시대의 덕은군)에 있었다. 현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해당된다. 견훤의 무덤이 여기에 위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견훤의 유언에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견훤은 왜 여기에 무덤을 써달라고 했을까? 그것은 견훤 자신이 후백제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건국한 나라를 스스로 멸망케 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후백제의 수도에 무덤을 써달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출생지인 상주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자신이 죽은 곳에서 멀지 않으면서 자신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를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무덤을 써달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남쪽을 바라보면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모악산이 보인다. 모악산 밑에는 그가 유폐되었던 금산사가 있었다. 금산사는 견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어떤 기록에는 금산사를 견훤이 창건한 절이라 할 정도이다. 그렇게 정들었던 금산사와 모악산을 죽어서라도 보고 싶어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입장에서도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적국 왕의 무덤을 고려라는 새로운 제국의 수도 근처에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귀순하여 협조한 견훤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 판단했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견훤의 무덤을 중심으로 후백제의 세력이 뭉칠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광종 대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광종은 왕권 강화책과 더불어 호족 억압책을 시행한 인물이다. 광종은 즉위 초기에는 정관정요(貞觀政要)읽으면서 나름대로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다. 또 여러 절을 창건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광종은 956년(광종 7)부터 왕권의 강화에 착수하였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를 풀어주었다. 이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958년(광종 9)에는 무인공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을 뽑기 위해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또 960년(광종 11)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신하들의 서열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개경을 황도(皇都)라 명명하였다. 황제가 거주하고 있는 수도란 뜻이다. 이후부터 그는 호족들을 숙청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준홍(俊弘)과 왕동(王同) 등이 모반했다 하여 이들을 귀양 보낸 것을 시발로 하여 많은 호족들을 숙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어질고 충성스런 사람을 모함하니,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매 감옥이 항상 가득 차 있었으므로 임시 감옥을 설치하였으며,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줄을 잇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광종은 968년(광종 19)에 이르러서는 홍화사·유암사·삼귀사 등의 절을 짓고 여러 곳에 방생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또 승려 혜거(惠居, ?~974)를 국사(國師)로 삼고 탄문(坦文, 900~975)으로 왕사(王師)를 삼았다.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불교의 힘을 빌어 죄업을 씻고자 함이었다. 정책도 강압정책에서 유화정책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은진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높이는 54척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불상을 세운 것은 이 지역 민심을 무마함과 더불어 고려 조정의 위압적인 형상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양식을 보더라도 개태사의 좌협시보살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개태사 좌협시보살상의 투박하고 둔중한 형태에서 오는 불균형감, 전체적으로 신비함 없이 괴량감(塊量感)만을 강조한 양식, 세속적인 인간화가 더욱 짙고, 도식적이며 추상성까지도 보이는 불상의 특성들이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는 더욱 단순화 내지는 추상화되어 나타났다. 개태사와 마찬가지로 고려 왕실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는 바로 관촉사의 창건과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이 개태사 창건의 의도와 맥을 같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그렇다면 왜 미륵보살상이었을까?
미륵은 석가모니 사후 56억7천만년 뒤에 오는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도솔천에서 하생해 도탄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미래불이다. 신라가 멸망을 향해 치달을 무렵 정권의 불안은 백성의 불안으로 이어졌다. 급기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전국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백성의 삶은 더욱 깊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바로 말법의 시대로 인식되었으며 대중들은 메시아인 미륵이 오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말기에는 미륵신앙이 풍미했다. 궁예가 미륵을 자처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궁예 뿐만 아니라 견훤 역시 미륵과 자신을 연관시켰다. 미륵사지 석탑을 중수했던 것은 그 역시 미륵의 위대한 힘을 통해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할 군주임을 자처하고자 한 것이었다.
왕건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왕건이 죽은 뒤 그의 동상이 만들어졌다. 왕의 실물 형상이 만들어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사후에 만들어졌으므로 왕건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반영된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왕건 동상에는 미륵불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왕건이 미륵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말법시대와도 같았던 후삼국의 혼란을 끝내고 평안의 시대로 이끈 절대적인 인물로 왕건을 부각시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화강암 덩어리 반야산, 돌이 솟아날 수 있는 곳
관촉사에는 돌이 솟아 올라 그 돌로 미륵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돌이 솟아난 이유는 무엇일까? 화강암은 땅속에 들어 있다가 덮고 있던 흙이 쓸려 나가면 겉으로 드러난다. 전설처럼 하루 아침에 솟아 오를 수는 없지만 천천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강암의 속성인 것은 틀림이 없다. 관촉사가 자리잡은 반야산은 전형적인 화강암 잔구(殘丘)이다. 중생대 쥐라기에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또는 고생대 퇴적암을 화강암이 관입하였다. 그 뒤로 오랜 시간 화강암 위를 덮고 있던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또는 고생대 퇴적암이 풍화와 침식을 받아 걷어져 나간 끝에 화강암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미륵불상 주변은 온통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마당에도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의 마애불, 또는 석불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지므로 화강암 지대에 많을 수밖에 없다. 경주에 석불, 또는 돌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많은 이유도 바로 경주 일대에 화강암이 많기 때문이다. 서산, 태안의 마애삼존불 역시 풍부한 화강암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호국불교의 상징 반야산(般若山)
'반야(般若)'는 전형적인 불교식 이름이다. 대승 불교에서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 또는 ‘분별·망상을 떠난 지혜’를 뜻한다. 잘 알려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은 '위대한 반야경의 핵심'으로 뜻풀이를 할 수 있는데, 대승불교 사상을 짧게 간추린 경전이다. 따라서 '반야'라는 이름은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격이 높은 이름이다.
-한 전각에 두 개의 이름, 대광명전과 대웅보전
관촉사 큰불당 이름은 '대광명전(大光明殿)'이다. 법(法)의 화산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그런데 이 전각의 뒷편 현판은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큰 영웅' 즉, 석가모니 본존불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왜 그럴까?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이 양쪽에는 석가모니불과 로사나불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왼쪽이 석가모니불이고 오른쪽이 로사나불이다. 로사나불은 비로자나불의 다른 이름이다. 관촉사는 미륵보살로 유명하지만 중심 전각도 매우 독특하다. 2층으로 된 건물도 독특하고, 모셔져 있는 삼존불도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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