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논산

회니시비(懷尼是非)와 노소 분당

Geotopia 2020. 2. 18. 00:42

  우암 송시열과 명재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말한다.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살았고 윤증은 니산(尼山)에 살았기 때문에 첫 글자를 따서 '懷尼'라는 이름이 붙었다. 숭명 의리론과 주자 무오류설을 추종했던 송시열을 윤증이 비판하면서 논쟁이 촉발되었고 노론과 소론이 분당되는 원인이 되었다.


▣ 배경


 ① 윤선거(윤증의 아버지, 1610~1669)와 송시열(1607~1689)은 김집에게 사사한 동문이다. 그런데 윤선거는 윤휴(1617~1680)와 교류하였는데 남인이었던 윤휴와 교류하는 윤선거에게 송시열이 여러 차례 절교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윤선거가 이를 거절하였다.


 ②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살아나온 사실을 비난하였다.


 ③ 윤선거가 죽자(1669년(현종 10))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여러 자료와 박세채가 지은 행장을 가져다 주고 아버지의 묘갈명을 부탁하였지만 써줄 것이 없다면서 거절하였다. 박세채가 지은 행장이 잘 지어졌으므로 자신이 보탤 것이 없다는 이유를 대고 마지못해 행적만 간단히 정리했을 뿐이었다. 이후 윤증은 4~5년 간 묘갈명의 개찬(改撰)을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송시열은 매번 자구 몇 자만 수정할 분 끝내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옳지 못한 과거 행적(병자호란 때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주자학에 대한 사상적 태도(윤휴와 교류한 점)를 문제삼은 것이다.


  ☞ 송시열과 윤휴의 관계: 송시열도 한때 윤휴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휴가 「讀書記」라는 책을 짓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이 책은 윤휴가 주자의 글에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하고 주를 단 책이었다. 윤휴는 특정한 학파에 속하지 않고 학문을 한 사람이어서 사상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공주에 내려와 살면서 송시열, 윤선거, 윤문거 등 기호학파의 중심인물들과 교유했을 뿐 아니라 남인이었던 권시(權諰)와도 막역하였다. 영남 남인과 학통을 같이 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송시열은 주자의 사상을 절대적이고 완벽한 사상으로 평가하였으므로 이견이나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대상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송시열의 입장에서 윤휴는 사문난적이 분명했다. 송시열은 주자 사상의 절대성을 글로써 증명하고자 하였으나 생전에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그 뜻을 유훈으로 남겨 제자인 권상하를 거쳐 한원진에 이르러「朱子言論同異考」로 완성되었다).

  송시열과 윤휴 사이의 불화는 효종(己亥禮訟, 1659)·효종비(甲寅禮訟, 1674)가 승하하면서 벌어진 예송논쟁(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에서 이견을 드러내면서 심화되었다. 이 문제는 단순한 견해 차이를 넘어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의 문제와 직결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따라서 당시 사대부들이 접하고 있던 모든 사상이 총동원되었던 사상투쟁으로 조선왕조 중반을 넘기면서 사대부 통치체제를 강고하게 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때 윤선거는 송시열과는 달리 윤휴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와 교류를 계속하였다. 이에 송시열이 격분하였고 윤선거는 자신의 생각을 더 이상 표출하지 않음으로써 논쟁이 일단락 되었다.


▣ 전개


 ① 1680(숙종 6년) 庚申換局(허적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사건이 계기가 되어 남인이 대거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한 정변)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실각한 남인을 처벌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송시열은 남인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통한 서인 독재를 주장하였다.

 ② 이듬 해(1681년) 윤증은 「신유의서(辛酉疑書)」를 통해 송시열의 정치적 독단으로 남인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였다면서 송시열을 주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조주의자로 평가하였다.


[니산(논산시 노성면)의 윤증 고택]


▣ 결과


 이에 서인은 윤증을 지지하는 소장파(少論)와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장파(老論)로 갈라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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