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문화 역사

조운의 역사와 태안반도

Geotopia 2023. 3. 30. 12:20

▶고려 성종11년(992) 처음으로 조운이 제도화

  수군에 13倉과 60浦 설치: 개경 이남에 12창, 개경 이북에 1창

고려시대 13조창 *곽호제(2004)

 

▶가을에 거둬들여 창고에 보관했다가 이듬해 2월부터 수송

  조운은 2월에 시작하여 5월까지 이뤄졌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거둬들인 곡식을 창고에 보관했다가 이듬해 2월(양력 3월)부터 수송을 시작했던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바로 조운을 시작하면 거센 북서풍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농사철이 시작되는 5월까지 조운을 마쳤다. 겨울 북서풍은 서해안에서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항해에 악영향을 끼치는 위험 요소일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항해하는 조운로에 역풍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항해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음력 2월까지 서풍계열의 계절풍이 상당히 세게 부는 날이 많다. 이런 날을 만나면 해난 사고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 우왕4년(1378) 조운 중지

  그러나 왜구의 약탈이 너무 심한 나머지 우왕4년에 끝내 조운이 중지되고 말았다. 조운은 왕실의 재정수입이었으므로 조운이 중지되었다는 것은 중앙권력의 약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와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 권문세족이 토지를 장악함으로써 조세 수입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후 조운 체제 정비

  조선 건국과 함께 신진사대부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권문세족이 몰락하고 과전체제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세금이 늘어나고, 이를 잘 수송하기 위한 체제가 마련되어야 했다. 

  조선 초기 삼남의 쌀 생산량은 약 40만석이었고, 이중 조운으로 운반되는 양은 연간 10萬石 정도였다. 대동법 실시 이후로는 그 양이 26萬石 정도로 늘어났다. 조선조 효종때 쓰여진 『반계수록』에 따르면 '平時平年稅米黃金合 三十萬石除 西北兩界留本通外 六道稅 二十六萬餘石遭至京'이라는 기록이 있다.

 

세조가 운하의 타당성을 조사하라고 보낸 인물들

  즉위 초부터 조운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세조는 대군과 고관들을 태안에 파견하여 타당성을 살피도록 하였다. 수취체제가 왕조의 유지에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며, 또한 조정에서 태안반도 일대를 조운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으로 여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때 파견되었던 인물들을 보면 조운과 태안반도의 중요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 

臨瀛大君 李·永膺大君 李琰·永順君 李付·龜城君 李浚·領議政 申叔舟·雲城府院君 朴從愚·仁山君 洪允成·戶曹判書 金國光·都承旨 盧思愼(『世祖實錄』권32, 世祖10년 3월 9일 壬戌).

 

 신숙주의 한탄

嶺上孤城落照邊   고개 위에 외로운 성 낙조 가에 서 있는데
登臨只見海浮天   올라서 바라보니 다만 저 바다 하늘에 떠오르는 듯 보인다
風回島嶼迷驚浪   바람불어 돌아가니 도서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地僻民居生澹煙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오르네
浦掘幾年功未效   浦를 판 지 몇 해에 공을 이루지 못했던고
山來一帶斷猶連   산에서 온 한 줄기 끊겼다가 다시 연했구나
誰能說我通漕策   뉘 능히 나에게 漕運통하는 계책을 말해주려나
但向樽前醉然   다만 술통 앞에서 취하여 망연히 잊고만 싶구나

                                                    保閑齋集』卷9, 七言四韻「次泰安東軒韻」

 

꿩대신 닭, 의항운하

  굴포운하가 실패를 거듭하자 의항운하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의항(蟻項)운하는 안흥량을 지나 맞닥뜨리게 되는 최대 난코스 관장목을 피할 수 있는 운하였다. 즉, 소근만(안흥량과 파도리 사이)과 소근진성 앞 의항리를 연결하는 운하이다. 중종 17년(1522) 三道體察使 高荊山이 제안하였고, 戶曹에서 다시 요청(『中宗實錄』권43, 中宗17년1월8일丙辰)하여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의항운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의항운하는 담당 관리의 부패와 조정의 능력 부재가 만들어낸 졸속 합작품이었다.

 

안면도라도

  두 가지 계획이 모두 실패하자 등장한 안은 안면곶을 자르는 안이었다. 태안반도는 본래 남쪽으로 길게 뻗은 곶이었는데, 안면곶 아랫부분에 자리 잡은 쌀썩은여는 안흥량과 유사할 정도로 빠른 潮流와 1km에 이르는 暗礁地帶, 더구나 濃霧와 계절풍 등 기상의 영향을 받기 쉬운 지역이었다. 안면곶을 잘라 운하를 만들면 최대 고비인 안흥량과 관장목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쌀썩은여만은 피할 수 있었다. 안면운하는 조선 인조 연간에 결행되어 마침내 성공하였다.

굴포운하의 대안들

 

'일부러 배를 부순다'

  생각컨대, 우리나라 뱃길 가운데 위험해서 건너기 어려운 지역은 서남 바닷가의 七山과 安興두어 곳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破船되는 배는 해마다 10여 척이나 되는데, 그 원인으로는 첫째 배를 만드는 제도가 좋지 못했고, 둘째 수령들이 가외의 것을 보태어 실은 때문이며, 셋째 뱃사람들이 일부러 파선시키기 때문인데, 그 중에도 일부러 파선시키는 것이 열에 일여덟 척이나 된다.  (정약용, 『 經世遺表』第1卷地官戶曹第2 敎官之屬). 

  이쯤 된다면 5백여 년 북새통이 엉뚱한 이유로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사가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공사를 하기 싫어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왕실 살림을 잘 아는, 능력있는 왕들이 운하에 관심이 많았던 사실을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왕의 뜻만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