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과 충청우도를 우회한 왜군: 보급로 및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다
임진왜란 때 충절 관련 인물과 유적이 많은 것이 금산의 큰 특징이다. 표충사(조헌 사당), 이치 대첩비(권율장군), 고경명선생비, 칠백의총, 충민공순절비(권종), 의병승장비(영규대사 추모비) 등 임진왜란 관련 인물과 유적이 금산에는 눈에 띄게 많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다는 뜻이다. 영남로, 호남로 등 주요 도로에서 벗어나 있는 오지에 불과했던 금산이 이처럼 주요 전장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나라를 구한 이순신: 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어
당초 敵은 수륙 양면으로 합세하여 서쪽 방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군이 한산도에서 이순신의 수군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완전히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성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전진을 못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보존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군량을 조달하고, 나아가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게 하여 나라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懲毖錄」).
▶ 전주성: 호남 장악을 위한 교두보
왜군은 조령, 추풍령 등을 넘어 한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수군에 패하여 전라도와 충청우도 일대는 장악하지 못했다. 육로로 진격한 육군이 수도 한성을 점령하기는 하였으나 선조는 이미 의주로 몽진을 가버린 상태였다. 평양성까지 진격하기는 했으나 전라도 일대를 점령하지 못했으므로 퇴로가 차단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격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보급로와 퇴로를 확보해야만 장기전을 펼칠 수 있었고, 반드시 호남지역을 장악해야 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에게 전주성 점령 명령을 내린다.
▶ 나라를 구한 곽재우: 의령에서 왜군의 호남 진격을 봉쇄
이때 고바야카와는 한성에 있었는데 창원에 주둔하던 별군 2000 여명을 함안-의령을 거쳐 산청-함양-남원-전주(또는 광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5월26일(음력)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지휘하는 왜군이 의령 남쪽 남강 정암진 건너편에 도착하여 도강을 시도하였다. 정암진은 함안에서 의령을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나루였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왜군의 도강을 방해하고 늪지대로 유인하는 유격작전을 펼쳐 5월27일 왜군을 대파하였다. 이로써 전라도를 침략하고자 했던 왜군의 첫번째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만약 곽재우가 왜군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호남이 공격을 당했을 것이며, 임진왜란의 판도는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 한성에서 영남로로 되돌아 온 왜군
▶ 영동에서 전주로 가는 침입로: 금산을 거쳐야
고바야카와는 하는 수 없이 한성에서 내려와 직접 전주성 공격을 지휘하기로 한다. 고바야카와는 영동으로 내려와 금산으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한성에서 전주성으로 가는 길은 천안-공주-은진-전주로 이어지는 호남로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지만 천안 이남의 대부분은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찰을 줄이기 위해 한성으로 진격할 때 점령한 지역을 되짚어 내려왔다. 왜군은 충주-조령-선산(6월 9일)-김천-추풍령-영동(황간-양산)을 거쳐 6월 21일 순양역에 도착하였다. 순양역은 지금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순양 마을로 금산의 제원역에서 경상도 방향으로 가는 첫 번째 역이었다. 왜군은 이곳에 머물며 주변을 분탕하면서 전주 침입을 준비하였다. 이 침입로는 금산을 거쳐 갈 수밖에 없었는데 순양부터는 기존 점령지를 벗어나는 범위였으므로 이틀간 머물면서 정세를 살피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 금산 함락
▶ 군수 권종: 금강 방어선에서 적과 싸우다 전멸
당시 금산군수는 권종(權悰, 1554~1592)으로 금산군수로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있던 사촌 동생 권율과 서로 연락하여 국난에 같이 대처하기로 약속하였다. 금산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에 도착했지만, 관찰사는 그가 나이가 많고 군무에 익숙하지 못하다 하여, 그의 군사를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사(助防使) 진영에 넘겨버리고 그에게 군량미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겼다. 분을 참지 못한 그는 금산으로 돌아와서 황급히 군사를 모집하여 2백 명도 채 못 되는 병사를 거느리고 금산 동쪽 금강변의 갯터에 진을 쳤다. 제원역 찰방 이극경(李克絅)이 그와 함께 하였다. 이곳은 제원역(금산)-순양역(영동)으로 연결되는 길목으로 방어상 요충이었다. 음력 6월23일 마침내 1만 명의 왜군이 쳐들어 오자 하루 종일 강을 사이에 두고 왜군과 접전을 벌였다. 강 상류에 흙탕물을 만들어 깊이를 알 수 없도록 하여 적의 도강을 저지하는 등 하루를 버텼지만 중과부적으로 다음날(음력 6월24일) 병사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밤 사이 강을 건넌 왜군에게 포위를 당한 것이었다. 그의 서자 권준(權晙)도 함께 싸우다가 죽었다.
*권충민공 순절비(제원면 저곡리) 전사한 후 금산 사람들이 시신을 거두어 강가에 초빈(草殯)하였는데, 그 아들 권현이 전란 중에 왜적의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시신을 거두어 포천의 선산에 장사지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1709년 충민(忠愍)의 시호를 받았다. 고종 15년(1878)에 그가 순절한 저곡리에 순의비가 세워졌다. |
▶ 왜군의 장기 주둔으로 격전지가 된 금산
당시 금산성에는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왜군이 권종 방어선을 격파하고 금산성으로 몰려오자 이치를 넘어 후퇴하였다. 왜군은 손쉽게 금산성을 수중에 넣었다. 권종의 분투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1592년 6월 24일, 금산성을 장악한 왜군은 제6군 군사령부를 금산성에 설치했다.
왜군은 이후 세 달여를 금산에 머물며 전주성 공격을 도모하였다. 고바야카와 부대는 앞서 있었던 정암진 전투를 필두로 이후 벌어진 웅치,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에서 호남으로의 진로가 막히자 금산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군과 의병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집결하게 되었고, 금산이 중요한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전주 방어선 구축
▶ 웅치와 이치: 왜군의 양동작전 저지선
왜군은 전주성 점령 작전에서 양동 작전을 쓰는데, 제1대는 승려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瑗)가 지휘를 하며, 제2대는 고바야카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병력은 약 2000여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남은 병력은 금산성 본대에 배치했다. 7월 초순에 들어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할 준비를 서둘렀다. 별군을 지휘했던 안코쿠지 에케이는 안국사를 창건한 승려인데 절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그는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중간 지점인 의령에서 곽재우 의병부대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패배한 그 별군의 지휘자였다. 곽재우 부대에 패한 그는 방향을 틀어 성주로 올라왔다.그는 스스로 전라감사라 하면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뿌려댔다.
제1대는 금산-무주-용담-진안-전주 루트를, 제2대는 금산-진산-고산-전주 루트로 이동하였다. 제1대의 이동 경로에는 웅치(진안-전주 사이의 고개), 제2대의 이동 경로에는 이치(진산-고산 사이의 고개)라는 험한 고개가 가로막고 있었다. 조선군은 바로 이 두 곳을 지키기로 한다. 웅치는 김제 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이 지키고 있었고, 이치는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지키고 있었다.
▶ 신의 한 수: 고경명 부대의 금산성 공격
당시 조선군의 작전은 우선 이 두 곳에서 1차 방어를 한 뒤, 방어를 실패하게 되면 후퇴하여 전주성에서 모여 최후의 2차 방어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또 일본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구사하는데 바로 북상하던 의병장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대를 금산성으로 진격하게 한 것이다. 만약 금산성이 넘어가게 된다면 일본군은 후퇴하는 진로를 잃어 앞뒤로 조선군의 공세를 받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될 것이라는 점을 노린 전략이었다.
▣ 웅치(熊峙)전투: 전주 방어선 무너져
▶ 웅치: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고개
안코쿠지 에케이는 1만 군사를 이끌고 웅치로 거쳐 전주성으로 진격하려 하였고, 전라도의 관군과 의병 1000명이 웅치를 방어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는 1592년 7월 7일, 왜군이 웅치 골짜기를 에워싸며 시작되었다. 웅치 방어선에는 정담, 방정영, 박석, 황박, 이복남, 변응정, 오정달 등이 모였는데 3개로 방어선을 나누어 구축했다. 제1방어선은 산 아래 의병장 황박과 오정달이, 제2방어선은 산 중턱 나주 판관 이복남이, 제3방어선 산 정상에는 김제 군수 정담이 배치되었다. 음력 7월 7일 안코쿠지 에케이는 군대를 이끌고 총공격하여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정담이 지키는 제3방어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왜군의 희생도 커 날이 저물자 전투를 중단하고 후퇴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 왜군은 병력을 총동원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1선을 맡은 의병 황박군, 관군 오정달군이 저지하다가 밀려나면서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오정달이 전사했다. 2선을 맡은 이복남군이 나섰으나 왜군은 2선까지 제치고 밀고 올라와 고개 마루에 이르렀다. 고개 마루에는 정담 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올라오는 적의 장수를 쏘아 죽였으며, 적이 계속 밀어붙여도 후퇴하지 않고 선두에서 공격을 퍼부어댔다. 날이 저물고 화살이 떨어져 군사가 흩어지기 시작했으나, 그는 끝까지 백병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살이 떨어지자 왜군은 철수를 취소하고 다시 재공격하여 이 과정에서 조선군이 밀리게 되었다. 이복남이 이끄는 나주관군은 안덕원까지 퇴각했고, 피하지 못한 정담과 강운, 박형길 등이 전사했다. 화살이 거의 떨어진 이복남군은 안덕원 계곡에 매복하고 있다가, 골짜기로 들어온 안코쿠지 에케이부대의 1개 진을 몰살시켰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은 전주성으로 후퇴했다.
▶ 왜군 금산성으로 후퇴
웅치 전투의 패배로 조선군 수천명이 사망하였고 전주 방어선이 무너졌다. 전라도로 향하는 일본군의 공세가 본격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웅치에서 관군과 의병이 패하자 전 성균관 정6품을 지냈던 이정란(李廷鸞)이 전주성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수습하고 전라감사 이광도 성을 굳게 지켰다.
그러나 왜군도 이 전투에서 상당한 전력 손실을 보았으므로 전주성으로 바로 진격하지 못하고 신중한 행보를 하였다. 전주성 10리 앞까지 진출했으나 쉽사리 공격을 하지 못하던 중 고경명 부대가 금산성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돌리게 된다. 안코쿠지 에케이는 금산으로 후퇴하는 도중에 웅치에 이르러 전사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주고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주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 이치(梨峙)전투: 조선군의 승리로 왜군의 전주 진격 막아
▶ 권율 작전의 승리: 조총을 무력화 하고 퇴로를 차단
같은 날(7월 8일) 이치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시작되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명과 맞서 권율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전투에 임했다.
권율은 협곡 양쪽에 진지를 만들면서 목책(木柵)과 철로 된 장애물을 설치해서 침입하는 왜군의 기동력을 약화시켰다. 협곡의 높은 곳에서 기동력이 떨어진 적군을 공격하는 유리한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좁은 협곡은 조총을 쓰기에도 불리하였다. 즉, 3열로 서서 앞줄에서 발사하는 사이에 뒷줄에서 장전을 하는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불과 1,500명의 병력으로 방어만으로도 인원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권승경이 지휘하는 기병에게 ‘이치에서 진산쪽으로 8km 떨어진 영정곡에 매복하고 있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치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패퇴하는 적군을 확실하게 때려잡겠다는 복안을 가졌던 것인데, 그의 판단으로 이치대첩이 바로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게 되는 승리를 하게된다.
권율은 비겁한 병사가 눈에 보이면, 그 병사의 벙거지에 칼로 표시를 해두었다가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 병사를 즉결처분하여 군기를 바로 세웠다. 황진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화살을 날렸다. 이때 황진은 적탄에 이마를 맞고 후방으로 후송된다.
▶ 금산성을 공격하는 양동 작전의 승리
이치대첩은 또한 고경명 부대가 금산성을 공격하는 양동 작전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권율의 치밀한 작전도 승리에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의병부대가 금산성 본진을 치지 않았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고경명 부대가 금산성을 공격하면서 웅치를 돌파한 안코쿠지 에케이 부대가 금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와 거의 동시에 이치의 일본군들도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의병군이 금산성으로 온다는 보고를 금산성 본대로부터 받은 것이다. 결국 이치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은 이 전투를 조선 3대전의 하나로 꼽고 있다.
이치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육전에서 처음으로 이룬 승리였다. 그것도 1,500명이라는 적은 병사를 이끌고 승리를 얻어낸 전투였다. 이로써 왜군의 전라도 진격 작전이 무산되었다.
▣ 제1차 금산 전투: 고경명 의병과 곽영 관군의 연합군
▶ 약한 고리, 관군을 공격한 왜군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자 출신 고경명이었다. 고경명은 막내 아들 고인후와 함께 의병 7,000명을 이끌고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8월 7일(음력 7월 1일) 고경명은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연락해 금산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7월 9일, 금산에 거의 접근한 고경명의 의병군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합류하여 금산성 10리 밖의 눈벌(臥蔭坪)에 진을 쳤다. 8월16일(음력 7월 10일), 의병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날, 위기에 처한 금산성을 구하기 위해 왜군 제6군 소속 병력 1,500 여명이 전라도로 오려다가 경상도 거창의 우척현(거창-지례 사이의 고개)에 매복해 있던 의병장 김면에 의해 막혀 전라도 진입에 실패한다.
고경명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합류해 금산성을 공격했다. 고경명은 주위에 불을 지르고 비격진천뢰와 30명의 특공조까지 편성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저녁이 되어 첫 전투가 끝나고 곽영이 철수를 하려고 했으나 고경명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다음 날 다시 치열한 공방전을 벌어졌다. 고경명이 기병 100 여기를 이끌고 서문을 공격했는데 성안에 있던 일본군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돌격해 관군을 집중 공격했다. 곽영의 관군이 싸울 뜻이 없는 것을 간파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곽영의 진을 공격한 것이다. 곽영이 후퇴하고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들까지 무너졌고 고경명의 부하 유팽로와 안영이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전투로 고경명과 둘째 아들 고인후가 전사하고 장남 고종후가 가까스로 살아서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고 후퇴한다.(훗날 고종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끝까지 전투에 임하다 전사한다.)
▶ 졌지만 이긴 전투
제1차 금산전투에서 조선군이 졌지만 이 싸움은 큰 의미를 갖는 싸움이었다. 적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전주성 코앞까지 진격했던 안코쿠지 에케이 부대가 군대를 돌렸으며, 이치전투에서도 권율 부대가 크게 이기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고경명과 자손들, 그리고 휘하 의병들의 의로운 죽음이 알려지자 수많은 백성들이 의병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조선군이 왜군과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 제2차 금산 전투
▶ 관군과 분리된 의병
고경명이 전사한 뒤에도 수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금산을 탈환하려 했지만 왜군은 금산을 탈환하려 북진하려던 보성과 남평의 군대를 공격해 남평 현감 한순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꺾지 않았다. 이에 청주성을 탈환했던 의병장 조헌이 나서 1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변사 윤국형(초명 윤선각 *충청도관찰사로 용인전투에 참전했다가 대패하여 파직당했다가 복직하였다)은 오히려 조헌 부대의 진격을 방해하여 군사가 7백여 명으로 줄었다. 권율과 공주목사 허욱은 함께 군사를 일으키는데 동의했지만 공격 날짜를 미루자고 하였고, 그 마저도 서로 연락이 잘 되지 않아 결국 조헌은 7백여 명의 의병만을 이끌고 홀로 금산성 공격에 나섰다. 다행히 청주성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영규 대사의 승병 600명이 합류했지만, 군사는 모두 합쳐도 1,300명에 불과하였다.
▶ 중과부적으로 전멸한 조헌 의병부대와 영규 승병부대
8월 18일(음력 7월 12일), 조헌이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들과 승려 영규가 이끄는 600 여명의 승군들이 금산성을 공격하였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은 조헌의 부대가 소수이며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자 퇴로를 끊고 금산성 밖 평야지대에서 포위를 시도했다. 화살이 떨어지고 왜군과 육박전을 벌여야 할 상황이 오게 되자 주변 사람들이 조헌에게 피신하라고 말했으나, 조헌은 이를 거절하고 직접 북을 치며 독전을 하다가 아들인 조극관, 영규 대사의 승군을 비롯 한 전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병과 승병 모두 전사하고 일본군 역시 피해도 막대해 시체를 옮기는 데 3일이 걸렸다. 후에 700명의 시신들을 모아 무덤을 만들어 '칠백의총'이 만들어졌다.
▶ 제3차 금산 전투: 변응정 부대의 결사전
해남현감 변응정은 웅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더디 나아 조헌 부대에 합류하지 못한 것을 한탄 하다가 조헌 부대가 전멸한 뒤 9일이 지난 8월27일 금산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변응정 부대 역시 중과부적으로 금산성 앞 소산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 9월16일, 왜군 옥천으로 철수
금산에 주둔하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 제6군단은 결국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에 이어 고경명의 의병과 조헌과 영규의 연합군과의 전투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음력 9월 7일 무주의 군사를 불러들이고 음력 9월 16일 옥천으로 철수했다. 제6군의 퇴각은 고결한 희생을 한 의병들과 관군들 덕이었다.
1592년 7월~8월 금산 일대에서 두 달여에 걸쳐 벌어졌던 전투는 5천여 명에 이르는 관군과 의병이 전사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왜군이 결국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한 것이다. 만약 호남이 왜군에 정복을 당했다면 전쟁은 훨씬 더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조총으로 무장한 무서운 침략자였던 왜군이 충분히 싸워볼만 한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이순신의 해군 뿐만 아니라 육군이 행주산성 등에서 왜군을 대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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