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금산: 인삼과 임진왜란 전투

금산 인삼

Geotopia 2022. 4. 21. 13:36

언제부터 금산에서 인삼이 재배되었을까?

 

  ▶ 1500년 전?

 

  설화에 따르면 1500년 전부터 인삼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중국의 陶弘景(452~536)이 집주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1500여년 전 백제에서 인삼이 재배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김순기, 1992). 

 

 

인삼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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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로부터 품질을 인정받았던 금산인삼

 

  인삼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1145)>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중국에서는 삼이 난 지역에 따라 고(구)려 삼, 백제삼, 신라삼으로 구별하였다'고 적었다. 또한 '북쪽의 고려삼은 크고 물렁하여 백제나 신라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이 지은 <본초강목(1596)>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인삼 중에서 백제의 것을 중하게 친다. 모양은 가늘고 단단하다. 다음으로 고려의 것을 친다. 고려는 곧 요동을 가리킨다. 고려삼은 모양이 크고 연해서 백제삼에 미치지 못한다. 인삼은 고려, 백제의 것을 많이 쓴다. 신라에서 가져온 인삼은 손과 다리가 있어 마치 인형과 같다. 백제에서 나는 삼은 희고 단단하며 둥글다'고 쓰여 있다(곽이성, 2019).  <삼국사기>나 <본초강목>의 기술을 보면 백제삼을 가장 품질이 좋은 것으로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개성 인삼은 直蔘, 금산 인삼은 曲蔘, 풍기 인삼은 半曲蔘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각기 고(구)려, 백제, 신라와 상응한다. 백제삼은 곧 금산인삼이니 금산인삼의 품질이 예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이름이 나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금산 인삼'이라고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것은 아주 가까운 옛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널리 재배되었다는 것은 상품으로 판매하기 위해서 생산했다는 뜻이다. 즉, 인삼은 약용 작물이므로 상품 경제가 발달하기 전에는 널리 재배되기 어려웠다. 다만 야생 산삼의 씨를 받아 재배하는 기술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을 수는 있다. 

  실제로 조선 전기 기록(<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은 물론 조선 후기 기록인 <임원십육지>(19세기 초)에도 금산에서 인삼이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적어도 조선 후기까지 '금산 인삼'이라는 말은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진산이 조선 시대에 전국적으로 꽤 알려진 인삼 산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임원십육지> 등에는 진산을 인삼 산지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진산군은 금산군과 인접한 군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금산군에 통합되었다.

  전국적으로 금산 인삼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23년에 '금산 인삼 조합'이 설립된 이후로 볼 수 있다. 그전까지는 개성인삼이 고려인삼의 대명사였다. 조선후기부터 개성에서는 상업 자본이 개입하여 대규모 재배가 이뤄졌다. 품질이 백제삼에 미치지 못했던 고려삼 생산지역이었으나 개성 상인들의 자본력이 개성을 고려인삼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1910년에 개성 인삼조합이 설립되어 생산과 판매가 더욱 조직화되었다. 

 

  ▶ 남북분단으로 몸값이 올라간 금산인삼

 

  금산 인삼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남북 분단으로 개성 인삼이 들어올 수 없게 되면서부터다. 금산인삼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0대부터 1974년 사이에 한국산 인삼의 대명사가 되어 국내외 인삼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 시피하였다. 

  풍기 인삼이 그 뒤를 이었는데 풍기 인삼 역시 남북 분단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풍기는 금산, 화순과 함께 인삼 시배지(始培地)로 꼽히는데(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인삼 때문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인삼 재배법을 개발해 보급했다는 설이 전한다) , 한국전쟁 후인 1956년에야 풍기 인삼 조합이 설립되어 생산과 판매가 조직화되었다. 

  한편, 1972년 인삼규제법이 제정됨으로써 금산 인삼 조합은 독자적인 검수 및 상표사용권을 잃었다.

 

진악산 북사면에 자리 잡은 開蔘터(남이면 성곡리)

 

금산은 좋은 인삼이 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고 있을까?

 

  ▶ 까다로와서 귀하다

 

  인삼은 조건이 꽤 까다로운 환경에서 자란다. 햇볕(온도가 높을 때)에 약하고 병충해가 많다. 지나치게 건조해도 좋지 않지만 특히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습한 날씨가 되면 병에 잘 걸린다. 우리나라는 긴 장마가 있고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는 점이 인삼이 자라는데 좋지 않은 조건이다. 지나치게 습하면 뿌리가 붉게 변하거나(적변증) 뿌리가 썪는 병(근부병)에 걸린다. 따라서 여름 습기를 잘 이길 수 있는 곳이 인삼 재배에 적합한 곳이 된다. 인삼포를 만들때는 배수 시설 등을 잘 정비하여 인위적으로 습기를 조절할 수 있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조건을 잘 갖추어야 한다. 

  여름철 더위에도 약하다. 30℃ 이상의 날이 7일 이상 계속되면 잎이 떨어지고 말라 죽는다. 

  토질은 물빠짐이 좋은 사질양토가 전통적으로 좋은 흙으로 꼽혔다. 하지만 최근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양토나 식양토가 더 좋은 흙으로 꼽히고 있다. 

  겨울 추위에는 잘 견딘다. 빙하기에 베링해를 건널 정도였으므로 유전적으로 추위에는 강하다. 빙하기 혹독한 환경에 견디면서 세계 다른 지역의 삼과는 달리 4배체의 유전자를 갖게 되었다고 하며, 그래서 한서의 차가 큰 우리나라 환경에서 더 좋은 품질의 인삼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 금산: 산인 듯, 아닌 듯한 화강암 지역

 

  그렇다면 금산은 인삼이 자생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까? 좋은 조건을 꼽아보면 우선 화강암 지대가 넓게 발달한다는 점이다. 화강암 풍화토는 입자가 굵은 사질양토를 만들어 내므로 물빠짐이 좋다. 하지만 화강암 지대는 대부분 평지이거나 반대로 바위산이어서 인삼 재배에 꼭 적합하다고 볼 수는 없다. 평지는 대부분 식량작물을 재배하는 농경지로 쓰였다. 인삼을 상품작물로 재배하기 전까지는 멀쩡한 평지에 인삼을 재배하지 않았다. 또한 화강암 바위산은 생태적 잠재력이 떨어진다. 숲이 우거져야 그늘을 잘 만들고, 낙엽으로 잘 덮여 있어야 봄철 건조에 잘 견딜 수 있지만 화강암 산지는 식생이 풍부하지 못한 편이다. 

  산지의 북사면이 인삼이 자라는데 유리하다. 봄철 건조에 견디기 쉽고 여름 햇빛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지 중심부에 자리잡은 금산은 여러 방향의 구조선이 교차하여 산지가 밀도 높게 발달한다. 접근이 가능산 북사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산인 듯, 아닌 듯, 즉 취락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산지가 발달해야 한다. 태백산지 같은 심산유곡은 생육조건이 좋은 곳이 많겠지만 접근이 어렵다. 금산은 접근이 비교적 쉬운 산지가 많다.  

  하지만 금산이 유난히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화강암 지대가 발달하고, 북사면이며, 산인 듯, 아닌 듯한 조건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은 전국에 많다. 따라서 자연적 조건보다는 전설 같은 약간의 우연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추측을 해보는 이유는 개성 인삼 때문이다. 개성은 상업 자본이 개입하여 대규모 재배를 하면서 유명해지기 전까지 인삼으로 유명했던 지역이 아니었다. 더욱이 생산된 인삼의 품질도 백제인삼에 비해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인문적 조건(자본 및 시장)이 갖춰지면서 빠르게 생산량이 늘어나 고려 인삼의 대표가 되었다. 개성에 비한다면 금산(조선시대 진산)은 예로부터 좋은 품질의 인삼이 나던 곳이었으므로 자연적 조건은 좀더 좋았다고 볼 수 있다.

 

 고대부터 영약으로 알려졌던 고려인삼

 

  ▶ 만병통치약 Panax

 

  인삼은 4천~5천년 전부터 약용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재배된 인삼이 아니라 자연산 산삼이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서시(徐示)를 삼신산(금강산, 지리산, 한라산)보낸 것이 대략 서기 전 220년 경이다. 아마도 당시에 조선의 인삼이 영약으로 중국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神農本草經>이 처음으로 저술된 때는 중국 제나라 무제 때(BC 83-96)로 이는 인삼의 효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칠효설(七效說)에 따르면 인삼은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깝다. 인삼의 학명이 Panax Ginseng인 것도 재미있다. Panax는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양에 인삼이 알려질 때 그 효능이 높이 평가되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자료: 곽이성(2019)

 

▶ 유전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북아메리카 삼: 빙하기 때 베링해를 건넜다

 

  '人蔘'은 '사람 모양을 닮은 뿌리'라는 뜻으로 본래는 고려인삼에만 적용되는 이름이었다(곽이성, 2019).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Panax속 식물은 5종이다. 고려인삼 외에 중국의 三七參(田七參), 일본의 竹節參, 베트남의 越南參, 북아메리카의 西洋參(花旗參)인데 이 가운데 한국산 만이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본래 의미로 본다면 '人蔘'은 곧 '高麗人蔘'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가운데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북아메리카삼이라는 사실이다. 북아메리카삼은 4배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고려인삼과 같은 것이다. 나머지 종들은 모두 2배체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훨씬 가까운 아시아 지역의 삼보다 가장 먼 곳, 그것도 바다 건너에 있는 북아메리카 삼이 유전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유는 무엇일까? 빙하기 때 아시아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이 연결되었을 때 알래스카를 거쳐 넘어갔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동 과정과 같아서 흥미롭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우리 한민족과 같은 북방계 몽골인종이라는 사실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5개 종이 모두 히말라야 일대에서 기원하였으며, 빙하기 때 비교적 따뜻한 지역인 베트남, 일본, 중국으로 전파된 반면, 두 종은 공통적으로 빙하기 혹독한 환경을 견디고 살아남은 종이다.  

  그러나 1만2천년 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두 대륙이 분리되었고 이후 다른 진화과정을 거쳐서 오늘날과 같이 다른 종이 되었다. 

 

전세계 주요 Panax속 식물의 분포 *자료: 한국인삼연구원(1993)

 

조선시대 영남에서 시작된 家蔘 재배 

 

고려인삼 재배법에 관한 기록 *자료: 곽이성(2019)

 

  ▶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했을까?

 

  본격적으로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는 뚜렷하지 않다. 여말선초설, 조선중기설이 있고, 지역으로는 금산, 풍기, 화순이 거론되고 있다. 원나라의 조공 요구가 심해지면서 그 요구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여말선초설이며, 중국과의 교역 및 조공으로 영조조에 이르러 자연산 삼이 거의 사라지게 되자 이후로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조선중기설이다. 

  그런데 <본초강목>(1578)에 인삼 재배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 이전에 이미 재배법이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즉, 한반도에서 개발된 농법이 중국으로 건너가 정착하기까지는 적어도 100년 이상이 걸렸다고 보면 대략 고려말에는 재배법이 정립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후 1700년 초반에 家蔘 수준으로 널리 퍼졌고, 1800년대 초반에 재배법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 중엽, 인삼 재배 본격화

 

  조선 정부는 인삼의 희귀성과 약효를 인식하고 국가에서 필요한 인삼을 공인(貢人)을 통해 조달하였다. 인삼은 왕실, 충훈부(忠勳府)·의정부(議政府)·병영(兵營)·중추부(中樞府)·종친부(宗親府)·호조(戶曹) 등 정부 관청에서 의약 재료로 사용되었으며, 중국에 대한 조공품(朝貢品)과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사절단의 경비, 일본과 대마도에 보내는 하사품과 무역 품목 등에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17세기 중반 조선의 인삼은 국제 무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인삼을 구입하겠다는 요구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삼의 대외 수출은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결국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자연삼(산삼)이 끊어지고, 삼의 인공 재배가 폭넓게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인삼은) 근래 수십 년 전부터 산에서 나는 것이 점차 고갈되어 집에서 재배하는 방법이 영남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퍼졌는데 그것을 가삼(家蔘)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우리역사넷).

 

  ▶인삼 재배 전국으로 확산: 부농 중심

 

  이는 인공 재배를 통해 얻은 인삼을 가삼이라 불렀고, 가삼 생산은 영남 지역에서 처음 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가삼은 중국의 거대한 인삼 시장과 결부되어 크나큰 부를 형성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빈농이든 부농이든 가삼을 재배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삼은 생산에서 수확까지 많은 기간을 필요로 하였다. 때문에 빈농은 인삼을 재배하기 위한 자본 여력이 없었고, 일부 부농들이 자본을 투자하여 인삼을 재배하였다. 그리하여 인삼 재배는 경상도와 전라도뿐만 아니라 경기도·황해도·강원도 등지로 급격히 확산되어 나갔다(우리역사넷).

 

  ▶개성 인삼: 상업 자본과 결합하여 대규모화

 

  조선 후기 인삼 재배에 가장 적극적이고 대규모로 활동한 사람들은 개성 상인이었다. 개성은 토양과 기후가 인삼 재배에 적합하여 19세기 말에는 개성 지방에 살고 있는 농민과 상인들이 1,000여 간 이상 규모의 삼포(蔘圃)를 설치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개성 상인들은 누구보다도 상인으로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막대한 상업 자본과 조직력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인삼 재배 이전부터 인삼의 판매처인 동래 상인이나 역관(譯官), 경상(京商)과 안주(安州) 상인, 강계의 삼상(蔘商) 등과 폭넓은 교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삼의 대량 생산에 뛰어들 수 있었다.

  개성 상인들은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는 증포소(蒸包所)를 개성에 설치하고 상품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의주 상인은 포삼 별장(包蔘別將)을, 개성 상인은 포삼 주인(包蔘主人)을 각각 담당하여 청나라로의 홍삼 수출권을 장악하였다. 포삼 주인이란 청나라로 수출하는 인삼의 조달을 담당한 사람으로 인삼 재배에서 매매까지 전권을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상권의 지배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홍삼의 밀조와 밀수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밀매에 뛰어든 것은 그만큼 큰 이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육로를 통한 밀수를 강력히 규제하면 밀무역상들은 심지어 해상의 선박에서 만나 밀매할 정도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막대한 상업 자본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는 점차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어 갔다(우리역사넷).

 

▣ 인삼 상식

▶삼(蔘)은 우리말 '심'에서 시작되었다

  옛부터 산삼을 캐는 사람을 '심마니'라고 불렀고 산삼을 발견하면 '심봤다!'를 외쳤다. 여기서 '심'은 '蔘'을 뜻하는데 '蔘'은 한자어지만 우리말 '심'에서 기원하여 한자어로 바뀌었다. 중국 문헌에는 ‘參’ , ‘蔘’ , ‘寑’ , ‘寖’ , ‘侵’ , ‘浸’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인삼이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우리 민족의 고유어인 ‘심’ 을 표기할 한자를 찾는 과정에서 발음이 비슷한 위의 6개의 한자가 섞여 쓰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성종 20년(1489) 윤호, 임원준, 허종이 간단하게 쓸 수 있는 약방문을 지어 만든 <救急簡易方諺解>에는 '人蔘'으로 적고 '심'으로 언해하였다. 이 책은 '심'이 기록된 최초의 책이다(옥순종, 2009).
  '심(한자표기 蔘)'은 중국으로 넘어가 '사람 모양의 심'이라는 뜻의  '人參'이 되었고, 일본으로 넘어가서는 '고려 당근'이라는 뜻의 '高麗人參(こうらいニンジン)'이 되었다.(곽이성, 2019)
▶중·일과 다른 한자 표기: 參과 蔘

  우리나라에서는 인삼을 한자로 표기할 때 ‘人蔘’이라고 쓴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人參’이라고 쓰고 있다. 왜 같은 동양의 한자 문화권인데 글자가 다를까?
  '參'은 별자리 중 서쪽 하늘을 관장하는 '參星' 즉 오리온을 가리키며, 삼성은 나라의 충신, 집안의 효자를 뜻한다. 따라서 '人參'은 '사람의 모양을 닮은 최고의 영물'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 ‘參’자를 행정 용어나 관직 용어로 사용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대궐에서 신하들이 왕을 알현하는 것을 참알(參謁)이라 하였고, 의정부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참찬(參贊)이라 불렀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인삼의 ‘參’ 자 위에 초두머리(艸)를 더하여 '蔘'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해방전까지 '人蔘'과 '人參'은 '고려인삼'의 고유 표기와 '기타 국가의 생산품'이라는 의미로 구분되어 쓰였다. 지금은 '人蔘'으로 대부분 통일되었다(우리역사넷).
▶Ginseng의 어원은?

  린네(Carl von Linné)는 삼의 학명을 Panax Quinquefolium로 지었다(1754년). Panax는 '만병통치약'을 뜻하고 Quinquefolium은 '잎 다섯 개'를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인삼과는 다른 종으로 캐나다 남부에서 자라는 서양삼이다.
  Nees von Fsenbeck(독)은 인삼의 학명을 Panax Shinseng var. coraiensis Nees(1833)로 붙였다. 니스는 아시아 인삼을 린네가 분류한 캐나다삼과는 다른 종으로 보았다. 바로 coraiensis가 고려를 뜻한다. Shinseng은 옛날 중국에서 인삼을 뜻하던 낱말 祥參의 중국어 발음 Xiangshen에서 비롯된 것이다. Shinseng이 나중에 Ginseng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한다.
  그후 메이어(Carl Anton von Meyer, 러)가 고려인삼에 Panax Ginseng C.A.Meyer(1843년)라는 학명을 붙임으로써 학명이 확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으나 중국어에 기원한 학명이 만들어진 이유는 인삼이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뒤 유럽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곽이성, 2019).

 

▣ 참고 자료

*곽이성, 2019, 고려인삼의 유래 및 효능의 서지학적 고찰, 인삼문화(1), 고려인삼학회.

*김순기, 1992, 금산 인삼재배의 역사적 고찰, 고려인삼학회지 16-2. 고려인삼학회.

*농촌진흥청, 2018, 농업기술 길잡이 103-인삼, 농촌진흥청.

*옥순종, 2009, 고려 인삼의 역사, 식품문화 한 맛 한 얼 2-3, 한국식품연구원.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만병통치로 알려진 산삼은 금수품이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16_0040_0010_0020)

*한국인삼연구원, 1993, 고려인삼. 천일인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