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삶과 지리

사민필지: 지리학이 중요한 이유

Geotopia 2019. 12. 6. 13:52

▣ 사민필지: 선비와 백성이 꼭 알아야 할 것

  「사민필지(士民必知)」는 1891년 육영공원의 미국인 교사였던 헐버트(Hulbert.H.B)가 지은 세계지리 교과서이다. '선비와 백성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라는 뜻의 이 책은 제목부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인이 세계지리를 '반드시 알아야 할 것'으로 정의했다는 것은 당시 미국이 세계지리 정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말해준다.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 당시 미국과 유럽 각국이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고 어떻게 세계 여러 지역의 지리적 특징을 가르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있다.

  1891년 당시 우리나라는 쇄국과 개방을 넘나들면서 갈등하고 있었다. 수많은 민중들이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은 끝내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고루한 성리학과 당리당략에 빠져 세계사적 변화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실학자들은 '北學'을 주장하였고 근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이는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실학자들의 주장이 정책에 조금이라도 반영이 되었다면 우리는 식민지 역사를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민필지」서문만을 통해서도 이 책이 담고 있는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서양 여러 나라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서문은 길지 않지만 여러가지 생각할 것들을 제공하는데 당시 서양 국가들이 갖고 있던 글로벌 스케일의 사고와 세계지리에 대한 인식, 그리고 더불어 한글의 우수성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1891년, 글로벌 스케일의 사고

   100년도 더 전이었던 19세기 후반에 헐버트가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미국인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이미 사고의 범위를 세계적 스케일로 확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쓴 글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진술들이 「사민필지」에는 자주 등장한다.

'세계 모든 나라가 서로 조약을 맺고 사람과 문화와 풍속이 서로 통하는 것이 마치 한 집안과 같다'

  '마치 한 집안과 같다'는 표현은 우리가 오늘날 흔히 쓰고 있는 'global village'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100년도 더 전에 이미 서양 여러 나라들은 세계적 스케일의 사고를 하고 있었다니 새삼 놀랍다. 우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 19세기 유럽에서는 세계지리가 필수였다

  또한 당시 유럽 여러 나라에는 세계지리 교육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칠팔세가 되면 먼저 전세계 여러나라의 지도와 풍속을 가르친 후에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천하의 산천수륙과 각국 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19세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제국주의 침탈에 몰두하고 있었다. 세계지리는 그 기초가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면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지리학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과거에는 물리적인 '침략의 도구'로 지리학이 쓰였다면 오늘날에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지만 쓸모있는 정보들은 보다 전문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정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 지리학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가적 수준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활용하는 것은 고사하고 수능 선택과목 선택자 수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전공자로서 갖고 있는 편협한 이기주의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리학의 눈으로 다른 나라를 바로볼 때 마다 느끼는 사실이다. '他山之石'과 '龜鑑'은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지리학의 눈은 그것을 보다 가려볼 수 있는 '정선된 눈'이라고 믿는다.

▣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본 이방인

  서문에 담겨있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은 헐버트의 한글 예찬이다.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널리 알 수가 없지만 조선 언문은 본국의 글일 뿐만 아니라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함께 보고 알기 쉽다는 생각이다'

  헐버트는 '선비와 백성, 남녀노소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자여서 한자보다 훨씬 좋다'고 한글을 평가하고 있다.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뛰어난 실용성을 갖춘 글자였음을 오래전 이방인이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또한 그는 외국인이었음에도 민족적 자긍심 차원에서 한글을 칭송하고 있다.

 

▣ 「사민필지」 서문

  천하형세가 예와 지금이 크게 달라 예전에는 각국이 각각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풍속만을 따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세계 모든 나라가 서로 조약을 맺고 사람과 문화와 풍속이 서로 통하는 것이 마치 한 집안과 같다. 이는 지금 천하형세에서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 예전처럼 자기 글과 사적만 공부함으로서는 천하 각국 퐁속을 알 수 없으며 이를 모르면서 서로 교류를 하다보면 마땅치 않음은 물론 마음을 통하는데 장해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장해가 있다면 상호간의 우호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예전에 공부하던 것에 더하여 각국의 이름, 지방, 면적, 산천, 생산물, 국경과 세력 범위, 군대와 풍속, 학문과 교육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칠팔세가 되면 먼저 전세계 여러나라의 지도와 풍속을 가르친 후에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천하의 산천수륙과 각국 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조선도 꼭 이렇게 한 후에야 외국 교류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또한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널리 알 수가 없지만 조선 언문은 본국의 글일 뿐만 아니라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함께 보고 알기 쉽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슬프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훨씬 쓸모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그래서 외국인이면서 우매한 사람이 조선말과 문법에 능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누르고 특별히 언문으로 천하 각국의 지도와 보고 들은 사실을 대략 기록하고자 한다. 먼저 땅덩이와 기후를 논하고 이어서 각국의 특징을 논하려 하니 자세히 보면 각국의 특징을 대략을 알 것이며 또한 외국과의 교류에서 매우 긴요하게 쓰일 수 있을 듯하니 잘못된 기술과 문장의 서툼은 용서하시고 내용만을 자세히 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조선육영공원교사 헐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