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태안

태안 백화산 마애삼존불

Geotopia 2018. 10. 15. 12:19

태안 마애삼존불: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초


  태안 마애삼존불은 태안읍의 진산(鎭山)이라고 할 수 있는 백화산(285m) 중턱에 있는 마애불이다. 높이 394cm, 폭 545cm의 거대한 암벽에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불상으로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보다 앞서 조성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태안마애불의 이러한 역사적 가치가 뒤늦게 인정되어 2004년에 국보(제307호)로 지정되었다.


부처가 둘, 보살이 하나


  태안 마애불의 가장 큰 특징은 가운데에 보살이 있고 양쪽에 본존불(왼쪽에 석가여래, 오른쪽에 약사여래)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불상 배치 형태는 가운데 본존불이 있고 양쪽에 협시보살이 있는 모양이다. 협시보살(薩)은 본존불(本尊佛)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이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불을,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을,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약사여래를 보좌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삼존불은 가운데 있는 본존불을 크게 조성한다. 태안 마애불은 본존불이 양쪽에 있으므로 양쪽의 부처가 가운데의 보살에 비해 더 크다.

 

[태안 마애불 안내 표지판]



[태안 마애불(국보 제307호]]

 

화강암: 마애불 조성에 적합한 암석


  우리나라의 마애불, 또는 석불은 거의 대부분 화강암을 활용하여 조성한다. 그래서 화강암(중생대 쥬라기 대보화강암)이 풍부한 충남 서부지역에는 마애불과 석불이 많다.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을 비롯하여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용봉산 마애불 등이 유명하다. 경주 남산도 마애불과 석불로 유명한 곳인데 역시 화강암(중생대 백악기 불국사 화강암) 산지로 유명하다.

  심성암인 화강암은 층리, 또는 편리가 발달하지 않기 때문에 단단하면서도 불상을 조성했을 때 표면이 균질한 불상을 만들 수 있다. 반면에 대부분 층리나 편리가 발달하는 퇴적암이나 변성암들은 석불을 조성하면 줄무늬 같은 것이 노출되기 때문에 불상의 재료로 적합하지 않다.

[전북 고창 선운산 마애불. 백악기 화산암에 조성했다]


  태안반도는 한반도 최대의 화강암 분포 지역의 서쪽 끝에 해당한다. 이 화강암 벨트는 강원도 동해안 오대산 일대에서부터 시작되어 서해안의 태안반도에서 끝을 맺는다. 백화산은 이 화강암 벨트의 서쪽 끝에 있는 산으로 오랜 침식을 견디고 남은 잔구성(殘丘性, monadnock) 산지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노출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어서 곳곳에서 기암절벽들을 볼 수 있다.

 


[마애불 뒷 면]



[마애불 옆에 있는 화강암 암반]


☞ 태안군 일대 지질구조 https://t1.daumcdn.net/cfile/blog/9902E83C5BCBF0981C


▣ 대 중국 교역로 상에 위치 


  그런데 이처럼 역사적인 불상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백제 불교는 중국 동진(東晋)에서 서해를 건너 전래되었다.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침류왕1)에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서해바다를 건너서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한강변의 남한산으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526년(성왕 4)에는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謙益)을 맞이하여 불교가 크게 발전하였다.

  마라난타가 처음 입국한 곳은 전남 영광의 법성포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220~589) 중반인 동진/오호십육국시대로 산둥반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동진이 중국의 여러 나라 가운데 백제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나라였다. 따라서 백제와 중국 간의 교류는 서해바다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태안반도는 대중국 교류에 유리한 위치였다.




[불교 전래 경로 * 자료: 조계사 청년회(http;//jgs.or.kr)]



  백화산 마애불은 6세기 경에 조성된 것이다. 중국 제나라(北齊, 550~577) 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시대 후반인 남북조시대(420~589)에 해당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윈강석굴과 같은 석굴 사원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때 백제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둥반도 일대는 제나라가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백제에 일정한 영향를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태안마애불 조성 당시의 중국 *자료: "The Divisions of China, 535-560 A.D." Albert Herrmann (1935) History and Commercial Atlas of China. Harvard Press.]

 

  또한 당시 백제는 불교가 융성하던 시기로 사비성에 도읍(538, 성왕16)을 하고 있었다. 성왕은 양나라 등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므로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태안반도 일대는 대중국 교류의 교두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태안마애삼존불은 6세기 당시 이 일대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백제와 중국의 교류 통로 가운데 하나였던 태안반도에서 사비, 또는 웅진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는데 역시 태안반도 일대가 당시 대중국 교역로의 교두보였음을 엿볼 수 있는 증거이다.

[태안반도에서 웅진으로 가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