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태안

검은여와 서산간척지

Geotopia 2023. 3. 31. 21:08

▣ 독특한 볼거리 검은여

  검은여는 서산간척지 B지구 부남호 상류 연안에 검은색의 바위 덩어리들이 모여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작은 이 지형은 간척되기 전에는 썰물 때 육지와 연결되던 '여(礖)'였다. 지금은 육지가 되었으니 '여'라고 할 수 없지만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바다 한 가운데 있던 검은여가 육지가 된 것은 1982년이다. 1979년 서산AB지구 매립이 허가된 후 1982년 10월 26일 서산B방조제 최종 물막이 공사가, 1984년 3월 10일 서산A방조제 최종 물막이 공사가 각각 마무리 되었다. 물속 암초에 지나지 않던 바위 덩어리였으므로 간척된 다음에는 거의 사라질 운명이었다. 다행히 주민들의 노력으로 살아남아 자리를 지키며 옛 이야기와 함께 독특한 볼거리를 만들어주고 있다. 특히 지질구조가 독특하여 주목을 끄는데 분포 범위가 매우 좁아서 많이 연구되지는 못하고 있다.

검은여에서 바라본 부남호

  검은색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현무암이 떠오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결정질의 암석이며, 또한 관입 암맥들이 군데군데 보이는 심성암임을 알 수 있다.  이 일대는 모두 간척 전에는 갯벌이었으므로 제4기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거 해안선 밖은 대부분 쥬라기 심성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검은여는 부석면에서 태안읍에 이르는 심성암 지대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후빙기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긴 후 표면이 퇴적물로 덮여서 독립된 잔구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육지와 같은 지질구조로 이어진 땅이었던 것이다.

*카카오맵
뭍이 된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바위에 굴껍질이 아직도 남아있다.
선캄브리아기층을 관입한 심성암류가 검은여 주변에 분포한다

 

  그런데 왜 검은색일까? 철분함량이 매우 높은 초염기성 암석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산암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감람석이나 반상화강암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표면 가까이, 분출 직전까지 관입하여 비교적 빠르게 식어서 만들어진 암석이 아닌가 싶다.

 

A:초염기성화성암복합체, B:조립질초염기성화성암, C:초염기성 암석 표면에 뭉쳐있는 감람석, D:고철질화성암 표면의 풍화흔, E:관입산성암, F:화강암과 초염기성암의 경계면 *박준형·이찬희, 2019, 서산 검은여의 역사적 및 암석기재적 특징과 해양유산적 잠재가치 검토, 보존과학회지(35-2), p. 137.
A:전형적인 중립질 화강암, B:조립질 반상화강암, C:초염기성암을 관입한 반화강암 암맥; *박준형·이찬희, 2019, 서산 검은여의 역사적 및 암석기재적 특징과 해양유산적 잠재가치 검토, 보존과학회지(35-2), p. 137.


 

철과 마그네슘 함량이 많은 초염기성 심성암류가 대부분이고 이를 관입한 암맥을 볼 수 있다.
관입 암맥 덩어리. 규장질의 함량이 높아 분홍색을 띄는 산성 암맥이다.
화강암에 가까운 암석도 있다
감람석이 초염기성 암석 표면에 붙어있다.

  감람석의 어원은 라틴어의 oliva가 어원인데, 이는 돌의 색깔이 올리브색이라는 것에 있다. 1790년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가 명명했다. olivine을 감람석으로 번역하게 된 유래는 일본의 지질조사소의 구성원들에 있고, 문헌중 가장 오래된 것은『20万分の1伊豆図幅地質説明書』西山正吾、1886년)라고 한다.
  감람과는 베트남이 원산지이고, 그 외에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재배되고 있다. 무환자나무와 닮았고, 과실은 식용하며 기름을 추출하거나 약용으로도 쓰인다. 이 나무는 과실은 유럽의 지중해 지역에 있는 올리브와 약간 닮았지만 전혀 다른 나무이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시대 말기에 과실만을 보고 같은 것으로 오인하여, 성서가 한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올리브가 번역될 때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위키백과>

 

▣ 굴포운하와 관련된 이야기: 부석(검은여) 아래에는 온 나라 사람이 사흘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들어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검은여 밑에는 우리나라 사람 전체가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이 들어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세곡선이 이 암초에 부딪혀서 가라앉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곳으로 세곡선이 들어왔다면 '갑문식', 또는 '설창육수식'으로 굴포운하가 실제로 활용될 때 일어났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이야기 속에는 주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조선 사람 모두가 사흘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라는 말은 엄청난 양의 세곡이 지나가는 장면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허탈감이 잘 드러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지역민들은 물때를 잘 알기 때문에 암초의 위치와 크기를 잘 앎으로 이정표로 활용했던 것에 비해, 지리에 낯선 세곡선들은 물 때를 못 맞추면 암초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컸다. 멀리서 가렴주구의 상징인 세곡선을 지켜보던 주민들의 마음을 잘 담은 전설이다.

천수만의 부남호를 가로지르는 검은여 다리. 다리 왼쪽에 검은여가 있다
인평저수지에서 바라본 천수만 간척지. 인평저수지는 옛 해안선이었다.

 

▣ 옛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검은여 

검은여와 부석사가 표시되어 있다. 검은여 간월도가 비슷한 크기로 그려져 있다(1872지방지도 서산군)
검은여(1872지방지도 태안)

 

▣ 영주 부석사와 같은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서산 부석사

영주 부석사와 같은 창건 설화를 갖고 있는 서산 부석사. 용이 되어 의상대사를 수호하던 선묘낭자가 큰 돌이 되었다가 떨어졌는데 영주 부석사에서는 무량수전 뒤에 떨어졌다면, 서산 부석사는 천수만 한 가운데에 떨어진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멀리 떨어진 두 지역에 같은 설화가 전하는 이유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