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태안

굴포(掘浦)운하: 5백 년의 꿈

Geotopia 2018. 10. 21. 06:28

▣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했더라면

  굴포운하는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고자 했던 미완의 운하이다. 이곳이 운하로 선택된 이유는 천수만과 가로림만이 가장 가까이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형이 낮아서 많이 파지 않아도 해수면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만약 굴착에 성공했다면 큰 조차도 조운선 운항에 좋은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조류가 심하면 배의 운항에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천수만과 가로림만은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통과하는 방향으로 조류가 흐르기 때문에 오히려 밀물이 되면 힘들이지 않고 배가 천수만에서 가로림만으로 이동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누대에 걸쳐 굴포 굴착에 대해 관심을 가졌음에도 끝내 운하 건설에 실패하였다. 수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운하 건설에 집착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조운 과정에서 태안반도 연안이 난코스였다는 증거이며, 또한 운하 굴착이 쉽지 않은 공사였음을 뜻한다. 수없는 시도와 실패가 반복되는 과정은 운하가 위치한 태안과 서산 지방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주민들은 부역으로 징발되는 등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신털이봉, 판개골, 하창, 북창, 굴포골 등 운하와 관련된 지명이 이 일대 여러 곳에 남아있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운하 공사가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이다. 이 증거들은 또한 굴포 건설 공사가 지역민들의 일상에 깊이 관여되었음을 의미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신털이봉은 노역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해발 40m를 약간 넘는 이 봉우리는 운하 주변에서는 고도가 가장 높다. 잔구성 구릉인 이 산을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서 만들어진 산'이라고 정의한 것을 보면 이 공사가 얼마나 어려운 공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역민들이 운하 공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신털이봉'이라는 지명이 잘 말해준다.

  끝내 성공하지 못했으나 이 운하는 많은 역사지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지형과 지질구조 등 자연지리적 특징을 기반으로 하여 조운의 의미와 조운로, 부역 체계, 취락과 인구, 토목 기술 등 다양한 현상들이 이 운하를 통해 조망될 수 있다. 

 

굴포운하 답사

▣ 경로 검은여(서산시 부석면 갈마리 산 143) - 검은여다리(태안읍 송암리 1582) - 인평저수지(태안읍 인평리 1023) - 구 인평교(32번국도 / 팔봉면 진장리 1199) - 인평천과 지류 분기점(팔봉면 진장리

lovegeo.tistory.com

판개골(가로림만쪽)에서 바라본 굴포운하. 멀리 인평저수지(천수만쪽)가 보인다.
[서산 팔봉산에서 바라본 굴포운하터]

 

[태안 백화산에서 바라본 굴포운하터. 사진 오른쪽이 천수만, 왼쪽이 가로림만이다.]

 

[굴포운하 터 *원도: 국토지리정보원(2011)]


▣ '掘浦'는 '운하'라는 뜻

 

  '掘浦'는 원래 지명이 아니었다. '파서 만든 갯골'을 뜻하는 일반 명사로 바로 운하라는 뜻이며 순 우리말로 '판개'라고도 한다. 이것이 고유명사화하여 지금은 '굴포운하'라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이곳 외에도 남굴포, 서굴포 등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거나 회자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에 있는 굴포와 함께 안면도와 남면반도 사이에도 굴포가 표시되어 잇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굴포운하'라는 말은 '운하'라는 낱말이 두 개 겹쳐있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는 '굴포'가 두 곳(서산과 태안 사이, 안면도 북쪽)에 표시되어 있다]

 

    '가적(加積)운하'라는 이름도 쓰인다. '가로림만(加露林灣)'의 '가'와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적돌강(積乭江)'의 '적'에서 따온 이름이다. '적돌강'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데 지금 쓰이고 있는 이름은 '태안천'이다. 하지만 가적운하라는 이름은 운하 굴착 당시부터 쓰이던 이름은 아니었으며 1960년대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노도양, 1979).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적돌강이 표시되어 있다 *원도: 조선총독부(1919)]

 

  ▣ '掘浦'의 역사는 태안반도의 역사

  굴포는 고려시대 조운이 활발해지면서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국가 수취체계의 기본이었던 조운은 삼국시대부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당시의 조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 조운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인이 된다. 고려의 조운은 건국 초기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수도가 개경이었으므로 주요 곡창지대인 삼남지역으로부터 세곡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서해안의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그러니까 서해안의 해로는 고려시대 조운에서 매우 중요한 통로였다. 그중에서도 태안반도 연안은 외해로 돌출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운로 상에서 어려운 구간에 해당했다.

  처음으로 운하 건설이 시도된 시기가 고려 예종(1106~1122)과 숙종(1096~1105) 때였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500여 년 간 굴착에 대한 논의가 있었거나 실제 공사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예종, 숙종, 인종, 공민왕 대에 굴포에 대한 기록이 전하며, 조선시대에는 태조, 태종, 세조, 중종, 현종 대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500여 년의 긴 기간 동안 누차에 걸쳐 국가 차원에서 굴포운하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우선 태안반도를 외돌아 가는 조운 항로가 멀고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근흥반도와 신진도 사이의 안흥량을 통과하는 구간은 물살이 세고 바닥이 거칠어 잦은 사고가 났다. 굳이 위험한 해협을 통과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구심도 들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배는 크기가 작고 또한 평저선이었기 때문에 연안에서 떨어진 외해로 운항하는 것은 더욱 위험했다.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갈 경우 운항 거리도 훨씬 멀어졌기 때문에 안흥량을 통과하는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여기에 왜구들이 조운선을 노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외해를 이용하기는 사실상 어려웠다. 안흥량에 방어 기지인 진(鎭)을 설치한 이유도 조운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태안반도를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방안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굴포운하 주변에 남아있는 운하 관련 지명들 *원도: Google earth]

 

[가로림만 쪽에 있는 판개골(굴포골)]

 

▣ 운하 굴착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

  그렇다면 국가적으로 큰 힘을 기울였는데도 불구하고 운하 굴착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록에 의하면 실패한 원인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기반암이 단단하여 공사를 완성할 수 없었다. 태안반도의 중심부로 화강암 산줄기가 동쪽의 팔봉산(364m)에서 서쪽의 백화산(285m)으로 통과하는데 운하는 이 화강암 지대를 관통해야만 했다. 화강암은 심성암으로 절리가 발달하여 화학적 풍화를 받지 않는 경우에는 매우 물리적으로 강한 암석이다. 따라서 굴착 과정에서 화강암 암반이 나오게 되면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서 갑자기 팔 수 없습니다(「태조실록」 4년6월 무진)
  -땅 속에 돌이 있어 단단하고 넓어서 수도를 파서 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태조실록」 6년10월 을미)

 

[암석 간 압축 강도 비교 *김교원, 김수정, 2006, 한반도의 암종별 공학적 특성의 상관성 분석, 공학지질 16(1), 대한지질공학회]

 

  둘째, 조차가 크고 연안의 수심이 얕다. 조차가 커서 썰물 때도 배가 원활하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매우 긴 거리를 파야만 했다. 작업량이 늘어나는 것과 함께 밀물 때가 되면 작업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또한 조수의 작용으로 작업이 진행된 곳이 자꾸 메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
돌이 물 밑에 있고 또 바다 조수가 왔다 갔다 하므로 파면 족족 메워져서 시공하기가 어려워 결국 성취되지 못하였다.(「고려사」 열전 권29 왕강)
  -조수의 출입으로 운하의 개착 부분이 뻘로 막히게 될까 걱정된다고 한다… 굴포 안부의 암석층을 깊이 개착하여 배가 통과하게 하려면 20丈이나 파야만 하며 더욱이 땅속에서 물이라도 나면 수중 암석을 개착하기는 더욱 어렵다 (「승정원일기」, 현종 10년 정월 경자)

 

  셋째 공법과 공구의 수준이 낮았다. 돌을 다루는 기술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토목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대개 근처의 농부들이었다. 더욱이 이들이 사용했던 장비는 정이나 끌 등 원시적인 도구가 주를 이루었다. 낮은 숙련도와 낮은 기술, 그리고 열악한 장비에 의존하여 화강암을 굴착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았다.

 

[신털이봉 소나무숲 뒤로 화강암이 노출된 팔봉산이 보인다. 화강암 지대는 팔봉산에서 이곳을 지나 백화산으로 이어진다]

 

[사진 왼쪽 평지 끝에 나무가 줄 서듯이 서있는 곳이 운하터이다]

 

수평식(=貫流式) 운하의 대안들
 
  직접 양쪽을 연결하는 방식(水平式, 貫流式)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운은 계속되어야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다른 방식의 운하가 모색되었다. 첫번째는 갑문식과 유사한 형태이다. 여러 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계단식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갑문을 설치하지는 않지만 배가 각각의 저수지에서 운항이 되었으므로 갑문식과 유사한 점이 많은 방식이다. 이 방식은 태종12(1412)년 하륜이 건의하여 그 이듬해에 착공되었다. 한동안은 사용되었으나 발편한 점이 많아서 곧 폐지되고 말았다.

 

[갑문식(계단식) 운하 모식도 *자료:김현준,1981, '안흥량의 굴포: 미완성의 운하공사' 대한토목학회지47]

 

[운하터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남아있는 저수지 ]

 

  두 번째는 양쪽 만의 끝에 창고를 설치하고 창고와 창고 사이는 육로로 운반하는 방식(設倉陸輸식)이다. 송시열 등의 발의로 채택된 이 방식 역시 한동안 활용(현종 대)되었으나 불편한 점이 많아 오래가지 못했다(이종영, 1963). 조선시대까지 이 일대에는 하창리, 상창리, 창평리 등 창고와 관련된 지명이 있었고 하창, 북창, 창개들 등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괄호 안의 지명은 조선시대 지명임 *자료:조선총독부(1919)]

 

 

남창(南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세번째는 태안반도의 다른 곳을 굴착하여 항로를 단축하고 위험을 줄이고자 하였다.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고자 하는 오랜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자 남면반도의 중간을 파서 천수만과 서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었다. 남면과 안면도 사이의 이 해협을 「대동지지」에서는 '남굴포(南掘浦)'로 기록하고 있으며(굴포는 '동굴포'로 기록하고 있음) '판목(掘項)'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1872지방도」에는 '掘項'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소원반도의 '의항' 일대를 굴착하려고 하기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72지방도에는 남면반도의 끝에 '굴항(掘項)'이 표기되어 있다]

 

안면도가 운하로 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1872지방지도 서산군)


▣ 굴착 실패의 원인에 대한 문제 제기

  *이 부분은 [이준선, 2009, '태안반도 '가적운하'의 역사지리적 검토', 문화역사지리 21-3, 대한지리학회]의 견해를 따른 것입니다.

 

  위에 기술한 운하 굴착이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들은 나름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500여 년의 긴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는 다소 충분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다. 또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위의 사실들 이외에 또다른 원인들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먼저, 강한 화강암 암반층을 뚫지 못해 건설에 실패했다는 분석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 신털이봉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이 일대의 유일한 능선으로 팔봉산에서 백화산으로 이어지는 화강암지대이다. 하지만 이 일대의 암반층은 대부분 풍화가 진전된 화강암층, 즉 석비레(saprolite)로 이루어져 있다. 석비례의 강도는 대부분 곡괭이로 팔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노출된 화강암을 볼 수 없으며,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운하 주변 지하수 관정들은 공통적으로 굴착 당시 암반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팔봉산이나 백화산과는 달리 지질구조상 절리의 밀도가 매우 높아서 심층풍화가 매우 진전된 상태의 화강암 지대임을 알 수 있다. 

 

[지질도 *자료:한국지질자원연구원]

 

  그렇다면 두번째 요인, 즉 조차가 크고 수심이 얕은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 조차가 크기 때문에 밀물이 몰려들어 공사가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안면도를 굴착한 예를 볼 때 큰 장애요소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운하 굴착에 성공했다면 조차가 크기 때문에 오히려 밀물을 이용하여 낮은 수심을 극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기술 수준이 낮아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의문점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화강암을 다루어왔고 꽤 높은 암석 가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석굴암은 정12각형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정교한 작업이었는데 석굴암에 사용된 암석은 모두 화강암이다.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든 불상이나 석탑 등이 우리나라에 부지기수이며 다리나 건축자재 등으로 화강암이 널리 가공되어 쓰여왔다. 따라서 운하 굴착을 하지 못할 만큼 화강암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굴포운하 공사를 실패한 후 안면도를 자른 것을 볼 때 운하를 굴착할 수 있을 정도의 토목 기술은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물론 암석 강도의 차이는 있다. 안면도 일대는 편마암 계열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물리적 강도는 화강암에 비해 약하다).

 

▣ 파지 못했을까, 파지 않았을까?

 

  조정의 의지는 강력했다. 정확히 말하면 조정을 주도하던 왕과 그 측근들의 의지는 강력했다. 국가 재정의 근본인 조운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토대였으므로 봉건왕조시대에 국가의 주인이었던 그들은 조운체제를 정비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하지만 일반 관료들이나 백성들은 입장이 달랐다. 특히 노역에 동원되었던 지역민들은 매우 다른 입장을 가졌을 수도 있다.

  신털이봉(해발38m) 전설은 노역의 어려움을 잘 나타내는데 이는 노역에 동원된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어 전파되었을 것이다. 신털이봉 전설뿐만 아니라 '낮에 파놓으면 밤에 도깨비가 메운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들이 떠돌았던 것은 부정적인 여론이 팽배했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공사를 훼방했을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탈이 심했고, 그로 인해 주민들이 대거 지역을 떠났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다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다지 많은 수가 아니었다. 태안반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산촌(散村)이 이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노역에 동원할 인력이 풍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노동에 의존하는 밭농사 중심의 농업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가장이 노역에 동원되었을 때 주민들이 당할 고초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논으로 이용되고 있는 굴포운하 터]

 

[생강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도 있다]

  관료들, 특히 조운을 담당하는 관료들이나 조운로 상에 위치했던 지방의 수령들 역시 운하 건설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조운을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당 관리들이 수송중인 세곡미를 축내거나 심지어는 고의로 조운선을 파손시키고 세곡을 포탈하기도 하였다. 감독을 담당하는 지방 수령들이 수송 담당 관리들과 결탁하여 세곡미 포탈을 조종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때 조운선이 수시로 정박하거나 속도가 느려지는 일이 불가피했는데 태안반도 일대는 그런 빌미를 만들어내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조정 내에도 부정적인 견해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집권층과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세력이나 심지어 조운비리와 결탁되어 있는 부패한 관료도 있었다. 일례로 전술한 현종 때의「승정원일기」(현종10년 정월 庚子)에 '굴포 안부의 암석층을 깊이 개착하여 배가 통과하게 하려면 20丈이나 깊이 파야만 하며, 더욱이 땅속에 물이라도 나면 수중 암석의 개착이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는 기술은 매우 과장되어 있다. '1장=10척(2m~3m)'으로 계산할 때 40~60m를 파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높은 신털이봉이 38m이며 그 이외의 지역은 대부분 해발 20m 안팎이다. 현재 상태로 보면 해발10m 등고선이 남쪽에서는 인평저수지 북쪽 500m 지점을 지나며 북쪽에서는 신털이봉 서북쪽을 지나는데 그 거리가 대략 1200m 정도이다. 그 1200m 안쪽도 신털이봉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해발 15m 이내로 40~60m를 파야 한다는 주장은 과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배가 다닐 수 있는 수심을 확보해야 하므로 더 깊이 파야 하지만 당시에 이용되던 배들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으므로 수심이 2m 정도만 확보되어도 큰 무리없이 운항이 가능했다. 또한 밀물 때를 이용한다면 더욱 충분한 수심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운하터의 지형 단면도(가장 깊게 굴착된 부분) *출처: 이준선, 2009]

 

    실제로 가장 깊게 굴착된 구간은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 육지부 2km 가운데 일부(약700m)에 지나지 않는다. 단면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장 깊이 굴착된 이 일대도 굴착된 깊이는 10m 정도에 불과하다. 20m 등고선까지는 굴곡을 유지하다가 15m 등고선이 운하터와 평행을 이루며 지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이 능선의 높이는 15~20m 정도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배가 통행할 수 있는 수심까지 계산하더라도 17m~22m 정도를 파면 충분했으므로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수많은 시도가 불발될 정도의 물리적 깊이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운하 건설에 부정적인 견해가 조정 권력층 내부에도 깊숙히 침투하고 있었다.

 

[가장 깊게 굴착된 부분. 현재 바닥의 해발고도가 10m 정도이다]

 

  풍수지리적 사고도 굴포운하 건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굴포운하가 완성이 되었다면 팔봉산에서 백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금북정맥이라고도 한다)가 끊어졌을 것이다. 풍수적 사고가 강했던 당시에는 지역 주민들 가운데 맥이 끊기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산경도 태안반도 일대 ]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파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자연 환경적 요인 보다는 정치·사회적 원인이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역민들은 영농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운하건설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을 것이며, 관료들은 권력 다툼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부패하여 사리사욕을 추구했을 수도 있다. 굴포운하에 대한 연구는 자연환경적 배경을 넘어서 지역 및 국가 전체의 정치·경제적 조건들이 다각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