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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2018[Ⅰ] : 고지도와 고문서로 본 영월

Geotopia 2018. 5. 22. 20:37

■  카르스트 빼고 영월 들여다 보기?


  그게 가능할까? 단팥 빠진 찐빵일텐데??

  맞다. 그런데 왜 이런 뻘짓을?

 

  2013년에 다녀온 이후 5년 만에 '설걷이와 함께 하는 연합 지리 드림 캠프'로 영월 답사를 다녀왔다. 그동안 서울 시내 답사(2015), 전북 고창(2016), 포천-철원(2017)을 답사했다. 2014년은 세월호의 아픔으로 한 번 빼먹었기 때문에 5년 만에 영월 답사를 가게 되었다. 최소한 3개의 답사 코스를 순환시켜서 1학년 때 참여한 학생이 3년 내내 답사에 참여한다고 해도 겹치지 않도록 하려 했는데 하다 보니 한 코스가 더 만들어졌다.

  영월이 우리의 답사 코스 1번지가 된 것은 호야지리박물관 때문이다. 카르스트 지형을 답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기도 하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리박물관이 있기 때문에 우리 지리학도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다. 또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리 박물관을 통해 지리학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분투 하시는 선배님께 작으나마 힘을 보태 드리고자 하는 뜻도 있다.

  여하튼 영월 답사는 지리박물관과 양재룡 관장님에게 의존하는 것이 많다. 관장님의 트레킹은 당연히 카르스트 지형이 중심이다. '카르스트 빼고 영월'을 들여다 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카르스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두고 카르스트를 뺀 영월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  단종과 영월: 장릉, 창절사, 보덕사, 그리고 청령포


  영월은 '단종의 고을'이라고 할 만하다. 단종이 유배를 당했던 곳이어서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자신은 비운의 일생을 살았지만 단종 덕분에 영월이 오히려 '영화'를 누린 역사도 있다. 단종 관련 유적지는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어 영월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지역 정체성의 중요 요소이기도 하다.

  단종 덕분에 영월이 누렸던 대표적인 영화는 높은 행정 위계이다. 조선시대 영월은 도호부(都護府)로 위계가 높은 지역이었다. 도호부의 읍격(邑格)은 목(牧)과 군(郡)의 중간에 해당된다. 조선의 군현제는 태종 때 크게 정비되었는데 수령이 파견된 주·부·군·현의 수가 330여 개에 달하였다. 그 중 도호부는 38읍(세종 때)이었다(이후 점차 늘어나서 중종 때 45읍, 고종 때에는 75개 읍으로 늘었다). 영월은 1372년(공민왕 21)에 군(郡)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에도 군의 위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698년(숙종 24)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존되면서 영월군이 영월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의 행정 위계는 일반적으로 중심성, 군사적 중요도, 인구 등에 의해 정해졌다. 그런데 왕실과 관련된 사건, 예를 들면 역모 사건 등도 행정 위계에 영향을 미쳤다. 역모가 일어난 지역은 예외없이 행정 위계가 강등되었다. 영월은 태백산지 속에 위치하여 큰 중심지가 될 수 없었으며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또한 19세기 전반까지 가구 수가 3천여호 정도(廣輿圖 해제에 의하면 3,081호)에 불과하여 도호부의 위계에 비하여 인구가 많은 지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호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단종, 정확히는 단종릉 덕분이었다. 왕릉은 살아있는 왕에 필적하는 권위있는 장소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에 왕릉이 중요하게 표기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의 왕릉은 모두 궁에서 하루 안에 당도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즉, '왕의 땅(京畿)'에 있었다. 유일하게 그 규칙을 벗어난 왕릉이 바로 단종릉인 장릉(莊陵)이다. 단종릉을 경기 지역으로 이장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장릉은 본래의 위치를 유지했다. 대신에 영월군을 영월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왕의 땅(京畿)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 지역의 행정 위계를 높였던 것이다. 행정 위계를 높임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당시 자연스러운 정책이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적으로 창절사(彰節祠)와 보덕사(報德寺)가 있다. 창절사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육신(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유응부)과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 생육신 김시습과 남효온, 그리고 박심문(사육신 참형 소식을 듣고 자결) 등 10위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다. 숙종 11년(1685)에 홍만종의 건의로 세워졌다.

  보덕사는 단종의 영정이 봉안된 사찰이다. 1456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사찰명을 노릉사로 고쳤고, 숙종 31년(1705년)에 장릉 보덕사로 고쳤다가 영조 2년(1726년)에 태백산 보덕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淸泠浦)가 옛 지도에 모두 표시되어 있는 것도 단종과 관련이 깊다.



[광여도(19세기 초). 장릉과 창절사, 그리고 보덕사가 표시되어 있다]


擇里志에 기록된 18세기 영월

 

산중에는 평평한 들이 조금 열렸고, 논도 있다. 또 시냇가 바위가 아주 훌륭하다. 농사짓기와 고기잡기에 모두 알맞으니 이것은 하나의 특별한 洞天이다. 시냇물은 영월, 상동을 지나 고을 앞으로 들어오며, 임계 서쪽에 있는 산기슭 남쪽이 정선 여량촌인데, 于筒물이 북쪽에서 여량촌을 둘러 남쪽으로 흘러든다. 양쪽 언덕이 제법 넓고, 언덕 위에는 긴 소나무와 흰 모래가 맑은 물결을 가리고 비치는 바, 참으로 은자가 살 곳이다. 다만 田地가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마을 백성은 모두 자급자족한다.

시냇물은 영월 동쪽으로 와서 상동 물과 합치며 또 조금 서쪽에서 주천강과 합친다. 두 강 안쪽에 단종의 장릉이 있다. 숙종이 병자년에 단종의 왕위를 추복하고 능호를 봉하였던 것이다. 또 이보다 앞서 六臣를 능 곁에다가 지었으니 매우 장한 뜻이었다.

대체로 북쪽은 회양에서 정선까지 모두 험한 산과 깊은 골짜기이며, 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한강에 들어간다. 화전을 많이 경작하고 논은 매우 적다. 기후가 차고 땅이 메마르며 백성은 어리석다. 두메 마을에 비록 시내와 산의 기이한 경치가 있어 한 때 난리를 피하기에는 좋은 곳이지만 여러 대로 살기에는 합당하지 못하다. <택리지> 팔도총론, 강원도(이익성 譯, 을유문화사) 


■  광여도: 19세기 초

 

  광여도(廣輿圖)에서는 莊陵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물론 장릉이 강조된 것은 다른 지도들도 비슷하다. 원래 장릉은 魯山墓라 불렸는데 단종이 17세에 무참하게 죽임을 당할 당시 노산군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영월 戶長 嚴興道가 남한강에 버려진 시신을 거두어 매장을 했는데 그때 이후로 노산묘로 불려지다가 복위된 이후 왕릉으로 격상되었다. 

  단종이 廢位된 후 유폐된 곳은 지도 왼쪽 아래에 있는 淸泠浦이다. 청령포는 감입곡류하는 서강과 뒷쪽의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곳이다. 하지만 광여도에서는 감입곡류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주천강, 평창강, 동강 등 주요 하천이 잘 표시되어 있다.

  장릉 앞쪽에는 彰節祠가 표시되어 있다. 報德寺는 무덤 앞쪽에 있는데 본래는 신라 문무왕 때 義湘(625-702)에 의해 智德寺란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1726년(영조2)에 장릉의 陵寺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또한 장릉 앞에 못(池)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大東輿地圖(1861)


조선시대 영월부는 오늘날의 영월군 보다는 약간 면적이 좁았다. 1906년 주천면과 수주면이 영월군에 편입되어 지금의 영월군이 되었다. 주천면과 수주면은 조선시대 당시 원주부의 두입지였다. 하지만 충청도, 전라도 등 평야 지대와 비교하면 면적이 넓은 편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충청도는 보통 2~3개 부·목·군·현이 합쳐져 하나의 군이 된 것에 비해 강원도는 거의 대부분 조선시대 한 개의 부·목·군·현이 한 개의 군이 되었다. 인근의 평창, 태백, 원주, 정선 등의 군현들도 조선시대의 영역을 거의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과거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인구가 적고 농업 생산량이 적으며 외침이 잦지 않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영월도호부에는 驛2개다. 양연(楊淵)과 연평(延平)이라는 두 개의 역인데 이는 대개 한 개의 부·목·군·현에 한 개의 역이 있었던 것과 다른 점이다. 역은 30리 간격으로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대개 각 읍치 간의 거리가 30리 안팎이었으므로 각 읍치 마다 한 개씩의 역이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영월을 비롯한 강원도의 부·목·군·현들은 면적이 넓어서 인접한 읍치와의 거리가 30리를 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원활한 기능 수행을 위해서는 한 개를 더 둘 수밖에없었다.

'寧越'을 직역하면 '평안하게 넘는다'는 뜻이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밖으로 나가거나 들어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고개가 많을 수밖에 없다. '편안하게 넘을 수 있는 곳'이었는지, 아니면 '편안하게 넘기를 기원'하는 의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실제로 영월에는 고개가 많다. 대동여지도에는 많은 고개들이 표시되어 있다. 고덕치(高德峙), 율치(栗峙), 화절치(花折峙), 고석령(孤石嶺), 사치(沙峙), 석치(石峙) 등이 영월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들이다. 그리고 분덕치(分德峙), 각근치(角斤峙) 등 영월 내부를 연결하는 고개들도 표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


■ 1872 지방도


  邑誌에 실려 있는 附圖처럼 작게 그려졌으며 단색으로 표현되었고 風水의 山圖的인 양식을 가미하여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1872년 지방도의 다른 군현들은 크기도 크고 화려하게 채색된 지도가 많은 데 이러한 일반적 특징과 큰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여 산세가 험하고 많은 산이 발달한 지역임을 잘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각종 관청 건물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광여도와 마찬가지로 단종과 관련된 건물들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동강변에는 단종 승하시 순절한 시녀들을 제사 지내던 愍忠祠도 보인다.

  동강 상류에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於羅淵이 회화적으로 표현되었고 읍치 위쪽에는 黃腸木을 가꾸던 黃腸山도 표현되어 있다. 


[1872 지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