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영남 일주

대구-영남의 중심

Geotopia 2014. 1. 26. 22:04

▣ 답사 일시: 2014.1.15(수)~1.16(목)

 

▣ 주요 답사지: 옛 대구 중심지(약령시-제일교회-계산동성당-구암서원-최초사과나무(선교사 스윗즈주택)-서문시장-달성공원-북성로공구거리-대구역-경상감영-동화사-갓바위

 

<시내 답사 경로 *점선: 경로, **노란색 부분: 대구읍성, ***원도: Daum지도>

 

▶ 네비양의 신세를 지다

 

  대구에서는 과거 대구의 중심이었던 경상감영, 약령시, 근대문화거리 등을 중심으로 답사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므로 시내 중심가를 지향하고 달렸다. 대구 역시 와 본 적은 있으나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는 나의 ‘취약도시’이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달성공원에 왔던 것이 처음이었고 근 십 오 년 전 대학원 시절에 달성공원과 약령시를 답사한 적이 있었으며 몇 해 전 지인 결혼식에 잠깐 왔다가 간 것이 나의 대구 경험의 전부이다. 내년쯤에 지리동아리 친구들과 답사를 올 계획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에 한번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때 잠깐 왔던 수학여행은 기억이 웬만큼 나는데 대학원 때 왔던 것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신 그 때는 기록을 나름 잘 해놔서 기억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였다. 사실 기록 때문에 복원된 기억은 원래 기억이 아니고 새롭게 만들어진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 ‘그 때 그랬다’고 스스로 믿고자 하는 만들어진 기억 같은 것이라고 할까? 영화 아일랜드의 복제인간들이 만들어진 기억을 주입받고 그것을 자신의 기억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 같은… 과거의 한 단편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 잊었던 기억이 복원이 되었을 때 마치 처음 만난 것 같은 것, 그것이 치매의 초기 증상이라는데… 그래도 그냥 잊을 뻔 했던 기억을 억지로 다시 되살려 낸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모양이다.

  나에겐 사진도 그렇다. 찍어 놓으면 그 ‘장면’이 다른 사실보다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아마도 기억에 남는다기 보다는 여러 번 보기 때문에 ‘강화’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완전히 잊기 전에 한번 더 램 상태로 끌어 올려주는 전형적인 학습법을 사진 덕분에 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경상감영 근처로 목적지를 정하고 할 수 없이 네비양에게 도움을 청했다. 길을 잘 모르는데다 밤길이라는 이유로^^ 휴대폰 어플이 네비게이션 장비를 몰아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네비를 갖게 된 결과가 되었다. 그동안 네비를 의도적으로 장착하지 않았던 것은 지리학도의 자존심이었을까? 아내가 가끔 휴대폰 네비를 작동시키면 짐짓 시끄럽다며 끄라고 하곤 했던 것도 아마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네비양(목소리가 여자이므로 아내가 그렇게 불렀다)을 질투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라며 약을 올린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질투’는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고‘경쟁상대’?

  어쨌든 오늘은 네비양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GPS 지도를 보기 위해 아까 칠곡휴게소에서 거창한 거치대를 거금 3만원을 들여 구입한터였지만 아무래도 그것에만 의지하기에는 초행길이 좀 부담스럽긴 하다. 금호JC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451번)으로 옮겼다가 바로 서대구IC로 빠져나와서 곧장 시청쪽으로 달렸다. 좌회전 전용 차선이 갑자기 생겼다가 없어지고 어떤 때는 두 개씩 나타나서 두어 번 진땀을 뺐다. 좌회전 차선에서 깜빡이를 넣고 직진차선으로 나가려다 달려오는 뒷 차에 부딪힐 뻔한 상황도 있었다. 뒷 유리에다가 ‘충청도서 왔슈~’ 하고 써 붙이고 다니고 싶다. 그러면 혹시 뒷 차가 좀 봐줄까?

 

▶ 아내의 막창 기피증을 깬 대구막창

 

  우여곡절 끝에 국채보상로에서 종로를 따라 들어와서 가까운 곳에 일단 숙소를 정했다. 벌써 일곱 시 배가 슬슬 고파온다. 종로를 따라 걷다보니 이런저런 먹을거리들이 많이 있다. ‘조계찜(이름이 특이해서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조개찜집인데 왜 조계찜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옆에 마침 대구막창집이 있어서 아내를 꼬드겼다. 평소 냄새 때문에 곱창류를 싫어하는 아내는 예상대로 반대를 한다. 그래도 대구에서는 체험삼아 막창을 먹어봐야 한다고 우겨서 막창집 입성에 성공했다.

  결론은?

  대~박~!

  세로로 잘라서 네모난 모양으로 만든 막창이 의외로 아내에게는 딱 맞는 것이 된 것이다. 즉, 곱창을 세로로 잘라 안쪽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특유의 소스를 활용하여 아내가 싫어하는 ‘곱창 냄새’를 없앤 것이 주효한 것이다. 매니아 중에는 오히려 그 냄새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꼭 좋아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어쨌든 우린 아주 만족스러웠다. 자리가 없어서 주방 앞에 앉은 것도 행운이었다. 느릿한 충청도 말씨를 알아 본 주인아저씨(알고 보니 나랑 동갑이다)가 틈틈이 나와서 구워주고, 관광안내까지 친절하게 해줘서 여러모로 유익하고 기분이 좋았다. 추억의 도시락을 흔들어 먹는 비빔밥 또한 별미다. 나중엔 이집 특산이라는 오도독살 구이까지 공짜로 얻어먹는 큰 호사를 누렸다. 또 한 번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는 말이 더 이상 진리가 아님을 느낀다. 게다가 아내의 곱창 기피증까지 말끔히 날려버린 뜻 깊은(^^) 날이었다.

 

<사각형의 막창을 손수 구워주시는 사장님의 손>

 

<대구의 맛 막창과 어울린 대구·경북의 술 '맛있는 참'>

 

<추억의 흔들어 먹는 도시락>

 

<소주 한 잔을 더 부르는 오도독살 구이>

 

 

▶ 관주도로 만들어진 약령시

 

  연 이틀 마시긴 했지만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았으므로 아침이 힘들지는 않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았더니 금세 여덟시가 훌쩍 넘는다. 아홉시가 다 되어 길을 나섰다. 차는 숙소에 두고 옛 대구읍성 지역을 걸어서 답사하기로 한 것이다. 대구는 과거의 중심과 지금의 중심에 큰 변동이 없는 도시이다. 그래서 시내 주요도로의 이름도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등 과거 성벽을 따라 붙여진 것이 그대로 남아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대구약령시이다. 상업경제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전문시장이, 그것도 서울이 아닌 영남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박물관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이 ‘잠깐’ 나온다. 대구는 소백산지와 태백산지로 둘러싸인 영남분지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주변의 산지들로부터 다양한 약재들이 집산될 수 있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산으로 치자면 북부지역에 더 높고 많은 산이 있지만 기후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일대만큼 좋은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하지만 예전 대학원 답사 후에 써 놓은 나의 답사기에 관 주도로 약령시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ㅠㅠ)은 대구 약령시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관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장시가 등장한 시기는 대략 15~16세기경으로 보며 17세기 초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장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약령시가 처음 개설된 17세기 중반(1657년)에는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 장시가 발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상업경제가 매우 활성화되지는 못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으로 전국적 수집 및 판매망을 가진 전문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관 주도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약재의 수집의 주체가 관이었다는 것은 왕실이나 고관들을 중심으로 약재를 소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급 약재를 민초들이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약령시 거리 북쪽 입구>

 

<약령시 박물관 1층은 약재 판매장이다>

 

<수집된 약재를 한성으로 운반하던 운송로. 이제 지리과가 다 된 아내가 영상에 이 장면이 나오자 사진을 찍으라고 재촉을 한다>

 

<궁중에 약재를 조달하기 위해 경상감사가 약령시를 설치했다는 내용>

 

<약령시한의학박물관 입구의 약령문>

 

<약령문 앞 약령시 거리>

 

<약령시 거리>

 

<약령시 거리의 음식점 이름도 약령시에 어울리게 지었다>

 

▶ 근대문화거리에서 대구를 보다

 

  아침 일찍부터 거리를 걷다보니 쌀쌀한 기운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내는 차를 타고 가잔다. 현대백화점 앞에서 잠시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날씨는 춥고 갈길은 묘연하고… 답사지가 바로 바로 인접해 있어서 도심 답사는 걸어야만 제맛이 난다는 얘기는 춥고 갈길을 모르는 상황에서, 더욱이 지리학도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공자님 말씀에 불과하다. 잠시 도보 답사의 잇점을 주장할 근거를 잃었지만 다행이 계산5거리에서 바로 방향을 잡을 수 있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북 방향이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아서 계산오거리에서 남쪽으로 있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쪽 성당 건물이 계산동성당이 아닌가 착각을 한 것이다.

  도심 속에 이상화고택과 서상돈고택이 남아있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다. 물론 복원을 했겠지만 그 터가 빌딩숲에 점령당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놀랄만하다. 도심 내부에는 이런 공간들이 대부분 숨어있다. 식민지 역사를 거치면서 공간의 왜곡이 일어났지만 다행스럽게도 근래에 몇 개 도시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이를 정리, 복원해가고 있다. 역사를 정확히 정리하기만 한다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후손들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역사교육이다. 하지만 친일의 역사가 미화된다면 근대문화유산은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도 있다.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의 발자취는 오늘날 대구의 보수적 성향과 비교가 돼서 조금 안 어울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 솔직한 내 느낌이다. 하지만 스케일이 국가적, 민족적, 또는 세계적으로 확장된다면 사실 지역 간의 이해 다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거의 대구가 그랬던 것이다. 국내 스케일에서 지역 간에 작은 이해를 놓고 갈등하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스케일로 합리적 판단을 해 가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이상화고택. 중학교 때 그의 시를 한 번도 못 본 상태에서 시의 제목만 열나게 외웠던 기억이 난다. 시를 본 적이 없으니 온갖가지 방법으로 시인과 시를 연결시켜 외워야만 했다. '이상'하게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런 식이었다 ㅠㅠ>

 

<이상화고택 옆에 '계산예가'라는 전시공간이 있다. 대구의 보통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쓴 전기들이 눈길을 끈다. 이런 글들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왔었는데 이곳에서는 누군가가 그걸 실행에 옮겼다. 사람의 생각이 엇비슷한 모양이다>

 

<빌딩숲 가운데 이런 유산이 남아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앞이 이상화고택, 뒤가 서상돈고택이다>

 

<계산동성당. 오래된 성당건물들은 공통적으로 오래되었어도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계산동성당 앞의 카센타는 간판보다 더 큰 '독도는 우리땅' 광고가 붙어 있다. 이 간판을 단 주인은 물론 순수한 민족주의자겠지만 가만 생각하니 이게 기발한 마켓팅이다. 우리 국민 중에 '독도는 우리 땅'에 반대할 사람은 없으니 기본적으로 안티가 생길 일은 없으며 독도에 의미를 더 많이 부여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에>

 

<서성로에서 V자 형으로 갈라져 나온 길인 국채보상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행하다 보면 인쇄소들이 늘어선 길이 나온다. 하지만 대구의 인쇄골목은 이곳이 아니고 계산5거리 남쪽 대구가톨릭대학교 주변이다>

 

▶ 오래된 골목길의 변신-이름의 효과

 

  인쇄소 옆으로 난 작은 길로 이어지는 옛 구암서원에 가는 길은 보기 드문 골목길이다. 좁은 골목 양쪽에 고색이 창연(?)한 단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대로 뒀다면 도심 내부의 슬럼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이름을 얻고 보니 의미가 달라 보인다. 이런 이름을 주지 않았다면 하루빨리 재개발을 해서 삐까번쩍한 건물과 길로 바꾸는 것이 정석이 되었을 것이다.

  구암서원은 달성서씨 문중서원으로 서침을 주향하였고 후에 서거정, 서성, 서해 등을 배향하였다. '옛 구암서원'이라는 독특한 이름은 서원 내에 있던 숭현사(대구시문화재자료 제2)와 묘정비 비각 등이 산격동의 연암공원으로 이전을 했기 때문이다. 연암공원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전한 시기는 1996년이다. 이곳에는 출입문인 경앙문 및 강당, 제수청 건물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전 전에 있었던 건물들은 어디에 있었으며 이 건물들은 왜 남겨놓았을까? 

 

<옛 구암서원 가는 길은 고색창연한 골목길이다>

 

<옛 구암서원>

 

<문화체험장 같은 것을 준비하는 듯 이런 기구가 마당에 설치되어 있다>

 

<옛 구암서원 주변은 모두 이런 골목길이어서 나름 운치가 있다>

 

▶최초 사과나무

 

  옛 구암서원에는 민가가 한 채 있다. 마침 사람이 있어서 최초사과나무가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별로 큰 나무 아입니더’ 왜 그럴까? 일단 가서 의문을 풀어야 한다. 근데 이 지역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하여 매우 친절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감의 표현일까?

  골목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언덕을 올라가면 성명여중과 대구제일교회가 나온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대구제일교회를 지나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최초사과나무가 있다. 스윗즈주택이라고 알려진 건물의 정원에 앙상한 사과나무 한 그루와 거기서 번식을 한 작은 사과나무 세 그루가 있다. 앙상하지만 키가 큰 사과나무는 1899년 동산의료원을 개원할 당시 미국에서 들여온 서양사과나무의 자손목이라고 한다. ‘대구사과’의 효시가 된 바로 그 나무는 아니고 그 자손목이지만 ‘사과의 도시 대구’에게는 의미있는 나무인 것이 분명하다. 그 앞에는 접목으로 육성한 세 그루의 후계목(3세목)이 대를 잇기 위해 자라고 있다.

 

<위압적인 대구제일교회>

 

<후계목(3세목)>

 

<최초사과나무의 자손목>

<스윗즈주택>

 

▶서문시장에서

 

  서문시장 앞 도로 위로는 도시철도 3호선이 지나간다. 올 6월에 개통될 예정이라는데 밑에서 보기엔 전철이라기보다는 모노레일처럼 보인다(지도에 찾아보니 모노레일이 아니라 전철이 맞는 것 같다). 인천광역시에서 퇴물이 된 관광모노레일이 떠올라서 몇 사람에게 물었지만 모두들 시원스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특별히 완공을 기다리는 것도, 그렇다고 시설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노선이 칠곡까지 간다는 것이 알아낸 모든 정보이다. 지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높다란 지상으로 가는 것이 이채롭다.

  서문시장은 그 명성에 걸맞게 여러 블록을 차지하고 있는데 커다란 ‘서문시장’ 간판이 달린 블록으로 들어갔더니 길 양쪽으로 아케이드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건어물과 견과류, 생선 등을 파는 길이다. 아내가 운전하다 졸면 ‘먹인다(내가 운전 중 졸음이 많은 편이다)’며 호두와 아몬드를 산다. 하지만 서문시장은 원래 포목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함양 등 소백산지 남사면 일대는 근대 이전부터 양잠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그에 뿌리를 둔 포목 시장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것이 오늘날 서문시장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영남권 상업의 중심지인 대구의 대표 시장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한 블록을 더 들어가니 알록달록 옷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아내의 눈이 반짝인다. 내 눈엔 그저 그런 옷들로 보이는데 그 중에서 재빨리 원피스 하나를 사가지고 나오는 그 빠른 눈이란… 건물 안으로 계산하러 간 사이에 ‘대구 옷값이 싸냐’는 하나 마나한 질문을 주인아저씨에게 했더니 당연히 싸단다. 비교할 대상이 없으므로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아내가 사온 옷은 싼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집에 돌아와서 원래 의도했던 실내용으로 잘 입고 있다. 질감도 좋고 아주 편하다는 말과 함께.

 

<남산로 위로 지나가는 대구3호선>

 

<서문시장 입구 구조물. 뒷편으로 남산로 위를 지나는 신설중인 철도노선이 보인다>

 

<보통 재래시장은 골목을 덮는 아케이드를 설치하는데 이곳은 길옆으로 아케이드를 설치했다> 

 

<아내의 눈길을 끈 옷가게> 

 

<2지구종합상가 지하에는 식당가가 있다. 주상복합처럼 거의 완벽한 내부 순환구조를 하고 있는 곳이다. 여러 집을 둘러보다가 꽁치구이와 고등어조림을 선택했다. 간단히 먹기에는 무리가 없는 메뉴이다. 밥을 먹으면서 보니 이 식당가는 우리같은 외부인보다는 이 건물 내부, 또는 서문시장 안의 가게에서 전화주문을 많이 받아 배달을 주로 한다> 

 

<호젓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이런 커피숍도 나름 독특한 느낌이 있다> 

 

<서문상가 2지구 종합상가는 큰장로변의 실내 상가이다. 아동용품 가게는 왜 눈에 띄는 핑크빛일까?>

 

<서문시장을 나와 북쪽으로 달성공원 방향으로 가다보면 큰장네거리를 만난다. 큰장네거리에서 지하도로 들어서면 대신지하상가 입구이다. 천연염색가게의 옷들이 아내를 유혹한다>

 

 

▶달성공원

 

 

  대구읍성의 서북쪽, 북성로와 서성로의 꼭지점에서 700여m 서쪽에 위치한 달성공원은 드넓은 대구분지 평원 한 가운데 위치한 독립구릉이다. 해발고도가 50m 정도이고 가장 높은 성벽의 높이가 60m에 불과하지만 주변이 고도가 낮은 평지이기 때문에 방어상으로 상당히 유리한 위치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이 이곳에 성이 만들어진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반도 최초의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흙을 주 재료로 조성한 토성이다.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의 위치에 읍성이 건설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달성은 신라시대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때로는 군사적으로 대구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달성공원 정문에서 바라본 달성공원로. 사진 정면의 막다른 길에서 왼쪽으로 약 15도 정도 각을 꺾어 발달한 길이 북성로이다>

 

<달성공원과 그 주변에는 해바라기하는 노인들이 유난히 많다>

 

<달성공원은 동물원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개원 당시 대통령이 꽃사슴을 기증한 기념비의 문구는 권위주의 정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토성인 달성의 성벽은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달성의 가장 높은 부분. 해발 60여m 정도이다>

 

<토성의 서쪽 부분>

 

 

▶ 북성로-동성로-경상감영

 

<달성공원로와 북성로가 연결되는 부분에서 다시 대구3호선을 만난다>

 

<북성로 공구거리에 들어서자마자 '홍성전기'라는 가게가 나온다. 내 고향인 '홍성'이라는 글자만 봐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젠 좀 무뎌졌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내가 진짜 홍성 사람인지 물어보란다. 아내가 시키면 다하는 남자인 나 답게 냉큼가서 물었더니… 주인 이름이 '홍성'이란다>

 

<다소 거친 느낌의 공구거리 한가운데에 있는 절의 입구는 말 그대로 해탈문 같은 느낌을 준다>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바라본 북성로 공구거리>

 

<대구역 앞을 지나 동성로로 들어섰다. 동성로의 주얼리타운 입구>

 

<경상감영 하마석과 선화당>

 

<경상감사의 집무실이었던 선화당. 뒷편에는 내아 건물인 징청각이 있다>

 

<대구근대역사관은 1932년 세워진 조선식산은행 건물이다>

 

 

▶ 동화사

 

  어제 막창집 사장님이 소개해준 동화사를 가보기로 하였다. 그의 소개가 아니어도 노태우 때 언론에 많이 오르내린 유명한 절이어서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 보다 더 대구의 대명사 팔공산이 궁금하다. 산에 올라보고 싶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산행은 어려울 것 같고 대신 케이블카의 힘을 빌려서 쉽게 대구분지를 조망해볼 계획을 세웠다.

  영남지역은 전국적으로 불교세가 강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대구 출신의 노태우 대통령은 불교 신자로 불교친화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10원짜리 동전의 다보탑 도안에 불상을 새겨 넣어 대통령이 됐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런 그가 동화사의 약사여래불(통일대불)을 조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동화사 아래쪽에 파계사가 위치하고 그 근처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이다.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그의 모친 때부터 동화사와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전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했는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지만 건설 당시 대규모 자본이 대구시비와 국비 지원으로 충당되었던 것이 밝혀졌으며 더욱이 노태우비자금 사건 수사 과정에서 특정 기업에게 국책사업 공사 수주를 허락한 대가로 불상 조성 사업에 대한 시주 명목으로 수 십 억 원을 건네도록 대통령이 직접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나기도 하였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 동화사가 그때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정치사찰’의 이미지를 갖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그 통일대불은 못보고 그냥 오고 말았다. 천왕문 앞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데 해는 저물어가고 다리는 아프고, 결정적으로 그 때 그 사건의 내용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보지 않고 그냥 온 것이다. 어제 도마령 등정의 여파로(짧은 거리였는데 이상하게도 아내와 나 모두 근육통이 생겼다) 아내가 난색을 표한다. 그곳이 ‘그 곳’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내려가 봤겠지만 입구에 광고문 비슷한 현수막이 붙어 있어서 ‘기획전’ 같은 것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그냥 와버린 것이다. 하기사 불상을 봤다고 한들 거기에 숨겨진 역사는 단 하나도 볼 수 없었을 것이므로 크게 아쉬울 것은 없다.

  조성 과정에 물의가 있었지만 어쨌든 불상은 완성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하는 명소가 되었다. 아마도 많은 역사적 유적과 유물들이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규모 역사(役事)가 도모될 때 동원된 인원과 물자의 양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백성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혹은 종교의 힘으로 그 부담을 극복했을 것이며, 혹은 통치 권력의 힘으로 불만을 억누르면서 역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역사(歷史)는 그 이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상은 인정하되 그 이면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정확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고 정확한 역사적 평가만이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준다. 하나의 예로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중요한 것도 같은 이치이다. 경부선이 지금 우리의 동맥 구실을 한다고 해서 경부선을 부설한 일제의 행위를 ‘근대화의 큰 걸음’으로 칭송하면 안 되는 것이다.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 역사지만 그것을 정확히 평가함으로써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후손의 몫이다.

 

<천왕문에서 바라본 동화사 경내>

 

<초파일도 아닌데 대웅전 앞 마당이 온통 연등으로 덮여있다>

 

<대웅전 앞 마당이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멋진 그림을 만들어준다>

 

<이 동전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을 구하는 댓가로 지불한 시주로는 좀 약해 보이고 아무런 기원이 없는 순수 문화 행위는 아닌 것 같고…>

 

<봉서루에서 바라본 용호문(천왕문)>

 

<동화사 입구에서 바라본 팔공산. 케이블카가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는데다 연무가 많이 껴서 케이블카를 타는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케이블카를 타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동화사 입구에서 남쪽 방향을 바라본 장면>

 

<팔공산은 중생대 백악기 불국사화강암류로 이루어진 반면 대구분지 내부는 주로 대동계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반적인 침식분지와는 다른 지질 양상을 보인다. 팔공산 케이블카 승강장에 있는 화강암 풍화층 노두>

 

<케이블카 승강장 진입로의 중앙선은 귀여운 12지신 캐릭터로 장식되어 있다>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갓바위가 대구 답사의 마지막 코스이다. 어제 막창집 사장님이 갓바위 부처님께 소원을 빈 덕분에 아들이 원하던 대학에 갔다면서 들려준 이야기이다. 만약 소원을 빈다면 우린 무슨 소원을 빌까? 큰 아들의 취업? 작은 아들은? 역시 취업… 우리의 소원이 모두 자식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거창한 '통일'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문제도 아닌. 무엇보다 자신의 문제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소원을 성취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이젠 경험으로 안다. 아들들에게도 무언가 절실한 소원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불자도 아닌 우리가 난데 없이 소원을 빈다고 갓바위 부처님이 들어 주실리도 없지만 어쨌든 갓바위까지는 갈 수가 없다. 주차장에서 50분 정도 걸린다는 관리인의 말을 듣고 보니 시간상 갔다가 올 시간이 못된다. 오늘은 울산까지 가야 하므로 이제 길을 나서야 한다. 대구-포항고속도로(20번)을 타고 대구쪽으로 되돌아가서 경부고속도로로 바꿔타려고 했는데 네비양은 국도로 동남쪽으로 간 다음 영천IC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직접 타라고 알려준다. 어느결에 나는 네비양의 사고를 하게 되었는데 반대로 네비양은 평소 나의 길 선택법으로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거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