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영남 일주

영동-생전 처음 가보는 곳

Geotopia 2014. 1. 23. 07:45

▣ 답사 일: 2014.1.14(화)~15(수)

 

주요 답사지: 영동읍, 영동향교, 옥계폭포, 심천유원지, 양산면 가선리, 도마령, 황간향교, 추풍령

 

▶ 생전 처음가보는 곳, 영동

 

  원래는 옥천에서 1박을 할 생각이었다. 금강 상류의 감입곡류를 봐야하기 때문에. 그런데 옥천구읍에서 옥천의 중심지로 이동해서 숙소를 찾다가 외곽으로 나오고 말았다. 구읍에서 옥천역으로 가다가 통계청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빠졌더니 금세 외곽지역이 나와버린 것이다. 내 고향도 이 정도 규모인데 여러 해 떠나서 살다보니 그새 읍단위 소도시(정확한 용어가 항상 헷갈린다. 도시라고 해도 되나? 그렇다고 촌락이라고 할 수도 없고…)의 내부구조에 익숙하지 않게 된 것이다. 거참…

  다시 들어가려고  우회전을 했더니 마땅한 숙소나 먹거리가 안보여서 그랬는지 아내가 그냥 영동으로 가면 안되냐고 묻는다. 반드시 옥천에서 가봐야 할 곳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게다가 금요일까지는 부산에 가야한다는 점까지 생각해 보니 그 편이 나을 것 같다. 또 한 가지 나이가 들면서 깨달아 가는 사실. 여행 첫날부터 중요하지 않은 이유로 의견을 달리할 필요가 없다. 날도 저물어가니 이동하는 시간을 밤으로 해서 아까운 낮 시간을 이동으로 허비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도 있다. 한 가지 문제점은 영동에서 옥계폭포나 심천을 가보기 위해서는 옥천쪽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미 기수는 영동으로 향하고 있다.

  영동은 아직까지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곳이다. 후배 원기의 고향이라서 좀 귀에 익었을뿐이지 실제로는 초행이다. 경부고속도로가 통과를 하니까 지나가면서 황간이니 영동IC는 몇 번 본 것이 내 영동 경험의 전부이다. 아! 영동에 얽힌 추억이 하나 있기는 하다.

 

▶ 생전 처음 와보는 곳에 추억이 있다?

 

  대학 3학년때 지리과 동기들과 동해안·설악산 답사를 가기위해 서울 강남터미널 '영동선' 앞에서 집합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다들 시간에 맞춰서 속초행 개찰구 앞에 모였는데 친구 한 명이 시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질 않는 것이다.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충북 영동' 생각이 났다. 몰두 스타일인 이 친구 평소 소행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 싶어 얼른 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런데 이 친구 반응이 또 걸작이다. 시간은 다 됐는데 어째 한 놈도 안 나타나다가 이제서야 오느냐고 뎁쎄('도리어'라는 뜻의 우리 내포 사투리다. 이럴 땐 이 말이 딱이다. 그 친구도 내포 당진사람이었으므로) 화를 내고 난리부르스다. 일단은 시간이 다 됐으므로 알았다고 하고 가까스로 속초행 버스를 탔다. 그 친구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분명히 약속이 잘못 됐다. 영동고속도로를 타야 하는 속초가 목적지였으므로 '영동선'이라고 했던 것이지만 분명히 터미널 승차장에는 '영동'이라고 써 있는 개찰구가 하나뿐이니 말이다. 어쩌면 그 친구 혼자서 갔을지도 모를 그 영동을 이제 가보게 된 것이다.

 

<어둠이 내리는 영동교>

 

▶ 인자한 노부부의 손맛

 

  4번 국도를 달려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영동읍에 들어섰다. 일단 숙소를 구하기로 하고 거리의 모양을 살펴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취 장식이 멋진 영동교를 건너면 바로 중앙로로 들어선다. 영동교 아래를 흐르는 영동천은 아까 지나온 심천에서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마침 장날이었던 듯 도로 양편에서 노점들이 좌판을 거두고 정리하느라 부산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골목으로 들어가 일단 숙소를 정하고 먹을 거리를 찾아서 다시 중앙로로 걸어 나왔다. 중앙로는 역시 중앙로답게 마땅한 음식점이 없고 주로 옷가게나 고급서비스 가게들이 주로 입지한다. 시장통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벌써 파장이 다 되어 대부분 문을 닫았다.

 

<파장중인 영동시장>

 

  원기에게 영동 냄새가 물씬 나는 음식점을 알려 달라고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카톡을 넣어봤다. 엇그제 안나푸르나에 있다고 했었으므로 연락이 안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역시 답이 없다. 여전히 히말라야 어디쯤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길 옆 가게에 물었더니 올갱이해장국집을 알려준다. 옥천부터 노리고 있었던 금강 특산 '도리뱅뱅이'집은 양산면에나 가야 있다고 한다.  초저녁인데 벌써 시내가 한적해서 어디 돌아다니기도 그렇다. 쐬주를 한 잔 곁들이기엔 올갱이는 별로 일 것 같아서 포기하고 숙소쪽으로 가다보니 돼지껍데기집이 있다. 아내가 좋아하지 않는 메뉴이므로 당연히 반대를 예상하고 지나가는 말로 찔러 봤더니…

  예상을 깨고 오케이를 한다.

  엥! 이 아줌마가 배가 많이 고픈가?

  메뉴 느낌에 걸맞게 실내가 아담한 집인데 노부부가 운영을 한다. 손님들도 제법 쏠쏠한 것이 근동에서는 소문이 괜찮게 난 집인 것 같다. 재작년에 마라톤을 완주한 사진을 걸어 놓았는데 주인공이 주인아저씨이다. 인자한 노부부의 눈길과 함께 손맛이 느껴지는 청국장, 그리고 쫄깃한 돼지껍데기와 쏘맥을 가볍게 맛봤다.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접시에 담아 내다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서 껍데기가 굳어버린다는 점이다. 다시 덥혀 달라고 하기에는 양이 적고, 안주는 조금 더 필요하고… 청국장 남은 뚝배기에 껍데기 남은 것을 넣고 살짝 끓였더니 와~ 이게 쫄깃한 맛도 되살아나고 보기보다는 맛이 괜찮다! 갈 길이 멀으므로 첫 날부터 무리하면 안된다.

 

<우연히 찾아들어간 집에서 꼬들꼬들한 돼지껍데기 안주와 쐬주 한 잔!>

 

▶ 영동향교-면면히 살아있는 유교 사상

 

  이번 여행에서 아침은 생략하기로 했다. 낯선 곳에서 아침부터 해장국집 찾아 다니려면 허비되는 시간이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영양 과다로 여행이 끝나면 부부돼지가 될 수도 있가 때문이다. 아내가 미리 챙겨온 선식(곡물가루)과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길을 나섰다. 옥천도 영동도 공통적으로 과거 중심지의 증거인 읍성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향교를 찾아보기로 했다. 향교는 성밖에 설치하지만 읍성에서 아주 먼 곳에 설치하지는 않으므로 향교를 통해서 과거의 중심의 자취를 혹시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영동향교는 시내에서 영동천을 건너 시내 서쪽의 산기슭에 있다. 대성전 앞에서 바라보니 명륜당 지붕 옆으로 영동 시내가 건너다 보인다. 과거 이 일대에 고성지(古城址)가 있었고 향교가 고성지 안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과거 영동현의 중심은 이 일대가 아닐 수도 있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영동읍성은 영동천의 북쪽에 위치하며 성(城)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 영동 일대>

 

 <영동향교 대성전. 공자(大成至聖文宣王)의 위패를 중심으로 오른쪽(사진 왼쪽)에 증자(郕國宗聖公), 맹자(鄒國亞聖公), 왼쪽에 안자(兗國復聖公), 자사(沂國述聖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김경일교수는 주장했지만 대성전에는 공자가 여전히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당당히 추앙을 받고 있다. 향교의 한쪽에는 노인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있는 듯 연세 지긋한 분들이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모여 들고 있고 경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분의 유학 강연이 방송되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세상을 꿰뚫는 철학이 바뀌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은 오랫동안 그 관성을 유지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지 백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유교철학은 '충', 또는 '효'의 형태로 우리 사회에 남아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진중권교수를 지팡이로 때리던 노인들을 합리적 법논리로 비판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이며, 선거 때마다 문중 행사를 쫓아 다녀야 하는 것이 우리 정치인들의 필수 행사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공자의 '인'과 '의'는 어디로 갔는지 공맹의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서 자신을 변호하는 논리로 변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5성의 바깥쪽에는 우리나라의 거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공자 위패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박세채(玄石文純公), 송시열(尤菴文正公), 조헌(重峰文烈公), 성혼(牛溪文簡公), 김인후(河西文正公), 이언적(晦齋文元公), 정몽주(圃隱文忠公)… >

 

<왼쪽에는 송준길(同春文正公), 김집(愼獨齋文敬公), 김장생(沙溪文元公), 이이(栗谷文成公), 이황(退溪文純公), 조광조(靜巖文正公), 김굉필(寒暄堂文敬公), 안향(晦軒文成公)…>

 

  향교에 많이 가보기는 했지만 대성전을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처음보는 대성전의 내부구조는 첫 느낌이 사대적이다. 가운데 공자를 중심으로 그 앞에 맹자, 증자, 안자, 자사의 위패가 있고 그 바깥쪽으로 우리나라의 거유 22위의 위패가 호위하듯 서 있다. 사학인 서원들이 지역, 가문, 정치적 입장에 따라 관련이 있는 몇몇 사람을 제향하는 것에 비해 공립학교인 향교는 많은 사람들을 제향하여 지역색, 당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난계예술회관 앞에서 바라본 영동천과 영동읍>

 

<남쪽으로 민주지산을 필두로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멀리 보인다>

 

<난계 박연이 영동 출신인 것을 계기로 이런 이미지 만들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 옥계폭포

 

  난계 박연이 영동에 연고가 있는 인물인 것은 와서 알았다. 그러니 그가 옥계폭포와도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몰랐다. 솔직히 박연이라는 인물이 지리학도에게 크게 의미가 있는 인물도 아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폭포 주변의 암석 노두와 지형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날씨가 매우 추워 난간도 없는 다리가 얼어 버려서 다리 앞에 차를 세우고 털모자를 뒤집어 쓰고 가야만 했다. 주머니에 장갑을 넣었다 빼다가 휴대폰 블루투스 수신기도 잃어 버렸다.

<옥계폭포 입구에 있는 절(천국사)에는 이런 특이한 불상이 있다>

 

<옥계폭포 가는 길에 있는 가로등. 포도와 감, 그리고 새로 장식되어 있다>

 

 <박연폭포로도 불리우는 옥계폭포와 박연 동상>

 

<추운 날씨 때문에 빙벽으로 변한 옥계폭포>

 

<박연과 선녀를 캐릭터로 만든 옥계폭포 앞의 가로등과 스피커>

 

<옥계폭포 일대는 석영반암을 중심으로 불국사화강암 계열의 암석이 주를 이루며 백악기 퇴적암이 일부 나타난다>

 

 

▶ 심천유원지-금강 상류의 하중도

 

  오래 전에 대전에 살 때 가끔 들었던 곳이 바로 이곳 심천유원지이다. 물론 와보지는 못했다. 지도를 보니 곡류가 심한 금강 본류에 넓은 하중도까지 있어서 금강 상류의 지형을 잘 볼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하게 되었다. 의외로 길을 못 찾아서 심천면 소재지까지 들어갔다가 돌아 나왔고, 여름에나 북적거릴 황량한 하천 유원지를 기웃거렸으며, 하중도를 조망할 자리를 찾지 못해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답사지였다.

 

<금강본류와 영동천, 최강천의 합류지점에는 규모가 큰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다.

 

<심천면 초강리 일대에는 넓은 하곡분지가 발달하는데 최근에는 논농사보다는 비닐하우스나 과수농업이 많아지고 있다>

 

▶ 도리뱅뱅을 찾아 가는 길

 

 옥천에서 부터 간판에 써 있는 도리뱅뱅을 보고 옛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예전에 갈산고에 근무할 때 갈산중 선생님께 얻어 먹어본 요리여서 인상이 깊게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금산이 고향인 그 선생님이 직접 학교 옆 개울에 나가 잡아온 민물고기로 만들어주셨던 그 요리. 아내에게 말했더니 한 번 먹어보고 싶단다. 어제 영동 시내에서는 못 찾았지만 기왕에 심천까지 왔으니 가보기로 한다.

 

<이런 유교 경관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강면과 양산면을 연결하는 죽청교>

 

<죽청교에서 바라본 금강 상류. 무진장에서 시작되어 금산을 지나 이곳에 이른다>

 

<양산면 봉곡리 금강변에 있는 강선대(降仙臺). 선녀가 내려올만한 절경이다. 바로 하류쪽으로 보이는 다리는 봉곡교이다>

 

<강선대에서 바라본 금강 상류. 왼쪽에 송호국민관광단지가 있다>

 

<어미를 따라 나온 송아지가 강선대 주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녀석이 신선이다>

 

 

▶ 양산면 가산리 도리뱅뱅

 

  드디어 가산리 도착!

  길 옆으로 비슷한 식당이 몇 개 있는데 인터넷으로 검색이 되는 집을 찾았다. 아직 때가 일러서 조용한 편인데 자리에 앉고 바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영동보다는 오히려 금산이 가까워서 금산쪽에서 많이 오는 것 같다. 음식점에서 먹어보는 것은 처음이고 아내는 아예 처음이다. 가격도 착하고 맛은?

 

<가선식당 메뉴판. 간단 명료하다. 가격도 착하고>

 

<모양이 먹기 아까울만큼 이쁘다. 빙어로 만들었단다. 왜 이런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

 

<체험삼아 먹어본 도리뱅뱅 덕분에 배가 불렀지만 그래도 명물 어죽을 안 먹을 수는 없다. 양이 많은데도 바닥을 비우고야 말았다>

 

 

▶ 무주를 거쳐 황간으로

 

  지도를 보다가 무주를 거쳐 황간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나의 변덕은 나도 못 말린다. 송호관광지를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를 생각이었지만 포기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의 여행에서는 '이따가 돌아올 때'가 없다. 잘 알면서도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

  길 옆으로 유교적 경관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신도비가 묘갈이 아니라 대부분 근래에 조성된 것들이다. 이런 경관들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가치관이 강했던 지역보다는 오히려 그 외곽에 잘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즉, 유교가 통치 이데올로기였을 당시에 그 핵심에 있지 못했던 사회집단이 유교가 통치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잃음으로써 지배집단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그것을 뒤늦게 향유하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관성들은 백 여년 이상 꽤 오래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영동 특산물 감 모양으로 만들어진 시내버스 정류장>

 

<포도 역시 영동의 특산물이다. 학산면 지내리 금강모치마을. 겨울에도 비닐 멀칭을 씌워놓는 이유를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아마도 더 맛있겠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비를 덜 맞칠수록 맛이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겨울에 씌워놓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 마을은 의령남씨 종족촌락이다>

 

<유교적이지만 전통적이지는 않은 독특한 경관이 많다. 공덕비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조상대대로 인물들이 거명되는 조선시대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현대판 비문>

 

<학산면 지내리에서 황산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포도밭. 학산면 황산리>

 

 

▶ 전북 무주를 살짝 지나다

 

  칠봉산 압치고개를 넘으면 무주군 무주읍이다. 이 산줄기는 백두대간의 민주지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으로 금강을 만나 끝을 맺는다. 501번 지방도로가 학산면 황산리에서 19번 국도와 합류를 하는데 이 길은 잘 만들어진 4차선의 새길로 영동과 무주를 연결한다. 우린 새 길과 나란히 뻗어 있는 옛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무주읍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오산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30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진행한다. 좌회전을 하자마자 고가도로로 지나가는 19번 새길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잠깐 헷갈려서 차를 멈췄다. 휴대폰의 지도 어플이 얼마나 유용한지 모른다. 이후로 위급할 때는 아내 휴대폰의 네비양 신세도 많이졌다. 계속 이 길을 따라가면 설천면 무주리조트가 나온다.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에서 남대천 너머 영동군 용화면 용강리를 바라본 산줄기. 민주지산에서 갈라져 내려온 지맥이다. 능선에 소나무가 자라고 습기가 많은 계곡에 활엽수가 자란다>

 

▶ 민주지산 자락을 넘어서

 

  이름에서부터 뭔가 있어 보이는 '민주지산!' 1,242m에 이르는 이 산은 백두대간에서 약간 벗어난 지맥상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백두대간의 연봉들에 버금가는 위용을 자랑한다. 무주리조트 향적봉에 올라보면 북쪽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산이 바로 민주지산이다. 하지만 민주지산은 '民主'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름으로 '岷周之山'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산 주변의 산'이라고 할까? 백두대간의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어쨌든 올라가 볼 수는 없지만 그 자락이라도 넘어보려고 이 길을 선택했는데 가다보니 잘 한 선택이었다. 설천면 청량리에서 30번 국도을 벗어나서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49번 지방도로를 탄다. 금강의 상류인 하천(남대천)을 넘으면 바로 다시 영동군(용화면)이 된다. 이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민주지산-각호산(1,176m)-천만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앞쪽으로 보이는데 그 위용이 대단하다. 능선은 하얗게 눈에 덮여있다.

 

<49번 지방도로에서 바라본 민주지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앞에 보이는 산은 각호산이다> 

 

<도마령에 있는 전망대. 도마령은 천만산과 각호산 사이의 고개로 민주지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상에 있다>

 

<도마령은 용화면 조동리와 상촌면 둔전리를 잇는 고개이다>

 

<도마령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이런 정자(上龍亭)가 있는데 오래되어 이렇게 됐다>

 

<도마령에서 북동쪽(상촌, 황간 방향)을 바라본 장면>

 

 <도마령에서 남서쪽(용화, 무주 방향)을 바라본 장면.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이 덕유산 향적봉(1,614m)이고 정면에는 백운산(1,010m)이 보인다. 백운산 오른쪽 뒷편으로 살짝 고개를 내민 산은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이 있는 적상산(1,029m)이다>

 

<구비구비 이어지는 도마령고개>

 

 

▶ 물한계곡에서 점을 찍고

 

  전혀 계획에 없던 곳인데 49번 지방도로를 타고 황간을 향해 가다보니 표지판에 '물한계곡'이 보인다. 물한계곡은 민주지산의 북동쪽 자락에서 흘러나오는 계곡으로 이름이 낯 익은 것으로 보아 꽤 유명한 유원지인 모양이다. 겨울이라서 복잡할 일도 없을 것 같아서 경관이라도 볼 생각으로 방향을 꺾었다.

 

<상촌면 고자리 삼봉산 자락에 이런 Talus가 발달한다. 이 일대는 선캄브리아기 흑운모편마암이 분포한다>

 

<물한계곡. 이 일대 역시 흑운모편마암 지역이다. 전형적인 북동-남서 방향의 절리가 발달한다(촬영시간이 15:14로 태양이 대략 남서쪽에 있을 때이다)>

 

 

▶ 황간향교에서 

 

  지금의 영동군은 조선시대에는 영동현과 황간현, 두 현이 합쳐진 것이다. 황간현은 추풍령을 통하여 금산현(지금의 김천)과 연결 되었는데 추풍령은 조령과 함께 영남과 한성을 연결하는 중요 통로였다(위의 대동여지도 참조). 지금은 작은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리적 중요성이 훨씬 컸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황간향교는 초강천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향교 옆에 있는 가학루(駕鶴樓)에 올라보면 동남쪽으로 펼쳐진 넓은 하곡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금강의 최상류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런 너른 평야가 있으므로 과거 취락의 입지로 상당히 좋은 위치라고 볼 수 있다.

 

 <황간향교 명륜당>

 

 <대성전 입구. 가운데 통로는 신도문(神道門)이므로 통행하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

 

 <가학루에서 바라본 초강천 유역 평야. 경부선, 경부고속도로, 4번국도가 모두 이 평야를 지난다>

 

<안숭선(安崇善)시비와 시비보다 더 큰 시비기념탑. 우리의 '이름내기 문화'는 비단 이곳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에 뿌리깊이 박힌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의미라면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지만 우리사회의 이름내기 문화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조선시대 이래로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온 관료주의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향교 앞 마을의 돌담들은 이런 둥근돌들로 되어 있다. 이러한 둥근돌들은 과거 이 일대가 하천의 작용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약 200~210m로 160m 정도인 하천과의 고도차가 40~50m에 이른다. 따라서 이곳은 하안단구라고 볼 수 있다>

 

 

▶ 황간면에서도 중심 이동의 흔적이 보인다


<향교가 있는 야트막한 야산의 남쪽 사면은 급경사면으로 과거 초강천의 공격사면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급사면에는 이런 대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다>

 

<향교가 있는 야산에서 바라본 황간면 소재지. 정면은 관공서와 학교 등이 있는 과거 중심지이고 왼쪽은 황간역과 주변의 시가지이다>

 

  황간은 규모가 작은 면이지만 이곳에서도 기존 중심지가 이동한 흔적이 보인다.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들과 초중고 학교들은 모두 초강천의 북쪽, 향교가 있는 산의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황간현은 초강천의 북쪽에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경부선 철도는 초강천의 남쪽을 지나가며 그 주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물론 이곳에서는 중심지가 완전히 이동해버리지는 않았지만 역 주변의 시가지들은 역과 함께 새롭게 성장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존 중심지를 우회하여 철로를 설계한 것은 기존 세력을 와해시키고자 하는 일제의 의도가 작용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나라 읍성의 전통적 입지를 볼때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다. 즉, 전통적 읍성의 입지는 산록을 지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하곡 주변의 평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철도는 넓고 평평한 지형이 건설에 유리하다. 그러니 과거의 중심이었던 읍성과 새로운 교통로였던 철도역이 일치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또한 기존 중심지를 통과하게 되면 주민 이주 등 복잡한 문제들이 파생하므로 우회로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교통로를 따라 중심지가 이동하는 현상은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한반도의 '목', 추풍령

 

  향교 아래 마을 이름은 구교리이다. 과거에 향교가 있던 자리라는 뜻이다. 구교리를 지나 황간면을 잠깐 둘러보고 바로 4번 국도를 타고 추풍령으로 향했다.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 기념탑이 제법 높은 곳에 있다고 나는 항상 생각해 왔다. '추풍령'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과 함께 휴게소에서 내려서 보면 경부고속도로 건설 기념탑이 높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당연히 그런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국도로 추풍령을 넘게 되면서 구불구불 옛길을 떠올리고 있었다. 추풍령면 소재지에서 주유를 하면서 직원에게 물었더니 '고개도 아닌데요?' 하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내가 왜 그러냐고 묻길래 이 동네가 다 높은 곳이라서 왠만한 고개는 고개로 보지도 않는 모양이라고 둘러댔다. 그러면서도 아주 심하지는 않아도 어지간한 고갯길은 있을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추풍령으로 향했다.

  정말 어이가 없다. 평지에 갑자기 '영남의 제일관문 김천시' 안내판이 나타난 것이다. 차를 세우고 지도를 뒤져봤더니 틀림없이 추풍령을 넘고 있다. 이 일대는 모두 해발 210m 안팎으로 꽤 긴 구간이 해발 200~210m 상태로 유지가 된다. 그렇지만 분명히 금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의 분수계이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를 중심으로 추풍령면 소재지부터 김천시 봉산면까지 해발 300m 이하의 구간의 폭이 2km 이내가 되는 협곡이 약 4km 정도 계속된다.

  그래서 이런 곳은 '목'이 된다. '목'은 가늘면서도 모든 혈관이 통과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신체 부분이다. 그래서 '목을 치는 것'이다. 신체의 손목, 발목이 있다면 땅 위에는 '길목'이 있다. 바로 이곳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길목이다. 철도, 고속도로, 국도가 모두 이 구간에서 가장 인접하여 통과하고 있다. 혈관이 모인 목처럼. 백두대간을 넘고자 한다면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인체의 목처럼 매우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을 수밖에 없다.

<갑자기 나타난 김천시 안내판>

 

<교통로가 집중되어 있는 추풍령 구간>

 

<4번 국도(옛길)에서 바라본 경부고속도로. 그 옆으로 경부선철도도 지나가지만 낮아서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 김천에서 대구로 직행! 

 

  김천, 구미를 거쳐 대구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왠지 김천, 구미는 땡기지 않는다. 김천, 구미를 다녀간지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직접 대구로 가기로 결정했다. '금오산 케이블카나 타볼까?' 했더니 아내가 지난 번에 타고 금오산에 갔었단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헐~ 치매가 분명하다. 시간도 벌써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데 돌아다닐 수는 없고 그냥 머물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다. 김천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로 직접 달리기로 결정한다.

 

<김천IC 앞의 조형물. 상모를 형상화한 탑에 '역동의 혁신도시'라는 글귀를 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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