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영남 일주

옥천구읍

Geotopia 2014. 1. 20. 21:39

▶ 답사 일 : 2014년 1월 14일(화) 

 

  청남대에서 509번 국도를 타고 나와서 571번 국도를 타고 대전 방향으로 이동한 다음 경부고속도로를 가로지르면 바로 4번국도와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이동한다. 둔주봉과 독락정 등 금강 감입곡류를 볼 수 있는 곳을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서 내일로 미루고 먼저 시내에 있는 정지용생가와 육영수생가를 가보기로 했다.

 

<옥천구읍과 옥천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신읍>

 

  무척 오랫만에 와보는 옥천읍은 변함없이 규모가 아담한 소읍이다. 십 년도 더 전에, 그것도 문상을 왔던 것이 나의 유일한 옥천 경험이었으니 사실 옥천은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중심가에서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옥천군청이 나오고 군청을 지나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하면 옥천구읍이 나온다. 정지용생가와 육영수생가는 모두 옥천 구읍에 위치한다.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옥천군청이 옥천역 인근에 입지하면서 중심지가 이동하였다. 일제의 전형적인 기존 중심지 흔들기가 옥천읍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많은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옥천은 그 중에서도 그 자취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옥천구읍은 읍성터는 남아 있지 않지만 지명이나 유교 유적 등을 통해서 기존 중심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판의 정지용 일대기는 월북 이전에 멈춰있다. 복권이 됐지만 분단 현실은 여전히 반쪽짜리 복권만 허용하고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로 시작되는 나의 애창곡 가운데 하나인 '향수'의 고향, 정지용생가가 옥천 여행의 첫번째 방문지이다. 먼저 생가의 동쪽을 살펴보게 된다. 기대했던 넓은 벌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정지용은 자신의 실제 고향을 노래했다기 보다는 관념적인 고향을 노래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집 옆으로는 시에 나오는대로 실개천이 흘러 나간다. 남향집이지만 사립문은 서쪽으로 개울을 향해 나 있다.

  집 앞의 안내판은 월북, 또는 납북과 관련된 내용이 모두 빠져 있다. 그의 시는 한국전쟁 이후 철저히 묻혀졌다가 1988년이 되어서야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바로 월북, 또는 납북(아직까지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경력 때문이었다. 어쩌면 정지용의 생애와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안내판은 그냥 두리뭉수리하게 그의 일생을 적어 놓았다. 나처럼 시를 모르는 문외한이 들어도 서정성이 물씬 느껴지는 정지용의 시가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되어 오랜 세월 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시가 해금되었을 때 그 무시무시한 낙인과는 달리 뛰어난 서정성 때문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지용생가 주변 길의 이름은 '향수로', 정지용의 시에서 따 온 이름이다. 어렵게 복권이 되었고 이제 길의 이름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넘어 그의 삶과 문학을 자유롭게 논할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소박한 집이다>

 

<사립문이 정겹다>

 

<옥천구읍임을 알 수 있는 증표가 엉뚱하게도 식당 이름으로 남아있다>

 

<정지용의 고향 마을은 연일정씨 종족촌락이다. 마을에는 연일정씨 효자정려가 있다>

 

  정지용생가에서 육영수생가까지의 거리는 불과 600여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정지용은 1902년생이고 육영수는 1925년생이니 생전에 아마 서로 마을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두 집 사이에는 옥천향교가 있어서 이 마을 이름은 교동이다.

  소박한 초가인 정지용생가와는 달리 육영수생가는 말 그대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더불어 정지용생가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해설사가 육영수생가 입구에는 있는 것도 차이점이다. 모두 해설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관계자가 셋이나 된다. 박근혜대통령 취임 이후 일어난 변화일까? 방문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것이다.

 

<가까운 옆 마을에는 육영수생가가 있다. 연못과 차고가 있는 대저택이다>

 

<내 경험으로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 보기 드문 대저택이다>

 

<구중궁궐에 버금가는 안채>

 

  이 대저택의 주인공은 육영수의 부친인 육종관인데 일제 강점기에 자동차를 소유할 정도로 엄청난 거부였다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자료들을 뒤져보니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친서민적 이미지로 남편의 독재자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했던 생전의 영부인이 사실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니…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그의 부인 에바가 떠오른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인기를 누렸던 에바는 독재자 페론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정책을 내세웠지만 결국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침체로 아르헨티나를 선진국의 문턱에서 무릎 꿇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도 그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노력한 '성녀'로 기억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하니 이미지 정치와 대중조작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연일정씨 종족촌락이었고 옥천육씨 종족촌락은 이곳이 아니고 이곳에서 대략 50여리 떨어져 있는 청성면 마장리라는 곳이라고 한다.

 

<마성산은 옥천 구읍의 주산이다>

 

<관아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비석거리에서 송덕비들을 옮겨 놓았다>

 

<전임관 송덕비 때문에 백성들 등골만 휘었다는…>

 

<사마시에 합격한 지역 유지들의 모임방인 사마소가 남아있다>

 

<사마소 앞 골목은 옛모습 그대로이다. 뒤에 보이는 산이 옥천현의 주산인 마성산>

 

<사마소 앞 거리 풍경. 구읍지역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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