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지역 정체성&지명

부여 정체성: 백제의 고도

Geotopia 2022. 9. 21. 06:28

▣ 부여군 공동 브랜드 굿뜨래

 

  지역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가장 일반적인 것은 지역의 특산물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금강변의 너른 평야를 끼고 있는 부여도 멜론, 수박, 방울토마토 등 많은 특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어느 것을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내세울 것인지는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문제라서 결정이 쉽지 않을 것이다. 부여는 이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했다. 이 모든 특산물들을 백제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구드래와 연결한 것이다. 한 가지 상품을 크게 부각시키지는 못했지만 여러 특산물을 공평하게 아우르는 상징을 만들어 냈다. 개개의 특산물보다 더 크고 강력한 지역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

 

*부여군

 

▣ 부여의 아이콘: 백제

 

  군의 상징 마크와 상징 아이콘 역시 '백제의 고도'를 활용하였다. 부여군 상징 마크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에 새겨진 봉황과 백마강을 주요 소재로 형상화 하였다. 부여의 상징 아이콘 역시 백제금동대향로를 활용하였다. '금동이'라는 이름의 상징 아이콘은 백제금동대향로를 의인화한 것이다.

 

부여 상징 마크
부여의 상징 '금동이'

 

  '백제인'을 아이콘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화장실의 성별 표시가 백제인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정겹다. '백제의 수도'는 '부여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임을 잘 보여준다.

 

 

▣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지역 이미지, 백제의 도읍지

 

  「택리지」충청도條에는 부여에 대한 기록이 짤막하게 등장하는데 전체적으로 '백제의 도읍지'가 주제이다. 이중환은 당시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이었고 인문 지리서를 지을 만큼 우리나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택리지」기록을 당시 부여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조선후기에도 부여는 '백제의 도읍지'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주의 서남쪽이 부여인데 백마강 가이며 백제의 옛 도읍터이다조룡대낙화암자온대고란사는 모두 백제 시대의 고적이며강에 다다르면 암벽이 기이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또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작고 비좁아서 평양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
                                                                           「택리지」충청도條(이익성 譯)

 

  오늘날은 '백제의 고도'가 관광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소재이므로 부각시킬 여지가 충분하지만, 조선시대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당시 '백제의 고도'라는 인식은 의도적으로 부각되었다기 보다는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살아서 이어져 내려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려 1,200여 년을 계속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백제의 고도'가 그 자체로 강렬한 역사적 엑센트라는 의미와 함께 그것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특징이 백제가 멸망한 뒤로는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1872 지방지도(부여현)>에서도 부여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八景'이 표시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백제와 관련된 경관이다. 

 

<1872 지방지도(부여현)>

 

▣  일제 강점기의 부여: 식민 통치 논리를 확산하기 위한 도구

 

  일제는 '백제의 고도'라는 이미지를 크게 부각시켰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백제의 고도'라는 이미지를 활용하였다. 식민사관인 '일선 동조론'의 좋은 증거들이 많은 곳이 부여다. 이를 간파한 일제는 병합 직후부터 부여의 백제 유적 발굴에 몰두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이나 삼한정벌론 등 왜곡된 고대사의 증거를 찾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었다. 일제는 고대 역사에서 객관적 논리를 싹 빼버리고 한일간의 현상적 공통점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일선 동조론'을 정당화 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개발한 고적들은 부여8경을 비롯하여 평제탑, 청마산성, 능산리고분군, 고란사, 낙화암, 백화정 등으로 이들은 대부분 일제가 식민사관에 의거하여 재해석하거나 재구성한 유적들이다. 일제는 특히 '멸망한 도읍지'를 부각시킴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하게 누르고 식민통치를 정당화 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일제의 정책은 의도는 매우 불순했지만 조선시대까지 거의 망각의 도시였던 부여를 '백제의 고도'로 부각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고대왕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대왕국으로서의 당당한 이미지가 부여 정체성으로 부각되고 있다. 여러 상징물들은 이러한 이미지가 정착되고 확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백제문화단지

 

 

백마강을 따라 흘러간 영화, 부여

▣ 부여 정체성: 백제의 도읍지, 그런데… '부여'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백제의 도읍지'이다. 도읍지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방어, 교통, 경제활동 등 다양한 조건들이 다각적으로 고려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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