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지역 정체성&지명

봉화: 奧地性에서 비롯된 지역성

Geotopia 2017. 8. 6. 16:22

  '奧'는 '아랫목', '깊다', '속'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글자다. 그러니까 '奧地'라고 하면 '내륙 깊숙한 곳'으로 풀이할 수 있다. 보통 '개발이 덜 된 촌 동네'를 뜻하는 말로 쓰이지만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을 뜻하는 말로 나쁜 어감의 말은 아니다.

  경북 봉화는 전형적인 내륙 오지이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직선 거리로 64km에 불과하지만 태백산지를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 거리는 상대적으로 먼 곳이다. 이러한 특징은 지형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즉, 소백산지(백두대간)와 태백산지(낙동정맥)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해발고도가 높다. 봉화읍 중심부에 있는 봉화군청의 해발고도가 200m에 이르며 주변에는 1,000m를 넘는 산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봉화의 독특한 지역성을 만들어냈다.


<산경도 *자료: '월간 산'>



<음영기복도 *자료: Google earth>


▶ 피난, 피세지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던 곳이 봉화의 청량산이라고 한다. 전통 풍수사상은 피난, 또는 피세에 유리한 땅을 勝地로 꼽는다. 개경에서 먼 이곳까지 피난을 왔다는 사실은 봉화가 난을 피하기에 좋은 장소였다는 의미다.



<청량산 두들마을>


  봉화의 닭실(酉谷)은 풍수상의 길지로 손꼽히는 곳으로 金鷄抱卵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전기 안동권씨 權橃이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이래 마을이 번성하여 손꼽히는 종족촌락이 되었다. 봉화에는 닭실 외에도 많은 종족촌락이 번성하였다. 계곡을 따라 정자가 104개나 있을 만큼 많은 양반 사대부들이 이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었다.



<닭실마을 靑巖亭>


  공민왕이 피난지로 선택했던 이유와 안동권씨가 닭실에 근거를 마련한 이유는 모두 봉화의 지리적 특징, 즉 오지성에 원인이 있다. 피난, 또는 피세에 유리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치 특성은 조선시대 史庫가 이곳에 만들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태백산 사고'는 조선의 5대 사고 가운데 하나인데 사고는 공통적으로 외침의 위험이 적은 위치를 선택했다.


<닭실마을>

 

▶ 黃腸封山


  속이 누런 소나무, 즉 '黃腸木'은 조선시대 권력과 부의 상징이라고 할 만 했다. 왕궁을 짓는 건축자재로 썼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장례에서는 반드시 황장목으로 관을 만들었다. 껍질을 벗겨내면 외곽부분은 흰색을 띄는데 이 부분은 쉽게 썩기 때문에 이 부분을 깎아 내고 그 안쪽의 누런 부분만을 사용했다. 이 부분은 송진 때문에 방수가 잘 되어 나무를 쉽게 썩지 않도록 한다. 왕실에서 사용했던 귀한 목재였으므로 세도가의 양반 귀족들이 어거지로 이를 확보하여 집을 짓기도 했기 때문에 황장목은 조선시대 왕실과 귀족들의 상징이 되었다.

  한반도의 재래종 소나무는 적당한 크기로 자라면 모두 속이 누런 색인 황장목이 될 수 있었지만 특히 금강산에서부터 태백산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크고 곧게 자란 소나무가 많았다. 겉이 붉은 색을 띠면서 속이 누런 색인 낙락장송을 그래서 보통 金剛松이라고 불렀다. 조선이 개국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한성부 외곽지역부터 쓸만한 금강송이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강 인근 지역에서 금강송의 남벌이 심했는데 당시 교통 수단 중에서 금강송을 운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하운, 즉 뗏목이었기 때문이다. 왕실에서는 禁山을 지정하여 황장목의 벌목을 제한하였지만 끝내 남한강의 상류지역, 즉 태백산지와 소백산지까지 금강송이 남벌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봉화는 낙동강 수계의 상류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남벌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한강 유역의 금강송들은 강물을 이용하여 한성부로 운반하기에 유리했지만 봉화의 금강송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소백산지를 넘거나 아니면 뗏목으로 낙동강을 따라 내려 갔다가 배를 이용해서 한성부로 운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봉화, 울진 일대에 금강송이 잘 보존되어 오늘날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광여도(19세기 초)  *지도의 위쪽에 태백산 사고와 황장봉산이 표시되어 있다. *자료: 규장각>


▶ 春陽木

 

  이 금강송이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봉변을 당한다. 일제는 한반도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조사 작업을 벌였는데 그 중에는 생태적 특성에 관한 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긴 냉온대기후여서 일본에 비해 다양한 생태계가 나타나기 때문에 근대 생물학을 일찍 접한 그들에게는 한반도의 생태적 잠재력은 매우 매력적인 요소였다. 대대적인 조사작업 후에 새롭게 발견된 종에 이름을 붙였고 안타깝게도 이 때 일본식 이름이 많이 붙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의 금강송의 영어 표기는 지금도 'Japanese Red Pine'이다. 겉이 붉은 색이어서 일본인들은 이를 '赤松'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쓰지 않던 이름이다.

  적송이라는 듣보잡 이름을 얻은 금강송은 일제 강점기부터 대규모로 남벌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남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철도였다. 1931년 경북선이 안동과 연결되면서 봉화의 금강송은 위기에 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어 인근의 영주를 지나게 되면서 봉화의 금강송이 대규모로 반출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장정 여섯 명이 그루터기에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주민의 증언이 있는 것을 보면 지름이 2m에 육박하는 아름드리 낙락장송이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벌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봉화군의 춘양면, 소천면 일대에서 주로 생산되었던 목재는 주로 춘양에서부터 반출되었기 때문에 춘양목으로 불렸다. 양반들이 왕실의 전유물인 춘양목을 어거지로 확보해서 집을 지었다고 해서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는 장사치들이 춘양목이 아닌 소나무를 춘양목이라고 우겨서 팔았다고 해서 그 말이 나왔다고 하기도 한다. 또는 1955년 영암선(강릉까지 완성된 후 영동선으로 이름이 바뀜)이 건설될 때 춘양을 우회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지역 출신의 자유당 유력인사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노선이 바뀌었기 때문에 '억지춘양'이 탄생했다는 설도 있다(하지만 일제강점기 신문을 살펴보면 이미 1920년대부터 이 말이 쓰이고 있었으며 '억지춘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어쨌든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춘양목은 봉화군의 상징이 될만한 생태자원이다. 이러한 국보급 생태자원을 봉화군이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봉화의 오지성에 기인한다.


▶ 고랭지 약초와 송이버섯



<청량산 기슭의 고랭지 마을 명호면 북곡리(해발440m)와 고랭지농업>



<송이버섯찌개>


▶ 읍내를 가로지르는 냇물에서 미역을 감고 은어를 잡는다!


  봉화읍 한 가운데를 내성천이 통과한다. 내성천은 봉화읍 북동쪽의 물야면과 봉성면에서 각각 발원하여 봉화읍을 통과하는데 물이 무척 맑다. 상류에는 석천계곡이라는 아름다운 계곡이 있어서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긴다. 이 물이 흘러 내려가 봉화읍을 통과하는데 지금도 냇물에서 미역을 감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시내를 통과하는 냇물에서 미역을 감을 수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다.




<봉화읍 내성천 냇물에서 미역을 감는 사람들>


  오지성에서 발원한 이러한 지역 특성은 전국에서 유일한 은어 축제가 만들어진 배경이 되었다. 은어는 1급수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깨끗한 물에서 사는 물고기로 손꼽힌다. 봉화의 여름은 은어축제로 더욱 뜨겁다. '개발'이 '잘 사는 것'과 얼추 동의어로 쓰였던 한 때는 봉화가 '소외된 곳'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전국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봉화만의 독특한 지역성을 만들어냈다. '보존'이 곧 '개발', 즉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생태적 사고가 일반화되기까지 봉화는 소외된 지역으로서의 아픔도 느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보존함으로써 지역의 특성이 잘 유지되고 그것이 경제적 보상도 불러오는 일석이조를 누리고 있다. 어쩌면 봉화의 '오지성'에 우리에 미래가 있는지도 모른다.



<봉화은어축제, 송이버섯, 금강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