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한성부 성곽

북대문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

Geotopia 2012. 10. 12. 23:27

답사일시: 2011.2.26(토)~2.27(일)

 

▶일 정: 숭례문 앞 출발(09:10) - 서울상공회의소 앞(서울성곽 시작점 표지, 09:20) - 서소문로(09:40) - 정동길 -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중구 정동, 10:20) - 정동사거리 - 서울시교육청(경희궁) - 홍난파가옥(홍파동, 10:40) - 행촌동 은행나무(10:50) - 인왕산(11:40) - 창의문 - 북악산 정상(13:00) - 청운대(점심식사,13:20) - 곡장(성곽 최북단, 13:50) - 숙정문(14:30) - 와룡공원(암문, 14:50) - 혜화문 - 낙산공원(16:00) - 이화벽화마을(16:20) - 흥인지문(16:40)

 

*시내 : 흥인지문 - 광장시장 - 청계천 경유 - 인사동(저녁식사) - 창덕궁/창경궁 - 대학로 - 숙박

 

 

▶ 명당으로서의 한성

 

  성의 최북단에는 곡장이 설치되어 있다. 곡장이란 성벽이 밖으로 돌출된 부분을 말하는데 좌우로 성벽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퇴치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곳에서는 북쪽으로 북한산을 볼 수 있고 남쪽으로는 서울 시내와 내일 올라갈 남산도 아주 잘 보인다. 성곽 중에서 정면으로 시내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인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이 아마도 이런 장면들을 보고 '혼자서 누리기에는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더니 경비병이 나와서 사진을 보잔다. 군사시설이 찍히면 안 되기 때문이란다. 군사시설을 빼고 겨우 한 장 건졌다.

<북쪽 곡장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주작대로, 그리고 남산>

 

  한성부는 북한산을 주산으로 백호 인왕산과 청룡 낙산을 좌우로 거느린 전형적인 풍수상의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천도의 주역들은 성리학자들이었지만 당시의 입지선정은 풍수와도 깊은 연관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주산인 북악산의 남쪽에 본궁인 경복궁이 자리를 잡았으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조선의 정부기관인 육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육조거리(주작대로)를 기준으로 동쪽에는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가 자리잡았고, 서쪽에는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사역원이 자리하였다. 광화문 앞으로 뻗은 주작대로는 광화문 정면의 방향에서 동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곡장에서 바라본 북한산>

 

▶ 북대문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 

 

  북쪽 곡장을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을 300여m 쯤 내려오면 한성부 성곽의 북대문인 숙정문이 나온다. 죽어서 가는 곳을 북망산(北邙山)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양에서 북쪽은 전통적으로 사후 세계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문이 있으나 빈번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숙정문도 도성의 4대문 중에서는 가장 쓰임새가 적었고 심지어는 폐쇄되었던 적도 있었다.

  북반구 중위도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로 취락을 구성할 때 북쪽에 산을 둬야만 한다. 대륙성 기후라서 혹한이 반드시 있으며 혹한을 일으키는 바람은 항상 북쪽에서 불어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쪽에 대한 전통적 관념보다도 실질적으로 북쪽으로는 문을 내도 그다지 소용이 없게 되어 있다. 임수, 즉 넓은 농토와 물을 바라보는 쪽이 남쪽이고 북쪽은 대부분 급경사의 산지이기 때문이다. 한성부의 북대문인 숙정문 역시 조선시대 내내 크게 활용되지 않았던 문이다. 해발고도도 4대문 뿐만 아니라 4소문을 포함한 여덟개의 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도전이 오행을 배당하여 지은 이름은 북방을 상징하는 '智'를 넣은 '소지문(炤智門)'이었지만 지금은 숙정문(肅靖門)으로 불린다. '엄숙하고 편안하다'는 뜻이니 북쪽에 대한 전통적 관념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숙정문 밖으로는 한 때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주택가였던 성북동 주택가가 보인다. 지금은 강남으로 고급 주택가가 이동했지만 여전히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다. 우리 현대사의 정사와 야사에 고루 등장하는 삼청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청각은 70년대~80년대 고위급 외교회담장으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인들이 막후에서 만나 교섭을 벌였던 요정정치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 때 서울 최고의 고급 주택가 였던 성북동>

 

  숙정문 바로 아래에 있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안내소에서 받은 통행증 패찰을 반납하고 계속 내려간다. 약 1.3km정도 내려가면 성균관대학교 뒷편의 와룡공원이 나온다. 성균관대학교는 사립학교지만 실제 조선의 국립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있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에서 선배층이 가장 두터운 대학교로 퇴계이황은 이 학교의 1523학번이다.

 

<성북동에는 이런 마을도 있다>

 

▶ 암문(暗門), 비밀의 문?

 

  와룡공원 옆에는 암문(暗門)이 설치되어 있다. 한성 성곽에는 여러 개의 암문이 있는데 말 그대로 잘 표시나지 않게 설치한 작은 문이다. 성벽의 중간 중간에 설치하여 비상시에 군사나 물자를 이동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구조물로서 문루 등 육안으로 문을 식별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하지 않는다. 대개 크기도 작으며 입구에 흙더미 등을 쌓아 놓았다가 유사시에는 무너뜨려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성 성곽 답사 중에도 암문을 통하여 성의 안과 밖을 드나드는 구간이 몇 번 있다. 

 

<와룡공원 옆 암문에서 바라본 성북동>

 

<와룡공원 옆 암문에서 바라본 성북동>

 

▶ 혜화문의 원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울과학고를 지나면서 성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주택가가 이어진다. 이 구간은 혜화문(惠化門)까지 계속되는데 동소문인 혜화문은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낸다는 명목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가 1994년에 복원되었다. 하지만 원래 자리에는 이미 넓은 도로가 나 있기 때문에 지금 있는 자리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고 옆 부분이다. 또한 완전히 해체된 것을 복원하였으므로 지금 있는 것은 원래 것과 똑같지는 않다고 한다.

  혜화문에서 창경궁로를 건너면 동대문까지는 계속 성벽이 이어지는데 성벽이 높고 보존 상태도 상당히 좋다. 이 구간은 성벽 밖으로 길이 이어지다가 낙산공원에서 암문으로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홉시 경에 숭례문에서 출발했으니 오후 네 시인 현재까지 장장 7시간의 장정을 했다. 서서히 다리에서 피로감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한 시간 정도를 더 가야 오늘의 1차 목적지인 흥인지문에 도착할 수 있다.

 

<암문을 통해 낙산공원으로 들어가기 전의 성벽>

<낙산공원에서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온다>

 

▶ 이화벽화마을, 서울의 명소가 되길…

 

  낙산공원에서 성벽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이화벽화마을을 만난다. 도시 내의 구 주택가는 재개발의 표적이 되곤 한다. 일단 재개발이 결정되면 어려움에는 처하는 것은 서민들이다. 땅의 소유주가 아닌 경우에는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역시 자본이 충분하지 않으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그곳이 생업의 터전인 경우에는 재개발 기간 동안 생업을 접어야 하므로 어려움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도시내부재개발이 효율성 논리만으로 추진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주민들과 사회단체가 결합하여 구 주택가를 독특한 모습으로 단장하여 관광상품으로 바꾸는 예가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경남 통영시의 동피랑마을이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이곳 이화마을도 비슷한 개념으로 마을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곳이다. 항구가 보이는 동피랑에 비하면 관광자원이 풍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화마을의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

 

<이화벽화마을>

 

<이화벽화마을>

 

<이화벽화마을>

 

▶ 흥인지문 도착! 8시간의 대장정

 

  오후 5시, 장장 8시간만에 드디어 1차 목적지인 흥인지문(興仁之門)에 도착했다. 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은 한성 중심부에서 흘러나가는 청계천이 빠져나가는 곳으로 다른 곳에 비해 가장 지대가 낮다. 4대문 중에서 유독 동대문만 갈 지(之)자를 덧붙여 4자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고도가 낮고 지세가 꺼져 있어 땅 기운을 돋우어 주자는 의도로 갈 지를 더하여 넉 자 현액을 걸어주었다 한다. 이것 역시 성리학적 사고와 풍수적 사고를 분리할 수 없는 사례이다.

 

<드디어 흥인지문-완주 기념 뺏지를 달고 인증샷>

 

  관리사무소에 가면 성곽완주기념 뺏지를 준다. 쌍둥이 아빠 승규가 미리 알아온 정보이다. 우리 80년대 학번들은 그걸 가지고 가도 좋아할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약간 시큰둥 하지만 쌍둥아빠는 열의를 가지고 뺏지를 찾아 온다. 모두 하나씩 받아서 가슴에 달고 흥인지문 앞에서 1차 목적지까지 완주한 기념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하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기만 하다. 시내로 들어가 저녁을 먹고 동대문 근처에서 잠을 자야만 한다. 내일 일정은 성곽의 남쪽 부분, 그러니까 흥인지문에서 남산을 거쳐 숭례문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따라 시내로 방향을 잡았다. 발이 좀 묵직하긴 하지만 지리학도는 새로운 것이 기다린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청계5가 까지 청계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광장시장에 잠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식사 장소로 생각해 둔 인사동 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약간의 요기를 해야할 것 같다는 의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말 저녁의 광장시장은 상당히 복잡한데 푸짐한 부침개 골목이 있다. 사람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부침개가 들어가는지 막걸리가 들어가는지 헷갈리지만 여튼 주린 뱃속에 따뜻한 음식이 들어가니 기분은 좋다. 저녁을 맛있게 먹기 위해 아쉽지만 과감히 간식을 접고 다시 출발!

 

<청계천을 따라 시내로>

 

▶ 인사동의 저녁식사, 대학로의 꼼장어, 그리고…

 

  종묘와 탑골공원을 지나 인사동으로 들어섰다. 특별히 인사동에 목적지를 정해둔 것은 아니었지만 골목을 헤매다 보니 삼겹살집이 눈에 띤다. 인사동에 와서 삼겹살이라… 약간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없지는 않지만 우리의 주린 배는 기름진 삼겹살과 소주의 유혹을 이미 이길 수가 없다. 대전이 고향이라는 주인은 대번에 우리를 알아본다.

 

  "어디서 오셨슈?"

  "천안이유, 아줌마는 유?"

 

  대전은 이상하게 광역시로 독립한 이후에는 충남이라는 느낌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예전에 대전에 살던 사람들은 오히려 대전을 충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옛날에 어떤 도로공사(길이 밀릴 때를 이용해 먹을 것을 파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에게 오징어를 한 마리 샀는데 출발하려는데 쫓아와서는 한 마리를 더 주고 가신 분이 있었다. 대전이 고향이라는 그 분은 사투리를 쓰는 우릴 보고 반갑다고 한 마리를 더 주셨던 것이다.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스스로 대견스러운 오늘의 장정을 되새기면서 돌린 술 잔이 거나하다. 게다가 배까지 고푸니 얼마나 먹어 댔을까? 벌써 반은 맛이 간 상태인데 갑자기 대학로 꼼장어가 생각났다. 전에 해원이와 우연히 갔다가 대박 맛집을 찾아냈었는데 그 집이 생각난 것이다. 기왕에 오늘은 다리품 팔기로 했으니 이번엔 대학로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율곡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돈화문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다른 인증샷이 아니라 음주 인증샷이다.

  문제의 꼼장어집은 거의 대학로의 북쪽 끝까지 올라가서 성균관대 쪽으로 올라가는 골목에 있다. 한 번 밖에 가보지 않았는데 용케도 잘 찾아갔다. 이미 술이 이성을 지배하기 시작했는데도 고소한 꼼장어가 입맛을 자꾸 끌어 당긴다. 약간 남았던 눈의 힘이 꼼장어집을 나올 때는 그나마 완전히 빠져버렸다. 노천 공연을 구경하면서 대학로를 다시 내려와서 최대한 동대문쪽으로 가다가 눈에 띠는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또 한 잔! 다행스럽게도 큰 방을 하나 잡기는 했는데 여섯 명이 누우니 조금 복잡하다. 밤새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인사동에서 저녁 식사 후 대학로로 이동 중에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인사동에서 몇 순배 돌린 소주 덕분에 눈들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