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한성부 성곽

성리학을 기반으로 설계된 한성

Geotopia 2012. 10. 6. 22:26

답사일시: 2011.2.26(토)~2.27(일)

 

 

▶일 정: 숭례문 앞 출발(09:10) - 서울상공회의소 앞(서울성곽 시작점 표지, 09:20) - 서소문로(09:40) - 정동길 -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중구 정동, 10:20) - 정동사거리 - 서울시교육청(경희궁) - 홍난파가옥(홍파동, 10:40) - 행촌동 은행나무(10:50) - 인왕산(11:40) - 창의문 - 북악산 정상(13:00) - 청운대(점심식사,13:20) - 곡장(성곽 최북단, 13:50) - 숙정문(14:30) - 와룡공원(암문, 14:50) - 혜화문 - 낙산공원(16:00) - 이화벽화마을(16:20) - 흥인지문(16:40)

*시내 : 흥인지문 - 광장시장 - 청계천 경유 - 인사동(저녁식사) - 창덕궁/창경궁 - 대학로 - 숙박

 

 

▶ 성리학을 기반으로 설계된 한성

 

  인왕산 자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의 비탈길에 권율장군이 심었다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다. 장군의 집은 사라졌고 이 근처에 살았다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만 남았다. 杏村洞이라는 이름도 아마 이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행촌동 은행나무>

 

  주택가에서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잠깐 헤매었다. 분명 길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이 오르내린 흔적이 있는 길을 타고 드디어 인왕산의 남쪽 자락에 올랐다. 이 산자락의 동쪽, 그러니까 경복궁의 오른쪽은 사직동이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궁궐의 오른쪽에 배치된 '社稷檀'에서 온 이 이름은 사직동이란 이름과 사직공원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면면히 살아 있다.

  정통 성리학자였던 정도전은 주례(周禮: 주나라의 이상적인 제도에 대하여 쓴 글로 儒家 13經의 하나. 천관(天官)·지관(地官)·춘관(春官)·하관(夏官)·추관(秋官)·동관(冬官)의 여섯 편으로 되어 있음)의 고공기(考工記: 토목․공작을 담당하는 관직을 서술한 동관(冬官)편이 소실되어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저술된 글)에 기초하여 한성부를 설계하였다. 주례고공기의 기본적인 원칙은 좌묘우사전조후시(左廟右社前朝後市)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오른쪽)에 사직단(토지신과 곡식신에 제를 올리는 곳)을, 동쪽(왼쪽)에 종묘(왕의 위패를 모시는 곳)를 세웠고 앞쪽으로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조정의 주요 기관들을 배치하였다. 주례고공기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지만(일례로 '前朝後市'의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의 공인 상가였던 육의전은 지금의 종로, 탑골공원 부근이었다. 왕궁의 뒷편은 바로 북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주민의 접근도도 떨어지고 공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성부 도시계획의 근간은 성리학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행촌동에서 인왕산으로 연결되는 성벽과 인왕산 정상>

 

▶ 신촌에 왕궁이 자리잡았을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는 안산(鞍山 295.9m)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무악(毋岳)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조선이 도읍을 정할 당시 한성의 주산이 될 뻔 했던 산이다. 처음에 새 도읍지로 거론된 곳이 계룡산 남쪽 신도안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로 왕사 무학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던 계룡산 천도론은 하륜에 의해 무산되었다. 대신 하륜은 새로운 도읍지의 후보지로 당시 남경(한양)의 무악(지금의 鞍山: 말 안장을 닮았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서남쪽, 지금의 신촌동·연희동 일대를 지목하였다. 그러나 하륜의 주장은 태조 3년(1394) 2월에 좌시중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만약 하륜의 주장이 관철되었다면 조선의 왕궁은 지금의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대학교 쯤에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은 1968년의 1.21사태 이후 청와대 보안을 이유로 오랫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다. 공식적으로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이후 개방이 되었지만 완전 개방은 아니었다. 90년대 말에 답사를 왔다가 사직공원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경비를 서던 군인과 언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허가 절차를 거쳐 겨우 산에 오르긴 했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완전개방은 노무현대통령의 의지로 2006년 4월1일 38년만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노무현대통령은 "북악산을 혼자 누리기에 미안해서 시민에게 개방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여러 방향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상당히 많다. 자신의 땅을 향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조차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봉쇄를 당했던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조금은 극복해가고 있는 것일까?

 

▶ 인왕산 곡빙하?

 

<인왕산 계곡의 얼음>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의 자취가 계곡에 남아있다. 2월말인데도 계곡의 응달 부분에 얼음이 두껍게 얼어있다. 여름철 비가 자주 올 때 외에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게 생긴 계곡인데도 이렇게 두껍게 얼음이 얼어있는 것은 날씨가 추워서 얼음이 녹지 않고 계속 쌓인 결과이다. 만약 봄이 오지 않고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이 얼음은 계속 성장해서 계곡을 가득 메우고 결국 무게를 못이겨 서서히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곡빙하가 될 것이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도성 안. 사진 중앙에 경복궁이 보인다. 왼쪽은 주산인 북악산, 오른쪽은 안산인 남산이다.>

 

▶ 한성 입지의 풍수적 해석

 

  등산객이 상당히 많아서 인왕산 정상은 매우 혼잡하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아쉬웠는데 도성을 조망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다. 경복궁의 뒷쪽, 북악산의 서쪽으로 넓은 운동장을 갖춘 학교가 보인다. 청와대 바로 옆인 이런 곳에 학교가 있다니 놀랍다. 경기상고, 경복고, 청운중, 청운초 등 여러 학교들이 모여있다. 주산(主山)인 북악과 안산(案山)인 남산, 그리고 청룡(靑龍)인 낙산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그 안에 자리를 잡은 경복궁의 위치를 주변 산세와 연결하여 정확하게 볼 수 있다. 풍수적 입지를 이렇게 정확하게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천도의 주도세력은 당연히 역성혁명의 주역들이었다. 한성부의 입지를 풍수사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많지만 사실 천도의 주도세력이었던 사대부들은 고려의 구습이었던 풍수사상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특히 조선 개국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은 그 이름만큼이나 도전적인 인물로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主山) 주장을 일축하고 정도전은 북악(백악)을 중심으로 한성부 건설 계획을 수립한다. 정도전의 도시계획은 조세 및 공물의 수집이나 중앙집권적 체제의 강화 등 통치행위에 유리한 다양한 조건들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성부의 입지를 풍수지리로 설명하는 예는 예나 지금이나 아주 많다. 그렇다면 풍수지리적 해석은 옳지 않은 것일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 이다. 이 무슨 앞 뒤기 안 맞는 말이란 말인가?

  앞에 살펴본 것 처럼 정도전은 도성 성문의 이름을 오행(五行)을 바탕으로 지었다. 동양철학의 기본이 되는 음양오행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풍수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성리학사상과 풍수사상을 이분법으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치된 읍성(邑城)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잘 드러나는데 기본적으로는 주례고공기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풍수적 비보(裨補)를 한 예가 상당히 많다. 다만 고려 시대에는 풍수적 도참사상이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조선을 개국한 주역들은 이보다는 성리학적 원칙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 이전의 고려시대와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성부의 입지에 대한 풍수적 해석은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는 태조의 최측근이었던 무학과 정도전의 의견 대립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무학은 한양의 세(勢)를 보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청룡 백호를 삼을 것을 주장하였으나 정도전이 ‘자고로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하여 무학의 의견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이에 무학은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내 말을 생각하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지기성쇠(地氣盛衰)론의 맥락으로 개국 당시 사대부들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正史)의 기록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차천로(1556(명종 11)~1615(광해군 7))의 오산설림은 조선이 개국한지 200여 년이 지난 후에 저술된 책으로 개국 당시의 싱싱했던 성리학적 사상보다는 임진왜란 이후의 혼란한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도참적 사고들이 점차 머리를 들기 시작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산설림에 기록되어 있는 정도전과 무학의 논쟁은 사실 믿기 어렵다.

 

▶ 창의문이 지금까지 자하문으로 불리는 이유는?

 

  북악산으로 가려면 인왕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성벽을 따라 내려와야 한다. 특별한 느낌이나 경관이 없이 성벽 옆으로 계단이 계속되다 보니 카메라를 꺼낼 일이 별로 없다. 천성이 게으른 나는 배낭에 들어있는 카메라를 꺼내기가 귀찮아서 나름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면 셧터를 아끼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좋지 않은 습관인 이유는 나중에 언제나, 반드시 후회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답사에서도 이 구간에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아무데서나 한 장이라도 찍어 놓을걸…

  능선을 다 내려와서 북악과 인왕산 사이의 가장 낮은 지점에는 고갯길이 발달하고 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고갯길이 발달하고 있는데 고갯마루에는 서울의 북소문(北小門)인 창의문(彰義門)이 있다.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렸던 이 문이 '의를 널리 밝힌다'는 의미의 창의문으로 바뀐 것은 인조 때이다. 인조반정 때 반정세력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왔는데 반정 성공으로 집권한 후에 붙인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하문'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새로운 권력이 지은 이름을 수긍하지 않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국가교육정보시스템(National Educational Information System)을 구축한 후 정부는 이것의 약자인 NEIS를 [nais]로 부르도록 강제하였다. 엄연히 영어의 이니셜에서 따온 말이므로 상식적으로 [neis]로 발음이 나는데도 이것에 대한 거센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 방법으로 nice와 발음이 같은 [nais]를 강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교사들은 이를 [neis]로 발음한다.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기 마련이지만 부모가 지어주는 아이의 이름과는 달리 장소나 사물은 특정한 정체성을 갖기 때문에 그와 동떨어진 이름을 강요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 예가 많다.

 

▶ 북악산을 향하여

 

  북악으로 올라가는 길은 성벽 안쪽으로 계속되는 나무 계단이다. 사람이 아주 많은 제법 가파른 계단에는 곳곳에 군인들이 경비를 선다. 이 구간에서는 사진을 찍는 것과 시내쪽(청와대쪽)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오랫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었고 지금도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연환경의 보존 상태가 아주 좋을 것 같다. 가끔씩 사슴(고라니 아닐까?)이 달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한다.

  마침 교대 시간인지 군인들이 바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계단을 오르내릴텐데 제대할 즈음에는 허벅지가 차두리 만큼은 되겠다.

  외고가 힘들기는 힘든 모양이다. 그라운드를 야생마처럼 누비던 우리의 체력맨 성환이가 계단을 오르는 것을 힘겨워 한다. 짐작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외고에 간 것이다. 간지 단 1년 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