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한성부 성곽

불타버린 숭례문-슬픈 우리의 자화상

Geotopia 2012. 10. 2. 13:22

답사일시: 2011.2.26(토)~2.27(일)

 

▶일 정: 숭례문 앞 출발(09:10) - 서울상공회의소 앞(서울성곽 시작점 표지, 09:20) - 서소문로(09:40) - 정동길 -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중구 정동, 10:20) - 정동사거리 - 서울시교육청(경희궁) - 홍난파가옥(홍파동, 10:40) - 행촌동 은행나무(10:50) - 인왕산(11:40) - 창의문 - 북악산 정상(13:00) - 청운대(점심식사,13:20) - 곡장(성곽 최북단, 13:50) - 숙정문(14:30) - 와룡공원(암문, 14:50) - 혜화문 - 낙산공원(16:00) - 이화벽화마을(16:20) - 흥인지문(16:40)

  *시내 : 흥인지문 - 광장시장 - 청계천 경유 - 인사동(저녁식사) - 창덕궁/창경궁 - 대학로 - 숙박 

 

<답사 경로   *답사 지점=붉은 원     *원도: 서울성곽안내도(종로구)>

 

▶답사 거리: 약 18km

 

▶함께한 이들: 천안지리연구회 '설걷이(설렘으로 걷는 이들)'

 

 

천안지리연구회 첫 답사

 

  천안의 지리인들이 처음으로 단독 답사에 나섰다. 가끔 만나 술을 즐기는 것이 전부였던 모임이었는데 장도에 오르게 되었으니 스스로 대견스러운 장족의 발전이다. 그러니까 90년대 학번들이 속속 발령을 받기 시작한 이후 만나기 시작했으니 햇수로는 벌써 7~8년은 되었다. 80년대 학번과 90년대 학번은 그야말로 '강산이 변할' 만큼의 세대차가 나서 사실 만나기가 쉽지 않은 사이이다. 더욱이 8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지리교사의 신규채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같은 80년대 학번 입장에서는 후배 구경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이 한 동안 계속되었었다. 이런 사정 속에서 기적적으로(?) 모임을 이끌어 낸 장본인은 스스로 연결고리임을 자처하는 90학번 승규이다. 90년대의 맏형격인 승규는 후배들에 대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우리 노털들과의 연석모임을 여러 차례 주선함으로써 '강산이 변할' 만큼의 간극을 '형님 아우' 사이로 바꿔 놓았다.

  사실 '천안지리연구회-설걷지'라는 이름은 올해 지었으니 이 첫 답사 때는 이름도 없는 그냥 '선후배 모임'이었다(이름이 뭐 꼭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80년대 학번은 최고 노털인 해원이와 나, 후배 진규 이렇게 셋, 90년대 학번은 우리의 허리 승규와 꽃다운(?) 95 성환이와 원기, 모두 여섯 명이 참석 가능 인원으로 확정되었다. 부지런한 승규는 벌써 종로구에서 발행하는 성곽답사 안내지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답사자료들을 준비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전 답사까지 다녀왔다. 놀랍고 부러운 부지런함이다.

 

불타버린 숭례문 - 슬픈 우리의 자화상

 

  이른 아침을 먹고 기차로 출발했다. 무조건 걷는 답사이므로 차를 가지고 갈 필요가 없지만 여전히 서울은 운전을 하기에는 겁이 나는 도시여서 손수 운전을 하는 것은 엄두가 나질 않는다. 서울역에서부터 걷기 시작! 불타버린 숭례문은 여전히 두터운 차단막에 가려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으로 국보1호에 불을 지를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이건 어이가 없다거나 이해가 안된다거나 정도의 사건이 아니다. 합리적 사고가 바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정과 원인을 따지지 않고 성과만을 정당화하는 경쟁 지상주의 사회에 자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지나치게 현상속에서 본질을 분리해서 해석하고자 하는 나의 강박증일까?

  숭례문의 양쪽으로는 대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숭례문은 마치 섬처럼 홀로 서 있다. 일제가 1907년 자국 왕자(大正)의 방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한성부 성벽 복원을 위한 시도가 여러 방면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이 구간은 쉽지 않을 것 같다. 40여m에 이르는 이 대로를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해결을 한단 말인가?

  사실 일제는 한성 뿐만 아니라 전국의 읍성에 대해서도 교묘한 파괴공작을 지속적으로 자행했다. 근대적 교통로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항일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한 행위였다. 대부분의 읍성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웠던 역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헐어버린 돌들은 땅속에 묻혀버렸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주변 민가의 주춧돌이 되었으면 그나마 다행일 지경이다. 내 고향 홍성의 홍주성도 경사가 급해 통행이 불편한 남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벽이 훼손되었다. 북쪽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으며 동쪽의 조양문은 숭례문처럼 주변 성벽이 허물어져 지금까지도 섬처럼 남아 있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숭례문(崇禮門)은 오행(五行)에서 남방을 뜻하는 예(禮)字를 넣어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숭례문 현액은 가로로 되어 있는 다른 현액과는 달리 세로(縱額)로 되어 있다. 귀한 백성이 드나들 도성의 정문이므로 서서 맞이함이 예절에 합당하다하여 세워 달았다고도 하고, 남방은 화(火)에 해당하기 때문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세워 달았는데, 조산(朝山)인 관악산의 불길을 불로 막아 그 화기가 서울 도성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600년이 지난 지금 남방의 화기에 자체 불꽃이 겹쳐 더욱 큰 화를 일으킨 꼴이 되었다.

 

<서울상공회의소 앞 출발점>

 

 

▶  오행(五行)으로 배당된 성문의 이름

 

  숭례문 앞에서 지하도를 건넜다. 숭례문에서 서쪽으로 세종대로 건너편에 있는 서울상공회의소 앞이 공식적인 출발지점이다. 성벽이 복원하는 시늉만 내어 얕은데다 깨끗한 새 돌이어서 매력은 덜하지만 일단 자취를 찾을 수 있으니 다행스럽다. 답사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근거가 있지 않으면 짧은 시간에 효율적인 답사를 하기가 쉽지 않다. 자, 출발!

  서울상공회의소 앞에서 성벽을 따라 3백여m 정도 서북쪽으로 이동하면 서소문로를 만난다. 성벽은 서소문로를 만나기 전 산업은행 부근에서 끝이난다. 서소문로는 한성의 西小門이 있던 곳을 지나는 길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성문은 물론 성벽도 이 부근에서는 모두 유실되었다.

  통일로와 서소문로의 교차점 부근에 김밥을 살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점심은 산에서 먹어야 하므로 각자 먹을만큼 챙겨 넣고 다시 출발. 예원학교와 이화여고 앞을 지난다. 1986년에 세워진 이화100주년 기념관 입구는 아담한 한옥 대문인데 카페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학교와 카페?' 자세히 알아보면 분명 어떤 의미가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봤을 때는 부드러운 연결이 잘 안되는 조합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재미있는 변화인 것 같기도 하다. 학교도 사회의 일부분이고 학생들이 사회화를 학습하는 공간이므로 세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독야청청'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 부근은 모두 성벽이 유실된 구간으로 서소문과 서대문의 중간쯤이고 성벽의 외곽에 해당한다. 

 

<예원학교 담장에 전광판이 달려있다>

   

<이화100주년 기념관>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정동사거리가 나오는데 이 일대가 한성의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 역시 정도전이 지은 이름으로 오행의 서쪽에 해당하는 '義'를 넣어서 지은 이름이다. 정도전은 태조 4년(1395)에 새로 지은 궁궐의 여러 전각에 이름을 붙였고, 이듬해에는 도성 8대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성리학자답게 『시경』과 『서경』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 특히 4대문은 성리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활용하여 지었는데 각각의 글자가 가리키는 오행(五行)의 방위와 연결하여 대문 이름에 넣었다. 즉, '仁=東方', '義=西方', '禮=南方', '智=北方'에 각각 배치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대문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그리고 북대문은 소지문(炤智門)이 되었다. 오행 중 중앙에 해당하는 신(信)은 종로 중앙의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으로 쓰였다.

 

홍난파 가옥

 

  정동사거리를 지나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경희궁과 서울시교육청을 서쪽으로 지난다. 멀리 인왕산이 건물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하면서 오르막길이 심해진다. 오르막의 골목을 오르면 아담한 2층집이 길옆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난파 홍정후의 집이다. '홍난파 생가'가 아니고 '홍난파 가옥'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가 생전에 살았던 집인 모양이다. 집앞에는 집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고 나무로 만든 담장 안에는 홍난파의 흉상이 있다. 흉상에는 홍난파에 대한 간단한 소개글이 새겨져 있는데 내용이 간단한 만큼 모호하다.

  '봉숭아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백곡을 남기신 난파 홍영후(1898.4.10~1941.8.30) 선생은 우리나라 맨 처음 바이얼리니스트로 1936년에는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창설하여 지휘하신 방송 음악의 선구자이시다. 난파를 기리는 이들이 정성을 모아 그 모습을 새겨 여기 세우니 과연 인생은 짧아도 조국과 예술과 우정은 길구나'

  누가 건립의 주체인지는 어디에도 써있지 않을 뿐 아니라 짐작할 수도 없는데 이름 남기기를 즐기는 우리의 일반적 관례에 비춰볼 때 매우 특이한 소개글이다. 내용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짧아도 예술과 우정은 길다'는 말은 이해가 될 듯도 하지만 왜 난데없이 '조국'이 거기에 들어갔단 말인가?

 

<홍난파 가옥과 홍난파 흉상>

 

  홍난파는 말년의 친일 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가족들은 그가 옥살이까지 한 후 강압에 못이겨 일부 친일활동을 했으므로 그를 친일행위자로 몰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었다. 적극적 친일과 부득이한 친일은 과연 구별이 가능할까?

  해방 후에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단죄가 있었다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단죄는 커녕 적극적 친일행위자들이 지배집단으로 돌변해서 새롭게 기득권을 차지했던 몰역사적 해방정국의 결과는 오늘에 와서 이런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하고 덮여버린 역사,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길은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친일파들이 파렴치하게도 경제적, 사회적 지배층이 되어 향유한 결과들을 이제와서 몽땅 몰수할 수는 없다해도 적어도 그들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밝혀 후손들이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금에와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다. 혹여 홍난파가 부득이하게 친일행위를 했기 때문에 억울한 측면이 있다면 사실을 왜곡하는 것 보다는 더욱 객관적으로 친일 행위를 밝혀야 한다. 그것은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행위이다. 판단은 물론 후손의 몫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