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삶과 지리

갓난 아들에게 지리를 배우다(2)

Geotopia 2012. 8. 19. 20:53

  1년 중에 가장 더운 기간은 7월 마지막 주에서 8월 첫 주, 즉 2주일 정도라는 사실을 아들 덕분에 알게 되면서 더위를 이기기도 한결 쉬워졌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라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끌려 가듯 가는 것 보다는 어디로 가는지라도 알고 가는 것이 덜 두렵고 덜 답답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7월 마지막 주가 되면 '이제 더울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더위와 싸울 마음의 의지를 다지고, 8월 첫 주가 되면 '이젠 갈 때가 되었거니' 하면서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위와 싸우는 강력한 우군, 사실은 강력한 더위를 싸움 거리도 안 되는 허접한 상대로 만든 장본인인 에어컨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참다 참다 에어컨을 켜야만 하는 시기도 변함없이 바로 이 기간(물론 온난화로 그 기간이 앞뒤로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이기 때문이다.

  2주일만 잘 버틸 수 있다면 굳이 에어컨이 없어도 1년을 잘 날 수 있다. 1년 365일 가운데 15일이라고 산술적으로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면 에어컨은 참 비효율적인 물건이다. 단 2주일을 위해 열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장승처럼 서 있어야 하는… 거의 필수품처럼 인식되어 가고 있지만 단 며칠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 사치스런 물건이기도 하다.

 

  해마다 '몇 년 만에 찾아온 최대의 무더위'라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올해 역시 몇 십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라고 모든 언론이 극성이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앞으로는 더욱 더운 날이 많아지고 길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에어컨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열대야 때문에 잠을 못 이룰 만큼 더운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공식 관측 기록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엄살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고로 더운 약 2주일 가운데 실제 열대야가 발생하는 기간은 5일에서 길어야 10일 정도가 보통이다. 실제로 2001년 부터 2010년 까지 평균 열대야 일 수를 보면 중부 이북은 열대야 일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래 표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2001~2010 평균 열대야 일수  *자료출처:기상청>

 

  왜 이렇게 우리 언론들은 매년 덥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꼭 '몇 십 년 만에 가장 덥다'는 말이 동원되는 것으로 보아 기상 관측 기록 등을 열심히 찾아서 보도를 하는 모양이다. 덥다는 것을 강조하는 증거, 또는 수식어를 개발하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 같다. 요즘엔 '찜통 더위'도 성이 안 차는지 '가마솥 더위'란 말도 등장했다. 친절하기는 한데 왜 그러는 것일까? 이런 엉뚱한 의문이 드는 것은 그 호들갑 뒤에 당연히 따라야 할 원인 분석과 그에 따른 해법이 거의 제시되지 않고 그냥 '더울테니 각오하라'는 경고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고'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하다.

  당연히 '올해는 에어컨을 장만 해야 되겠어' 일 것이다.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은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이다. 그 결과 해마다 여름만 되면 기록이 갱신되는 것이 있다. '전력 소비량!' 꼭 언론의 호들갑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해마다 에어컨의 판매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해마다 최대 전력 소비량이 갱신되고 있다.  

  우리집도 마침내 2년 전에 에어컨을 장만하고 말았다.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에어컨을 사기로 결정하던 날 작은 아들이 '우리 아빠가 진짜로?' 하면서 강력한 의문을 제기했던 기억이 난다. 길어봐야 2주일을 위해 열 한 달 이상을 장승처럼 서 있기만 하는 에어컨을 장만하고 만 것이다. 몇 십 년 만에 가장 더운 해 운운했던 올해 역시 저녁 잠자기 전에 에어컨을 틀었던 날이 우리 집의 경우는 딱 나흘이었다.

  어떻게 보면 에어컨이란 가장 자본주의적인 상품이다. 즉 누군가가 시원하려면 누군가는 더워야만 하는 냉혹한 자본주의적 질서를 잘 반영한 것이 에어컨이다. 물론 온난화는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지만 미시적 스케일로 하나의 도시만을 상정해 본다면 열에너지의 총량은 어떻게든 변함이 없다. 어느 한 부분의 온도가 내려가면 반드시 다른 부분의 온도가 올라가야만 하는 제로섬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단 2주일을 위해서(그것도 2주 내내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에어컨을 장만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냉방기들이 증가할수록 주변의 기온이 상승하므로 더욱 에어컨 보급률이 높아만 가고 도시 전체가 열섬으로 변해간다. 몇 해 전에 부산 해운대에서 유람선을 탄 적이 있다. 광안대교를 지나 용호동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코스였다. 용호동의 광안대교 쪽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이다. 그 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용호동으로 다가 가면서 뱃전을 스치던 시원한 바람이 그 기운을 조금씩 잃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뜨거운 공기가 되어 배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숨이 턱턱 막히는 도시의 인공열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파트단지에서 방출되는 인공열이 바다쪽의 기온까지 올려 놓은 것이다.

 

<해운대 주변 지도 *원도: Daum 지도(캡춰)>

 

  아파트의 경우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 놓으면 더 더워서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악순환의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가난할수록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하던 시절은 이젠 행복한 시절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그때는 더위에 대해서는 평등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