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의 지리환경/산지(천안)

태조산, 고려 태조 왕건의 역사가 담겨 있는 산[III]

Geotopia 2024. 6. 13. 08:42

태조산 왕건길. 이 글은 태조봉과 태조산 구간. *Google earth
천안군 관아 자리와 두 개의 왕자산, 그리고 천안향교와 태조산 *카카오맵

▣ 태조봉과 태조산

태조봉을 오르는 마지막 고바위는 사유지(교보생명연수원)를 지난다. 금북정맥을 따라 늘어선 장벽을 따라 걸을 때마다 '토지공개념'이 생각난다. 토지 소유는 개인이지만 금북정맥은 우리 민족이 함께 가진 것이다.
태조봉에 있는 제10화. 통일을 이룬 뒤 천흥사를 세우고, 직산(稷山)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태조왕건과 관련된 역사와 지명들을 설명한 안내판이 태조봉에 서있다.
태조봉에서 바라본 천안 시내. 나무에 가려서 시야가 좋지는 않지만 여의주를 다투는 용들을 잘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왕자산이 보이고 왕자산-천안타운홀전망대-남산으로 이어지는 주산의 맥을 볼 수 있고, 앞쪽으로는 봉서산-월봉산-일봉산으로 이어지는 용이 잘 보인다. 왼쪽에 살짝 보이는 작은 산은 원성동 자동차매매단지 앞산으로 이 산줄기 역시 남부오거리까지 이어지는 용이다.
여의주(남산)를 향하고 있는 용들. 태조산에서는 이 중에서 너댓 개를 볼 수 있다. *Google earth
늘 헷갈리는 태조봉과 태조산. 지도에는 저 앞 봉우리가 태조산이라고 되어 있다.
태조봉(420.1m)과 태조산. 시민들이 '태조산'이라고 하면 보통 '태조봉'을 가리킨다. *카카오맵
태조산에서 바라본 태조봉
태조산 정상에는 바위 덩어리가 서 있다. 뒤로 보이는 산이 태조봉.

▣ 태조봉이 왕건이 올랐던 왕자산일까?

  1편에서 하던 '왕자산' 이야기를 이어서 해보자.

  두 개의 왕자산은 태조왕건이 올랐던 산으로 보기에는 뭔가 아쉬운 점이 많다. 그렇다면 이곳 태조봉은 어떨까? 이곳이 태조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근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옛 자료들이 일관되지 않으며, 왕자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가까이에 따로 있기 때문이다.

  태조봉은 관아에서 직선거리가 약 5.2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대략 12리 범위에 있다. 또한 산줄기가 약간 외돌기는 하지만 천안군 관아로 이어져서 진산이라고 할만 하다. 다만 방향이 동남동쪽이어서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동북쪽)과 약간 덜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대체로 결격 사유가 두 왕자산에 비해 적다.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등에는 '동쪽 10리'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산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왕자산이며, 천안의 진산일까?

  '태조봉'이라는 산 이름은 18세기 중반에 등장한다(그 전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자료로는 그렇다). '해동지도(1750년대)', '지승' 등 1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지도에 '태조봉' 이라는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초까지 '왕자산'으로 불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태조봉'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18세기 중반 당시에 만들어진 '팔도군현지도(1750-1768)'에는 '왕자산'이 수록되어 있고, 19세기에 만들어진 '호서읍지(1871)',  '1872지방지도' 등에도 '왕자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름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같이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고지도에서는 '태조봉' 또는 '왕자산'이 어디에 표시되어 있을까?

  ▶ 왕자산, 또는 태조봉은 어디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문서에는 '관아에서 동북으로 12리' 같은 식으로 기술되어 있어 그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지도는 문서에 비해 좀 더 위치를 알아내기가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옛날 지도들은 축척이 일정하지 않고 정확도도 떨어지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짚어 내기가 역시 쉽지 않다.

  아래 지도에서 태조봉, 또는 왕자산이 향교 뒷쪽에 표기된 지도는 '여지도(태조봉)', '해동지도(태조봉)', '지승(태조봉)', '광여도(태조봉)'이다. 지금의 태조봉에 표시한 지도는 '비변사인방안지도(태조봉)'가 유일하다. '1872지방지도(왕자산)'와 '호서읍지(왕자산) 지도'는 성불사의 왼쪽, 즉 성거산 방향에 표기하였다(아마도 백석대 뒷산을 왕자산으로 오해한 것은 이런 지도들 때문일 것이다.). 나머지 하나인 '팔도군현지도(왕자산)'는 금북정맥의 서쪽에 '대충' 표시를 해서 위치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고지도에 표기된 태조봉과 왕자산. 시대별로 특별한 규칙성을 갖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두 이름을 섞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써 놓은 사실들을 합쳐 보면 왕건이 올랐던 '왕자산'이라는 이름과 '태조산'이 함께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치는 좀 모호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동북쪽 12리'라는 조건은 지금의 태조산에 대략 들어맞지만, 여러 지도에는 태조봉이 천안향교 뒷쪽, 즉, 오늘날의 왕자산에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1편에서 살펴봤듯이 왕자산은 군 관아로부터의 거리가 10리에 미치지 못한다.

  ▶ <대동여지도>에도 왕자산이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왕자산'이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자세하지 않아서 위치를 어림하기가 쉽지 않다. <대동여지도>에는 만일고개 남쪽에서 갈라지는 '영인지맥' 위에 표시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백석대학교 뒷산인 왕자산에 가깝다. 하지만 1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산은 맥이 천안군 관아로 이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인지맥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대동여지도>에는 왕자산이 영인지맥 위에 표시되어 있다. 취암산과 흑성산 줄기가 잘못 표시되어 있고, 망일령 역시 위치가 틀린 점 등 <대동여지도>의 천안 일대는 오류가 많다. 도리티로 이어지는 수조산 줄기 또한 이름도 맥도 모호하다. 그렇다면 왕자산의 위치도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래 지도는 <대동여지도>의 原圖라고 할 수 있는 <동여도>이다. 이 지도에는 왕자산 주변이 <대동여지도>에 비해 약간 더 자세하다. 영인지맥에서 작은 산줄기가 갈라져 나왔고 그 부분에 '왕자봉(왕자산이 아니고)'과 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도 역시 그 위치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성이 있었다고 하면 뭔가 힌트(성터를 찾는다면)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동여도>에는 '왕자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 지금의 위치와 비슷한 곳에 표시된 지도

  지금의 태조산 위치와 거의 비슷한 곳에 태조봉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도 있다. <비변사인방안지도(1745-1765)>인데(1편 참조), 이 지도에는 금북정맥에서 서쪽으로 튀어나온 산줄기에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태조봉은 실제로는 금북정맥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아니라 금북정맥 상에 있다.

  『충청도읍지』(순조대) 지도에는 '태조산'으로 표시되어 있고, 동쪽 1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덧붙여진 지도에 표시된 위치도 지금과 거의 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太祖'가 아닌 '泰祖'로 표기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태조의 묘호에는 '太'를 쓴다. 잘못 썼을 수도 있지만  '太祖峰'과는 다른 산일 가능성도 아주 빼버릴 수는 없다.

『충청도읍지』 지도에는 '泰祖山'이 대략 지금의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왕자산(태조봉) 위치 비정과 관련된 몇 가지 딴지

  ▶혹시 향교가 옮겨지지는 않았을까?

  여러 지도들이 태조봉을 천안향교 뒷쪽에 표시하였다. 그렇다면 혹시 향교가 옮겨진 것은 아닐까? 하지만 천안향교는 세운 뒤로 한 번도 이전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영성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관아 동쪽 6리에 있었다. 『여지도서』나 『충청도읍지』 등에는 '군 동쪽 7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략 동쪽으로 6~7리에 향교가 있었는데 이는 2.76km~3.42km 범위이다. 실제 관아터에서 천안향교까지 거리는 약 3km이다.

  ▶방위가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실제 방향은 동쪽이 아니라 동북쪽으로 왕자산과 거의 같다. 하지만 모든 기록에서 일관되게 '동쪽'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왕자산에 대한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대부분 '동북12리'로 적었지만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등에는 '동쪽 10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면 정확한 방위각을 따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里는 과연 정확했을까?

  천안향교 뒷쪽 왕자산은 여러 지도에서 표시한 위치에 가장 잘 들어맞지만 거리가 짧다. 그렇다면 혹시 거리가 잘못 기록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모든 문서들이 최소 10리 이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가능성이 낮다. 리(里)의 기준이 달랐을 가능성 역시 거의 없다. 다만, 기록들이 과거의 기록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초기 기록이 잘못되었고, 그것이 반복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또한, 당시 길은 대부분 구불구불했으므로 실제 거리는 오늘날에 비해 멀었다.

  ▶성불사는 줄곧 그자리에 있었을까?

  일부 지도는 성불사 뒷쪽에 왕자산을 표시해 놨는데 그렇다면 혹시 성불사가 이전했을 가능성은? 역시 가능성이 없다. 성불사는 마애불 때문에 세워진 절로써 거대한 바위를 통째로 옮기지 않는 한 옮겨질 수가 없다.

  ▶태조이성계와 관련이 있는 산?

  태조이성계가 성불사에서 기도를 올린 뒤로 성거산을 태조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그렇다면 왕자산과 태조산은 다른 산일 수도 있다. 즉, 태조왕건에서 비롯된 이름은 왕자산이고, 태조이성계에서 비롯된 이름은 태조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거산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쓰이고 있으므로 만약 이 가설이 성립하려면 성거산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태조봉 자리에서 옮겨졌어야 한다.

  ▶문헌에는 '왕자산', 지도에는 '태조봉'

  위치를 추측하는 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재미있는 점이 하나 더 있다. 문헌에는 왕자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태조봉은 주로 지도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문헌 중에서는 「충청도읍지」에만 태조산이 등장한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점은 충청도읍지」의 한자 표기가 '太祖'가 아닌 '泰祖'라는 사실이다. 둘 다 뜻은 '크다'는 뜻이지만 왕의 묘호로는 '泰祖'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에는 태조봉이 '군 동쪽10리이고, 향교의 주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태조봉(泰祖峰)은 향교 뒷산(왕자산)에 가깝다.

▣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줄곧 지금의 위치에 태조산이 표기되었다

  태조봉을 지금의 위치에 표시한 최초의 근대적 지도는 1918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지형도(아래 지도)이다. 이 지도가 축척과 방위가 정확한 최초의 지도이므로 이후로 만들어진 지도들은 이 지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일제도 나름 조사를 해서 위치를 정했겠지만, 면밀하게 자료를 검토해서 위치를 정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지도가 태조봉의 위치를 오늘날의 위치에 표시한 최초의 지도이다. *조선총독부(1918)

▣ 천안 타운홀 전망대에서 오룡 보기

 

천안 타운홀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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