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만에 나선 길: 역맛살이 살아 있었다
오랫만에 길을 나섰다. 코로나가 창궐한 뒤로 거짓말처럼 역맛살이 자취를 감췄다. 내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아니면 직업병이나 강박증이었던 모양이다. 2020년 1월에 동아프리카를 다녀온 뒤로는 여행, 또는 답사를 위해 충청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2021년 여름 방학도 속절없이 다 끝나갈 무렵, 가는 방학이 아쉬워서 길을 나섰다. 아내가 가끔 남해 멸치회무침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갈곳을 남해로 정했다. 남해로 정하고 났더니 이것저것 떠오르는 곳들이 있다. 학습된 것이든, 강박증이든, 어쨌든 '역맛살이 살아 있구나' 싶어서 내 스스로 다행스럽다.
맨 먼저 사천 별학도가 떠오른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이 온난화 대비 작물 시험재배를 하는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이영문씨를 수소문해보니 사천 곤명면에서 '태평농연구소'를 운영하고 계신다. '통영대전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서진주IC에서 내려서 2번국도를 타고 가면 된다. 지도를 보다 보니 작은 아들 훈련소에 있을 때 면회갔다가 가본 진양호 옆을 지난다. 그때 '낙남정맥은 없다'를 썼었는데 면회를 다녀온 뒤에 지도를 보다가 낙남정맥이 끊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도와 로드뷰로 글을 썼었으므로 직접 확인해 보고싶은 '직업병'이 발동한다.
그때 완사전통시장도 우연히 갔었는데 뻐끔뻐끔 입을 움직이는 커다란 대구를 재래시장 좌판에서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조도 아닌 좌판에 살아있는, 바닷가도 아닌 곳에서, 그것도 대구를 동해안이 아닌 남해안쪽에서 봤던 것이 뇌리에 박힌 것이다. 지리학도의 '도식'을 넘어서는 현상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그런것은 교과서적인 지리적 현상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거기도 한 번 가봐야겠다. 그때 그 대구가 여태 기다릴리는 없지만.
▣ 댐 수위가 낮으면 역류할 수도 있는 가화천
그래서 다시 가보게 되었다. 어차피 가는 길에 있으니까 겸사겸사.
2번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가 내려서(진주시 내동면 삼계리) 옛길을 따라 가다보면 가화천을 만나고 가화천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분수계가 잘라진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실수를 했다. 수문을 그냥 지나친 것이다. 글을 쓰려고 보니 수문 사진 딱 한 장이 아쉽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내 '대충병'은 이십년이 지나면 고쳐지려나···
수문 밖(사진에서 수문의 아래)에 물이 고여있다 *자료: 카카오맵 **위성영상을 클릭하면 카카오맵으로 이동
수문 밖에도 물이 많이 고여있는 것을 보면 하천을 강제로 역류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강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가화천이 남강으로 흘러들어갔었지만 지금은 거꾸로 댐 수위가 높을 때 물을 빼는 방수로로 바뀌었다. 그래서 꽤 많은 구간을 파냈는데 수문 근처는 하천 바닥의 높이가 낮아서 물이 항상 고여있다. 수문이 없다면 댐 수위가 낮을 때 물이 역류할 수 있겠다.
바닥을 파내기 전에 분수계는 이곳에서 무려 3km나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3km 구간 모두를 파치는 않았겠지만 이중에 꽤 많은 구간을 파야만 했다. 위 위성 영상을 보면 수문에서 1.6km구간까지는 물이 고여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4km 이상은 파서 하천 바닥 높이를 낮췄다는 뜻이다.
▣ 백악기 퇴적층과 공룡 화석지
이 일대는 모두 백악기 퇴적암 지대로 공룡 발자국 등 백악기 화석이 많이 있다. 방수로 공사를 하느라 퇴적층을 파내게 되었을 것이다. 하천 바닥이 퇴적암반이고 바위 조각들은 아직 원마(圓摩)가 이루어지지 않아 모서리가 각이 살아있다. 쌓여 있는 방향으로 보면 방류할 때 물이 흐르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 분수계를 파기 시작한 때는 1936년: 공부 안 하고 가면 생기는 일
남강댐이 완공된 때는 1969년이다. 그러니까 댐이 완공되기 전에는 가화천이 남강으로 흘렀을 것이다. 자른 부분 가까이에 다리(유수교)가 놓여 있다. 마침 다리 밑에 사람들이 모여서 더위를 피하고 있다. 혹시나 옛날 모습을 추적해 볼 수 있을까 해서 가봤다. 70대~8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들로 준공할 무렵을 기억할 만하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모두 옛날부터 이렇게 흘렀다는 것이다. 뭐지?? 옛일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 수는 있지만 이곳이 고향이라는 이분들의 기억이 똑같다면 내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노인은 산사태가 나서 파냈는데 그때 현장에서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잘못된 기억은 아닌 것 같다.
남강댐 안내 자료를 뒤져봤더니 힌트가 있다. 댐이 완공된 것은 1969년이지만 방수로 공사를 시작한 때는 1939년이다. 여러차례 공사가 중단되었었고, 우여곡절 끝에 1969년에 댐이 완공되었는데 순서가 방수로 공사가 먼저일테니 방수로는 일제 강점기에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70대 중후반으로 어림되는 분들이니 출생연도가 1940년대 이후일 것이다. 착공했을 당시는 태어나기 전이었거나 아주 어릴 때였고, 공사가 해방 이후까지 진행되었다고 해도 역시 어릴 때였으니 분수계를 자르기 전 하천의 흐름을 기억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겠다. 기억에 있을 수 없는 걸 물은 것이다.
▣ 잘린 낙남정맥: 굳이 자를 필요가 있었을까?
유수교에서 바라보면 분수계를 자른 자취가 뚜렷하다. 자른 부분을 콘크리트로 보강해놨는데 그 높이가 꽤 된다. 옛날에 산사태가 나서 파냈다고 했던 노인의 말이 이해가 된다. 콘크리트로 보강하기 전에는 사태가 날 수 있었겠다. 작은 지류가 흘러들어오는데 가화천 바닥보다 3~4m 높은 곳에서 가화천과 만난다.
결국 낙남정맥은 잘렸다. 일제의 풍수침략 가운데 하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산줄기는 낙동강 하구까지 이어지므로 진주, 사천, 함안, 창원, 김해 등 꽤 많은 지역이 잘린 산줄기 범위에 포함된다. 도참사상을 들먹일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지만 굳이 자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방수로가 꼭 필요했는지도 의문이지만, 꼭 필요했다고 해도 자른 구간을 보면 터널로도 충분히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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