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散村, dispersed settlement),
태안반도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경관이다.
해안지형, 국립공원, 농수산 특산물 등 많은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 태안반도지만 특히 산촌은 태안반도의 다양한 특징들을 포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리적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촌락 형태는 집촌(集村, agglomerated settlement)이 일반적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벼농사가 기반이 되기 때문인데 벼농사는 협동노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농이 불가능하므로 집촌을 형성한다. 따라서 태안반도에 발달하는 산촌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으로 그 자체로 큰 지리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태안반도의 산촌은 그 자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예외적인 현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 현상 이면에 독특한 원인들이 깔려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그 원인들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의 퇴적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태안반도의 산촌은 태안반도의 역사지리적 환경을 포괄적으로 함축한 문화경관으로 이를 탐구함으로써 태안반도의 지역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자연적 배경
'非山非野'라는 표현은 지형 용어가 아니지만 이제 태안반도의 지형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자리를 굳혔다. 지리학도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낮은 산지와 구릉지가 발달한 독특한 지형을 설명하는데 이만한 말이 없는 것 같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지형은 큰 하천이 발달하기 어려운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태안반도 일대는 논농사를 하기 적당한 지역이 적었다(오늘날은 간척 사업과 인공 관개로 단점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논농사 지역이 훨씬 많다).
또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작은 반도와 만이 발달하여 해안평야가 좁으며 구릉지 사면과 구릉 사이의 곡지를 경지로 이용하기 때문에 농경지의 규모가 작고 불연속적이다.
하천이 잘 발달하지 않으므로 대부분 토질이 건조하지만 높은 산지가 없으므로 지하수면은 얕다.
바다에 인접하여 습하지만 상승 기류를 일으킬 정도의 높은 산지가 없기 때문에 강수량은 적은 편이다.
이상과 같은 태안반도의 지형 및 기후 환경은 산촌이 발달하는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즉, 태안반도의 산촌은 이 지역의 자연지리적 특징을 바탕에 깔고 있다.
▣ 역사적 배경
▶ 고대의 태안반도
해안에 인접하여 선사시대부터 인간 거주지역이었다. 대산반도를 중심으로 선사유적이 분포하는데 일찍부터 채집에 유리한 해안을 따라 거주지가 되었으나 태안반도 전반에 걸쳐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고대국가 시기에는 致利鞠國, 臣蘇塗國 등 마한에 속한 부족국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도는 제사장의 관할하에 있던 지역으로 이곳이 마한의 대표 소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제사의식과 관련된 사람들, 또는 도피해 오는 죄인들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교류 통로였을 가능성이 크다. 백화산의 마애불은 우리나라 最古級(6세기)의 마애석불로 삼국시대 이 일대가 대중국 문화교류가 활발하던 지역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태안반도는 교역이나 종교와 관련하여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어떤 형태의 취락이 발달했었는지는 추측하기 어렵다.
▶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먼저 조운이다. 개경이 고려의 도읍이 되면서 태안반도는 삼남에서 거둬들인 세곡이 지나가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정부 차원의 위치적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주민들이 운하 굴착을 비롯한 부역에 동원되는 일이 많아졌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국력이 약화되기 전까지는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취락과 성곽취락 등이 발달했었다. 하지만 우왕 원년(辛禑 元年, 1375) 이후 10여 년 간 서해안 일대는 왜구의 침입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태안 지역의 피해가 컸다. 해안에 인접한 대부분의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내륙으로 난을 피하여 이주함으로써 이 일대가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거주지화가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군사 시설을 설치하여 해안 방어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었다. 해미, 서산, 태안에 읍성이 복구, 또는 신축되었으며, 평신진(현 대산읍), 안흥진(현 근흥면), 소근진(현 소원면) 등의 해안 방어 기지가 신설되었다. 또한 봉수 6개를 설치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와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에 힘입어 태안반도 일대의 인구가 사회적 증가로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으므로 산촌이 일반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세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 태안의 호당 경지면적은 17.2결이 되는데 1결을 대략 3천평으로 계산한다면 호당 5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이다. 통계의 오류가 있었다고 추정하더라도 당시 태안반도 일대는 호당 경지 면적이 매우 넓었으므로 가옥 간의 거리가 멀었을 가능성이 크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인구 증가가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했지만 특히 태안반도는 미 개간지에 새롭게 입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양란의 혼란기에 한성을 떠나 피난을 온 사족들도 이 지역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태안반도 일대에 많은 종족촌락들이 분포했는데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형성되었다.
새롭게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존에 점유된 토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터전을 잡고 땅을 개간하여 경지화하였다. 태안반도 일대에 산촌이 일반화된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 태안반도 산촌: 인간과 환경의 오랜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문화경관
▶ 부족한 지표수: 밭농사 중심의 농업
지표수가 부족하면 논농사가 발달하기 어렵다. '비산비야'의 지형이 발달한 태안반도 일대는 하천이 잘 발달하지 않기 때문에 논농사가 발달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조선시대까지 태안반도 일대는 밭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았다. 「세종실록」에는 태안의 토지 상황이 '墾田 2985결, 水田 7분지2'로 기록되어 있으며, 김정호의 「대동지지」는 '田 3101결, 답1467결'로 기록하고 있다. 논농사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논농사는 벼를 단일 작물로 재배하므로 모내기, 벼베기 등이 마을 단위로 거의 동시에 이루어져서 한꺼번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벼농사 지대는 대부분 집촌을 형성한다.
반면에 밭은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에 파종시기, 수확시기가 각기 달라서 소규모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따라서 밭농사 지대는 굳이 모여살지 않아도 가족 노동을 중심으로 영농이 가능하다.
▶ 풍부한 지하수: 어느 곳에 집터를 골라도 된다
반면에 지하수면이 얕아서 음료수를 얻기는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음료수가 귀한 지역에서는 음료수 주변에 가옥이 밀집하기 마련이다. 제주도의 해안 용천대나 선상지의 선단 등이 전형적인 예이다. 지하수면이 낮은 태안반도 일대는 경지 근처에 우물을 파서 쉽게 음료수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굳이 모여서 살 필요가 없었다.
▶ 왜구의 침탈과 주민의 은거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의한 극심한 피해는 주민들을 대거 이탈시켰다. 대부분의 주민이 태안반도를 떠남으로써 이후 산촌이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남아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은거에 유리한 산지에 흩어져 거주하였다.
▶ 조운의 요충지와 대규모 토목 공사
앞에 서술한 것과 같이 태안반도는 고려시대 이후 삼남의 세미를 수송하는 조운로상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만의 출입이 많고 바닥이 고르지 않으며, 조류가 강한 곳이 많아 세곡선이 이동하기에 불리한 점이 많았다. 이에 조운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대규모 운하 건설 공사가 여러 차례 있었다. 굴포운하, 굴항(안면도)운하, 서굴포(의항)운하 등이다. 대규모 운하 건설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주민들이 수시로 부역에 징발되었다. 농업이 밭농사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가족 노동 중심으로 연중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했는데 노역으로 주민(대개 남성)이 징발되면 정상적인 영농에 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따라 부역을 회피하기 위해 지역을 이탈하거나 은거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낮에 파 놓으면 밤에 도깨비가 메운다'는 말이 있었다거나, 부역에 동원된 일꾼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은 곳에 '신털이봉'이라는 봉우리가 만들어졌다는 전설 등은 당시 백성들이 겪었던 노역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 소작제도와 신분제도
조선시대 지주들이 소작을 주었던 토지는 대부분 논이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밭을 일굴 수 있는 땅, 즉 비어있는 땅을 찾아 밭으로 일구어 필요한 농산물을 생산함으로써 부족한 식량과 생필품들을 보충했을 것이다. 소작인들이 보다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점유되지 않은 땅을 찾아야 했으므로 산촌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신분사회에서 지주인 양반과 평민인 소작인은 거주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소작인의 집을 시야에서 가리기 위한 숲(防視林)을 조성한 사례도 있었다(태안읍 평천리 명씨 종가). 이러한 관습은 가옥과 가옥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였다.
▶ 분가 양식
태안반도 일대에서는 생계를 유지할 경지를 상속하고 경지에 인접한 곳에 집을 지어 분가시키는 관습이 있었다. 최근까지도 새롭게 땅을 사들일 때 논은 다소 먼 곳에 있어도 사들이지만 밭은 가능한 인접한 것만 사들이는 경향이 유지되어 왔다. 또한 타인의 택지에 근접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택지는 반드시 자기 소유여야 하며 택지를 빌려주지도 않고 남에게 빌리지도 않는다는 원칙이 통용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아마도 외부인의 유입을 경계하는 분위기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큰데 결과적으로 분가하여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옥이 본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이봉준, 1976, 태안반도의 산촌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을 기반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충청남도 > 태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크영상]산촌-태안반도를 이해하는 키 워드 (0) | 2023.11.22 |
---|---|
[토크 영상] 굴포운하(II) (0) | 2023.10.26 |
[토크영상] 안흥진성으로 보는 태안 (0) | 2023.10.09 |
[답사 영상] 안흥진성 (0) | 2023.09.24 |
[토크 영상] 안면도에 화산이 있다 (0) | 2023.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