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세상사는 이야기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영화 '동주'

Geotopia 2016. 2. 28. 23:30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왠지 불편하고 불만스럽다. 일제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지도, 식민지 모순을 잘 드러내지도 못했다. 게다가 영화 제목은 '동주'인데 정작 윤동주는 송몽규의 그림자로 그려졌다. 몽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끝내는 홀로서고, 나아가 몽규를 뛰어넘으리라는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끝내 동주는 몽규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영화가 끝이 나고 만다.

  내 이야기를 듣고는 아내가 핀잔을 한다. 영화가 꼭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담아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이준익감독의 특징이라는 해석과 함께. 제목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가는 말이다. 왜 제목은 <동주>일까, <윤동주>가 아니고? <윤동주>라고 제목을 지었다고 상상해 보면 그 답은 금세 명확해진다. 즉, '윤동주'는 흔히 회자되는 역사 속의 인물이다. 하지만 '동주'라고 부르면 거창한 역사적 이름이 아니라 주변에 있을 듯한 어떤 사람을 부르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내가 불만족스러워 하는 그것들이 모두 그려지지 않았느냐고 반문을 한다.


  물론 모두 그려졌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위안부 문제와 역사교과서 왜곡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이 때 영화가 대중에게 좀 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줘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난 항상 그랬다. '왕의 남자'나 '사도'는 역사적 맥락을 담지 못했다. 당쟁을 중심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정확하게 배경으로 깔지 못한 상태에서 왕이나 왕자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폭군, 또는 성군이라는 '현상' 이면에 깔려있는 당파성과 사회적 모순이라는 '본질'을 도외시해서는 진실을 그리기가 어렵다고 나는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본질을 가린 상태의 대중예술은 결국 대중을 오도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같이 영화를 본 아들에게 물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유명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즉 대략은 아는 이야기이므로 그 배경이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들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단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보가 오픈되어(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찾아볼 수 있는) 있으므로 궁금한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마트폰이 삶의 일부가 된 아들 세대는 어떤 사실을 굳이 기억하기 보다는 궁금할 때 바로바로 찾아보는 행동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가볍게 볼 수 있는 내용으로 미끼를 던지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완성된 지식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지식을 스스로 구성해갈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갑자기 느낌이 왔다.

  나는, 사회과학적 사고가 몸에 배인 70-80세대의 한 명인 나는 영화가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교사라는 지나친 직업정신까지 더해져서 현상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본질을 설파해야만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윤동주가 송몽규에게 물었던 그 질문, "시가 꼭 시대정신을 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그렇다"고 내려 놓고 그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대답이 나오지 않고 영화가 끝났으므로 불만스러울 수 밖에…


  거대한 담론들이 많다.

  인류의 공영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에서부터 특정 민족이나 국가를 결속하기 위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좀 더 범위를 좁혀보면 지역주의 등등. 개인적 이해관계 보다는 공동체의 의미를 내세운다는 것이 거대담론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특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범 인류적 담론이 지배했던 시대였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우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낳았고 둘은 견제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립운동에도 당연히 당시의 시대적 담론이 담겨있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운동가들이 있었고(그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지만) 송몽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와 거대 담론을 받아들이고 체화하는 것 만이 독립운동이라는 큰 길을 갈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은 아니다. 개인적 생각과 신념도 결과적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의미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윤동주는 송몽규에 비해 민족적 자각은 적었지만 송몽규 못지 않은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 후손인 우리가 송몽규보다는 윤동주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서 보면 어쩌면 송몽규보다 윤동주의 삶이 더욱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민족적 자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송몽규의 세계 인식은 당연히 치열한 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몽규가 고민하는 지점은 항상 거기다. 문학도, 인간관계도 모두 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현상의 이면에 깔려있는 식민지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문예지를 만들고 거기에 사상을 담으려고 애를 쓴다. 식민지 모순의 본질을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에 윤동주가 고민하는 지점은 '시'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시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조건이 그에게는 가장 절실하다. 시에 사상을 담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우리말 만큼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은 자신의 문학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도록 한다. 민족적 자각이 없어도 식민지 백성에게 식민지 상황은 괴로운 것이다. 개인적 삶을 제약하는 괴로운 현실, 그것은 그 이면에 깔린 거대한 담론이 없어도 피부로 와닿는 것이다. 그에게 현상은 곧 본질인 것이다. 혹시 동주의 행동이 민족적 자각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행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나는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구나. '진보'라는 80년대의 틀을 21세기에 적용하는 '보수적' 사고를 하고 있었구나. 현상은 껍데기라고 여기고 그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평가절하 하는 과거의 인식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진보'가 곧 '보수'가 되는 아이러니를 저지르고 있었구나.


  대중은 무지하지 않거나 적어도 스스로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정보들은 대중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그런데도 대중들이 본질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옳지 않다'기 보다는 '효과가 없다' 만약 본질을 잘 모른다 손 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지를 인정했었다. 운동권의 논리는 진보적이었으며 대중들이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깨우쳐주는 측면이 있었으므로 대중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정보가 오픈되어 있다. 아닌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대중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현상은 그 자체로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은 이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의 문제이다.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해석하고 가르치려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현상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는 현상학적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서구의 근대화를 이끈 이성과 합리주의의 단계에 제대로 도달하지도 못했지만 놀랍게도 어느새 그것을 넘어가는 세계사적 인식론이 이 사회에 통용되고 있으며 이준익감독은 그 인식론을 앞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이미 누군가는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만 자기의 세력으로 인정한다.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도외시 해도 된다. 남북관계가 경색되어도 별 상관이 없다. 재벌 2세가 대놓고 갑질을 해도 된다. 공공기관에 자식이나 아는 사람이 합격하도록 청탁을 해도 된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만 모으면 된다. 도대체 부끄러움이라고는 없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많은 대중은 그것을 좇는다. 그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지만 자기의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들의 특징은 '만인의 행복'을 절대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수결'의 원리를 철저하게 잘 활용하고 있다. 이성적 판단에 따른 다수결이 아닌 이익 연합에 의한 다수결로 놀랍게 치환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누군가는 여전히 '만인의 행복'이라는 무지개를 좇고 있다. 이익이라는 현상의 이면에 분리와 차별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드러내고 가르치기 위해 애를 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대중 앞에서 감히… 본질이 현상의 이면에 가려져 있다고 믿는 한 이들은 언제까지나 그 본질을 설파하기 위해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 승부가 날 수가 없다.


  동주의 현실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부끄러움'이다. 항상 몽규 앞에서 부끄럽다. 몽규처럼 치열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로 그것이 윤동주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그 '부끄러움'에는 거대한 시대적 담론이 담겨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곧 시대적 소명과 상통할 수 있는 것이다.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닐세.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영화에서 정지용과 윤동주가 나누는 대화이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송몽규는 조서에 싸인을 한다. 그것이 생체실험 대상자들을 합법적으로 다루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는 그 조서에 싸인을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온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으므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조서에 싸인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는 싸인을 거부한다. 조서에 나와있는 '거창한' 독립투사의 면모가 자신에게는 맞지 않고, 또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부끄러워서' 싸인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둘은 한 달 사이로 같은 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시대적 소명에 부응한 '운동'과 개인적 '부끄러움'이 같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부끄럽지 않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민족의식과 부끄러움은 차원이 다르지만 결국 몽규와 동주는 같은 길을 갔다. 시대적 소명에 한 목숨을 바치는 것과, 작지만 개인적 실천을 하는 것은 크게 보면 의미가 같은 것이다.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알고 자기를 다스리고자 노력하는 것과 시대적 소명에 한 목숨 바치는 것은 결국 백짓장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이익 앞에서는 후안무치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 이때,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더욱 의미있는 지금 이 시대에, 감독은 어쩌면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윤동주의 빛이었던 송몽규를 <동주>라는 제목 속에 숨겨서 부각시키는 신의 한 수를 선보인 듯 하다. 


  관객을 어떤 의도로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의 메시지를 던져서 관객이 각자 생각하고 의미를 찾아가도록 유도하는 것이 이준익 식의 메시지 전달법이 아닌가 싶다. 현상 이면의 본질을 찾아가고 말고는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