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지리동아리 답사

내포 답사-2015 천안여고 지리교과 캠프(1)

Geotopia 2015. 10. 23. 15:11

▶ 답사 일: 2015.10.17(토)

 

▶ 내용: 천안여고 지리교과캠프

 

▶ 답사 경로

  공세리성당-삽교천(선우대교)-예당평야-삽교천(구양교)-이존창생가지-추사고택-구만포-남연군묘-봉림리 한산이씨 종족촌락-서산마애삼존불-해미읍성   *이 글의 내용은 빨간 글씨까지 입니다

 

<답사 경로  *원도: Google Earth>

 

 

▶ 공세리 성당-이렇게 하면 칼로 치기 좋으냐?

 

<공세리 성당>

 

  제법 많이 와 봤지만 올 때 마다 새로운 것이 있다. 이번엔 김대건신부 순교 100주면 기념비가 눈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이 비석은 1946년에 세워졌다. 김대건신부가 순교한 때가 1846년이므로 순교 100주년 기념비는 1946년에 세워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날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비석을 여러 번 봤을 것이며 보고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글귀가 주는 느낌이 지금 시점에서 가장 와 닿기 때문에 새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칼로 치기가 좋으냐? 나도 예비가 다 되었으니 치라"

 

  신념은 어떤 물리적인 힘보다 강하다. 생을 마감하는 가장 두려운 순간에 이처럼 태연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신념이었을 것이다. 그 신념의 구체적 내용은 보통 사람인, 더욱이 종교인이 아닌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크다. 하지만 살아가는데 있어 신념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은 삶을 통해서 느낀다. 그것이 꼭 종교적 신념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시대적 소명과 개인적 안위, 그리고 정의… 생각이 복잡하다.

  당시의 천주교는 어떤 의미였을까? 정권에서 배제된 실학자, 또는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수용된 것을 볼 때 부패한 권력과 기득권에 대한 대항의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므로 정권의 입장에서도 천주교를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권에 대한 대항 만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기는 어렵다. 즉, 종교적 신념이 결합되지 않았다면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려야 하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를 기리는 것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비슷한 상황이 되면 자신도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지기 위한 것일까?

 

<공세리성당의 김대건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

 

▶ 예당평야-대역의 지세?

 

  내포가 '한양 사대부들의 터전'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이 중요했다. 삽교천과 무한천 중상류 지역에 발달하는 하곡평야가 이들은 유인한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특히 차령산지에서 발원하는 무한천 유역은 편마암산지 특유의 생태적 잠재력으로 조선 중·후기 많은 한양 사대부들을 유인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는 지금의 예당평야 일대가 드넓은 곡창지대가 아니었다. 범람이 잦은 하류지역은 치수(治水)가 어렵기 때문에 거주지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의 예당평야의 상당 부분은 밀물과 썰물 때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벌이었다. 삽교천 방조제를 막고 간척을 하여 드넓은 옥토를 만든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원래 예정했던 코스는 아산시 선장면과 당진시 우강면을 연결하는 선우대교를 건너 솔뫼성지 부근을 거쳐 합덕읍을 지나 이존창생가지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버스가 갑자기 큰 길을 벗어난다. 몸체가 길어서 한번에 회전을 할 수 없을 만큼 좁은 길을 앞뒤로 두어번 왔다갔다 하더니 지하통로를 지나 농로로 접어든다. 다른 차라도 만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데 창밖의 주변 경치는 그만이다. 예당평야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데 여태껏 한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길이다. 알고보니 기사 아저씨가 이곳이 처음이라서 네비게이션을 작동시켰는데 이 길을 가르쳐주더라는 것이다. 덕분에 여직껏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예당평야의 한 가운데를 가 보는 부수입을 얻었다. 잠깐 내려서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예당평야는 삽교천 하류 지역에 펼쳐진 너른 평야이다. 차령산지와 가야산 줄기 사이에 발달한 넓은 화강암 지역으로 그 폭이 대략 동서로 15km, 남북으로 20km가 넘는다. 전체적으로 장축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으며 장축 방향으로 삽교천이 흐른다.

  혹자는 하천의 방향이 북쪽의 한성부를 향하는 방향이어서 '대역의 지세'라고도 한단다. 내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를 작년에 전북 고창으로 답사를 갔다가 고창 문화해설사에게 처음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창의 갈곡천과 이곳의 삽교천 만이 이런 방향으로 흐른다고 한다. 

  사실 한반도의 하천은 대부분 중국방향과 랴오뚱방향의 구조선을 반영하기 때문에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까 삽교천은 특이한 방향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대역죄인들이 양산된 곳은 결코 아니다. 대역 죄인은 커녕 최영, 성삼문, 최익현, 김좌진으로 이어지는 충절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이들도 집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역 죄인이 될 수도 있으니 그 말이 맞다고 할 수 있을까? 맞다면 때로는 '대역'이 '죄'가 아니고 '충절'이라는 뜻이 된다. 이래서 역사에서 건조한 'Fact'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삽교천을 건너는 구양교. 합덕과 신례원을 연결하는 옛길에 있다>

 

<구양교에서 바라본 삽교천의 하류쪽>

 

<삽교천 제방 뒷편 범람원에 있는 가옥  *천안여고 가채원 촬영>

 

▶ '내포'의 부활-내포문화숲길

 

  사라졌던 이름 '내포'가 부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들이 매우 많아졌다. 충남 도청이 '내포시'로 이전을 하면서 공식화되었지만 부활의 진정한 증거는 일상 생활에서 내포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선 상호로 '내포'가 쓰이는 경우가 꽤 많아졌다.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이니 1998년 당시 내포 전 지역에 달랑 3개 뿐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이다(1998년 석사 논문을 쓸 당시에 전화번호부로 조사했던 숫자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내포문화숲길'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표지판의 색깔이 아직 선명한 것으로 보아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당진시, 서산시, 예산군, 홍성군 등 4개 군에 걸쳐 24개 코스와 역사 인물 지선 2개를 포함한 총 320km에 이르는 트레킹 코스이다. 사단법인(http://www.naepotrail.org/)이 꾸려져 운영이 되고 있다. 오랫동안 내포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으로서 매우 반가운 변화이다.

 

<'내포'라는 이름이 부활하여 이젠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내포문화숲길  *출처:(사)내포문화숲길>

 

 

▶ 이존창 생가 터-하평포구가 보고 싶다.

 

  이존창 생가 터는 15년 전 내가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순례객들이 늘어나면서 외곽 진입로가 생겼고 더불어 넓직한 주차장도 생겼다. 생가터도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무언가 있어 보인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삽교천 쪽을 조망할 수 있는 데크를 설치했는데 그것보다 더 높고 큰 도로가 그 앞에 새로 나서 전망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천주교인이 아닌 지리학도로서 나는 처음 이곳에 올 때부터 무엇보다 이존창의 포교활동의 '지리적 배경'이 되었던 하평포구를 조망할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답사 안내를 하면서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그럴듯한 경관을 보여주고 싶지만 언제나 말로 대신하는 수 밖에 없다.

 

<이존창 생가 터>

 

<이존창 생가 터에서 바라본 삽교천 유역. 도로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천안여고 가채원 촬영>

 

 

▶ 추사고택-권력이 만들어낸 장소

 

  권력의 부침이 격심했던 조선 후기에 김정희의 경주김씨 가문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영조의 부마였던 증조부 김한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부친인 김한구는 8촌 형제이다. 왕가의 측근으로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김정희의 부친과 조부 역시 정2품의 판서를 지냈다. 그러나 순조 이후 세도정치 하에서 몰락하여 그의 부친 노경은 사사되었고 김정희 본인도 제주도 등 각지로 유배를 당하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추사고택은 권력과 장소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 일대는 내포중에서도 한양과의 연결성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그래서 조선 전기부터 광산김씨, 신천강씨, 순흥안씨, 영산신씨 등 유명 명문가들이 할거하면서 이 일대를 분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이 일대가 대부분 유명 종족촌락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경주김씨 가문이었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세력을 밀어내고 이곳을 어렵지 않게 차지할 수 있었다. 정착 연대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번성한 종족촌락을 이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고택을 비롯하여 묘, 정려 등 세도가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경관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문 사찰, 청나라에서 가져온 백송 등 독특한 경관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택 뒷뜰의 모과나무>

 

<배산임수형의 지형이지만 전체 지형이 동북쪽을 보고 있기 때문에 대문은 동쪽으로 나 있다. 하지만 집은 전형적인 남향이다>

 

<고택에서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묘로 가는 길에 목화가 있어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월성위 김한신, 화순옹주 합장묘>

 

 

▶ 구만포에 공원이 만들어졌다

 

  구만포 답사는 언제나 힘이 좀 빠지는 느낌이 있었다. 구체적인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가보니 작은 공원과 표지판이 세워졌다. 돛대 형상의 조형물에 '구만포구'라는 표시를 했고 작은 정자도 세워놓았다. 구체적인 장소가 있으니까 답사를 안내하는 입장에서는 좀 더 말발이 선다고 할까? 예전에는 다리를 걸어서 건너거나 아니면 제방에서 하천을 보면서 설명을 했었는데 배가 들어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얕아 빠진 냇물을 바라보며 옛날 얘기를 하는 것은 어쩐지 뜬구름을 잡는 기분 같은 것이 있었다. 리지(里誌)를 만들 정도로 마을에 대한 애정이 강한 구만리 노인회에서 주장한 결과일 것 같다.

 

<구만포에서 바라본 서쪽. 오페르트 일당은 이 길을 지나 남연군묘에 이르렀다. 안개가 끼어 가야산은 보이지 않는다>

 

<구만포에서 바라본 동쪽. 예당평야 너른 들판 가운데로 삽교천과 무한천의 분수계를 이루는 낮은 산지가 두 하천의 합류점까지 이어진다>

 

<구만포구에서 바라본 삽교천 상류쪽>

 

<구만포구에서 바라본 하류쪽>

 

<구만포구>

 

<구만포 주변 범람원 배수시설. 배수시설을 설치하여 치수(治水)를 해야 농사가 가능하다>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