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발코니 배수구 홈통 옆에서 자라는 작은 들깨 한 그루를 발견했다. 배수구 옆이니 비교적 수분은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데 실리콘 처리가 된 벽돌 사이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간 뿌리는 어떻게 양분을 취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씨앗은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들깨를 잘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어도 볶거나 갈은 가공품을 구입해서 먹었으므로 발코니에서 생 들깨를 씻어본 적이라고는 없다. 그렇다면 위층에서 홈통을 타고 내려온 씨앗이 우연히 우리집 발코니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당연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데 여하튼 살아있는 생명을 이유없이 뽑아내기가 좀 안쓰러워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좀 더 자라면 수분이나 양분을 감당하지 못하려니 했다. 시들해지면 그 때 뽑아서 화분에 옮기더라도 일단은 그냥 두고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면서 예상과는 달리 녀석이 점점 덩지를 불리는 것이다. 물론 시드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쌩쌩한 상태로. 뒤늦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진은 9월 9일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싹이 트고 한 달 이상 지난 다음일 것이다. 사진에 보는 것처럼 배수구 홈통 옆 부분에 녀석이 뿌리를 내렸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10월 4일. 어라! 이 녀석이 꽃을 피운 것이 아닌가!>
<10월 9일 한글날. 따스한 가을 햇볕을 받으며 잘도 자란다>
<1주일 정도 지난 17일. 잎이 한 두 개 떨어지면서 꽃이 마르기 시작한다. 수분이 부족해서 마르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영글 때 마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10월 22일. 대부분의 잎이 말라서 떨어졌고 꽃(열매)도 반 정도 익어가고 있다>
<10월 31일. 잎이 모두 떨어지고 열매만 남았다>
<11월 2일. 완전히 마른 나무를 뽑았다. 살짝 흔들어보니 열매 속에서 사각사각 흔들리는 소리가 난다. 어렸을 때 들깨 털던 생각이 문득 났다. 흰 종이를 깔고 탁탁 털었더니 20여 개가 넘은 들깨 알갱이가 튀어 나왔다. 참 신기하다. 어디에 매달려 있다가 이렇게 많이 떨어진단 말인가? 꽃 한 개에 여러 개의 열매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씨앗의 목표는 싹을 틔우는 것이다. 하지만 흙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콘크리트 발코니에 떨어졌을 때 씨앗이 느꼈을 절망감은 말 그대로 천길 절벽 같았으리라.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뿌리를 내렸고,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만들어내었다. 얼마나 장한 일인가!
들깨처럼 살아야겠다. 조건에 좌절하지 않고 조건을 만들어 낸 우리집 발코니 들깨처럼. 하찮은 생명은 없다. 덩지가 작아도, 열매가 많지 않아도, 그 씨앗은 영원한 법이니까.
'세상 사는 이야기 >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링크: 조남준 만화] 균형 (0) | 2014.12.28 |
---|---|
프랑스 중산층, 대한민국 중산층 (0) | 2014.12.15 |
질소과자 (0) | 2014.10.29 |
추석 (0) | 2014.09.09 |
한국서 홀대하자 중국서 냉큼 채간 "옥수수 박사" (0) | 2014.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