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 일정
08:30 결성향교 출발 - 09:30 태안향교 출발 - 10:30 만대항 - (솔향기길 1코스) - 11:20 삼형제바위 - 12:00 점심(만대항) - 13:00 솔향기 염전 - 14:00 밤섬 나루터 - 15:10 청산리 나루터 - 16:00 시우치저수지 - 16:30 갈두천 하구 (- 어은천 하구(솔감저수지))
*초대손님: 사진작가 최경자님
*답사 동행: '지식과 세상' 회원님들
▣ 가로림만 훑어보기
▶기원을 알 수 없는 지명 '加露林灣'
'이슬이 더해져 숲을 이루다', 또는 '바다 안개가 아름답다'라고 멋지게 해석되는 가로림만, 그러나 그 근거는 찾을 수 없다. '가로림만'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9년으로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지형도에서 처음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발간 4년 전인 1915년에 측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기록에도 '가로림'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 기원이 될만한 지명도 가로림만 주변에서 찾을 수가 없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일제는 두개의 지명을 합쳐서 새로운 지명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加', 또는 '露', 또는 '林'이 들어가는 지명이 근처에 없어서 그 자취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灣'은 전통적으로 지명 용어로는 쓰이지 않았다.
▶복잡한 지질구조
▶입구가 좁은 호리병 모양의 만
-해안선 길이는 161.84㎞, 해역 면적 112.57㎢, 입구 폭은 2.4㎞, 남북 폭은 23㎞, 동서 폭은 10km
: 간척(농지, 염전, 양식장 등)으로 해안선 길이가 원래 해안선(1920년대까지 325㎞, 전체 해역 면적 138.16㎢)에 비해 50% 줄어들었으며, 전체 면적은 25㎢ 줄어들었다.
-입구가 좁고 만의 내부가 넓은 호리병 모양으로, 나팔 모양(Estuary)을 하고 있는 일반적인 만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
-북쪽에 만의 입구가 있는 유일한 만: 한반도의 전형적인 지질구조를 반영하지 않음.
▶좁은 유역분지: 만 전체 면적의 1.5배에 불과
-유역 분지 면적이 좁아 큰 하천이 흘러들지 않으므로 퇴적물 공급이 적어 염생습지가 거의 발달하지 않음.
-간척지 22㎢, 갯벌 71㎢, 간척율 24%(우리나라 평균 약50%) → 원래 지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주요 하천: 방길천·어은천(서산), 갈두천·삭선천(태안)
-유역 분지 안의 주요 산: 팔봉산(364.4m), 백화산(284.7m), 망일산(302.1m), 연화산*236.3m), 황금산(152.2m), 가제산(185.2m), 이적산(181m), 이화산(171.7m) 등
-가로림만 안에 있는 섬: 고파도, 곰섬, 밤섬, 저섬 등 30여 개
▶ 드론 영상: 가로림만 입구 상공
▶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다: 최대 790.8cm
-밀물 1.4m/sec, 썰물 1.1m/sec
-西물길(창포내)와 東물길 두 개의 갯골: 우도와 고파도 사이로 흐르는 창포내(서물길)가 중심 물길이며 우도와 웅도 사이를 흐르는 동물길로 들어와서 서물길로 나가는 시계 방향의 물흐름이 나타난다. 창포내는 구도항을 거쳐 옛 굴포운하터로 이어진다.
▣ 40여년 넘게 조력발전소 후보지였던 가로림만
▶ 조력발전소 백지화 일등 공신 점박이물범
-가로림만의 마스코트가 된 점박이물범: 조력발전소 계획을 무산시킨 일등 공신. 2012년6월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5마리가 발견됨으로써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건설계획이 백지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천연기념물331호,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 가로림만을 해양생물보호구역으로 지정(2016)
-우리나라에서 3월~10월까지 살다가 11월경에 랴오둥만으로 이동. 랴오둥만 流氷위에서 새끼를 낳아 기른 뒤 얼음이 녹으면 다시 우리나라로 내려온다. 겨울에 북쪽으로 가는 이유는 새끼를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서인데, 새끼는 털이 새하얀색이어서 유빙이 천적으로부터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 만대항
-'가다 가다 만데'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대산과 만대 사이에 다리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
-파도가 센 만 입구: 시스텍(삼형제바위), 자갈해안(삼형제바위 주변), 모래 해안·모래 갯벌 해안(만대항~삼형제바위 사이)
▶솔향기길의 기원: 기름유출사고 때 자원봉사자들이 다니던 길
▶삼성1호-허베이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
▣ 나오리생태예술원
▶ 실수(?)로 태어난 이름 '나오리'
'나오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좋은 작품이 나오리?'에서 왔나??
예술원 주인장 도예가 양승호님의 설명이 재미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뒤 고향인 이곳 이원면 내리로 돌아와 작업을 하고 있는 양승호작가는 생태와 도예를 연결한 독특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 첫번째 작업으로 완성한 작품을 갯벌에 묻었다. 3년 정도 지난 뒤에 꺼낸 작품에는 굴이 달라붙어 작품과 자연이 어울린 독특한 세계가 펼쳐졌다.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서 취재를 왔다. 그런데 취재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곳 주소인 'Nae Ri'에서 오타가 났다. 'e'가 'o'로 잘못 들어간 것이다. 즉 이 마을 이름인 '내리'를 영어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오타로 '나오리'가 된 것이다. 그 이름이 양작가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삶이 모두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양작가님의 이름 내력 설명 마무리.
▶ 나오리생태예술원에서는 차가 자란다
차는 난대성 작물로 북한계가 0℃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원칙적으로 자랄 수가 없다. 하지만 나오리생태예술원 텃밭에는 차가 잘 자라고 있다. 양승호작가가 지리산에서 씨를 받아다가 토착화를 시켰다고 한다. 보성이나 사천 등 남해안 일대에 비해 지리산은 좀더 기온이 낮기 때문에 그곳에서 씨를 받아 오면 이곳에 토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가까운 천리포수목원에도 난대성 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는데 이곳 이원반도도 기후조건이 천리포수목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 기온이 내륙 지역에 비해 높다. 지구온난화의 영향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 솔향기 염전
▶ 조선시대 이후 염전 개발이 많았던 지역
가로림만 연안에서는 조선시대 이후 염전 개발이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하천이 발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간척한 뒤에 염분을 빼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며, 또한 간척후 논으로 쓰기 위해서도 많은 관개용수가 필요하지만 하천이 짧아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으로는 조선시대까지 인구가 많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경제력을 갖춘 유력 종족촌락의 거의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규모가 큰 간척사업을 일으킬 주체가 없었다. 게다가 토목 사업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태안 일대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으므로 간척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민간 주도의 간척사업이 어려웠던 조건은 반대로 이 일대에 관 주도의 토지 이용이 많은 원인이 되었다. 태안반도에서 안면도 일대에는 목장이나 봉산(封山)이 많았다. 어염을 공급하기 위한 염전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천이 발달하지 않아 흘러드는 민물이 적은 자연적 조건은 염전에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 되었다.
육로로 접근이 어려웠던 조건도 염전이 발달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민간인들의 접근이 어려웠으므로 농업이 발달하기 어려웠던 반면,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배편으로 관아나 시장으로 옮겨졌을 것이므로 육로 접근이 좋지 않았던 것이 그다지 큰 장애 요인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배편으로는 한성과의 연결에 유리했으므로 염전이 발달하기에는 더 좋은 조건이 될 수도 있었다. 관에서 설치한 목장이나 봉산이 많고, 또한 지금의 대산읍 일대가 사냥터로 유명했던 사실 등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주민들이 공적·사적 어염 수탈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음이 「湖山錄」에 전한다.
▶ 魚鹽 수탈과 주민 생활
해산물은 조정과 관에 납부되는 것 외에도 관리에게 바쳐야 하는 뇌물도 성행했다. 이를 인정해산(人情海産)이라 하였는데 주민들은 이를 조달하기 위해 농사 외에 해물 채취에 나서야 했다. 특히 해산물은 겨울 채취가 많아 한겨울에 상납용 해산물 채취를 위한고역이 심했고 농번기에는 농삿일을 제쳐두고 해산물 채취에 나서야만 해 주민의 불만이 컸다. 「湖山錄」에는 가난한 백성이 얇은 홑옷을 입고 맨발로 언 갯벌에 들어가 낙지와 석화를 잡고, 그래도 뇌물용 해산물이 부족하면 자사들이 장무관(掌務官: 관아에서 실무를 관장하는 관리)과 관원에 고해 억울하고 참혹한 형빌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었다. 이뿐만 아니라 관리들이 군대를 조련할 때 주민들에게 억지로 소금을 받아내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마을색장(色掌: 요즘의 이장역할)을 비롯한 땅을가진 지주들은 관리의 수족이 되어 앞장서서 수탈을 도와주는 형편이어서 고충은 더욱 가중되었다.
특히 대산, 지곡 등지의 주민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조선 중기 사냥터로 유명하여, 중앙관리들의 왕래가 잦았는데 이들은 물론 중앙 관리를 대동한 지역 관리들에게까지 식사를 제공하고 그들이 타고 왔던 말의 먹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어물과 소금을바쳐야만 했는데 그 양이녹록치 않았다.
소금을 구위 생계를 이어가는 염한(鹽漢)들도 불합리한 세금 징수에 힘겨워했다. 소금 제조 방법에는 염전을 갈아 만드는 경염과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정염이 있다. 경염은 일조량 등 날씨에 따라 생산량 변동이 컸던 것에 비해 정염은수확량 변동이 적어 국가는 정엽으로 세금을 거두고자 했으나, 염한들은 염세의 부담이 적은 경엽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문제와 함께 각처 아문에서 군대의 식량을 위해 염분(鹽盆)을 설치한 호주에게 더많은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그 징수량이 갈수록 늘어나 염한들의 이탈이 속출하였고, 염분이 절반 이상 황폐한 상태에서도 징수량은 오히려 10배에 달해 염한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해양환경공단, 2021, 갯벌 스토리텔링 북(9)-해양생물보호구역 가로림만 갯벌, 대명).
▶ 소금의 역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牧軍 수탈과 주민 생활
「湖山錄」에는 이 일대에 설치되었던 목장에 관해서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로림만 주변으로 목장이 많았는데 태안의 이원반도와 서산의 대산반도에 큰 목장이 있었다. 조선초에는 대산곶과 안면곶 등지에 목장이 있었는데, 이 목장들이 목장 주변에 살고 있던 민간인들과 목장 안에서 말을 사육하는 牧軍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목장은 국가에서 필요한 말을 사육하는 곳으로 말이 국가 전력(殿力)에 해당하는 시대인지라 말을 기르는 목군들은 군부대에 편성된 군인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목군'으로 불렀다.
목군은 말 사육에 필요한 사료를 준비하고 목마군에 편성되며, 지방의 특산물인 우육, 마육, 우마피 등을 토산물로 바쳐야 했다. 또 감목관, 감사, 사복시, 점마별감 등 관원의 순행에 따른 수탈도 이어져 이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는 일이 흔할 정도였다. 말과 관련된 물품의 상납 요구가 끊이지 않자 이들은 목장 말을 부정으로 매각하거나, 도축을 하여 사사롭게 파는가 하면, 마필을 잃어버렸다고 거짓 보고하여 횡령하는 일이 많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오히려 수탈이 더 심해져 목군들의 생활은 더욱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서산군 관내에는 대산면에 대산목장과 이북면에 태안목장, 두 곳이 있었다. 태안목장은 규모가 작아 조선 정조1년에 폐목되어 경기도 남양으로 이전하였다. 반면에 대산목장은 규모가 커서 감목관 1명과 목자155명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이 관리하는 말이 554필이었다. 이곳 목장에서는 매년4월에 숫말 21마리와 암말 31마리를 상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湖山錄」 저자 한여현은 임진왜란 직후 민간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졌는데 이는 전란의 영향보다도 이 시기에 부임했던 관리 들의 착취가 더 큰 원인이었다고 분석한다. 전쟁 전부터 무거운 세금과 부역으로 주민 생활이 궁핍했는데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백성들만 더욱 쥐어짠 결과였다.
한편 목장 안에서는 말 사육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는데 목군이 아닌 민간인이 농사를 지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고, 오히려 관리가 민간인에게 농사를 짓게하고 그 생산물을 착복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벌어졌다. 목군이나 염한에 대한 관의 수탈이 도를 넘자 목군이 이를 벌충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수탈하는 등 폐해는 그치지 않았다.(해양환경공단, 2021, 위의 책).
▶ 京畿지역과의 연결성이 높은 역사적 뿌리
가로림만 일대에는 경기지역, 특히 인천에 연고를 두고 있는 집이 많다. 가족의 일부가 인천에 살고 있거나, 가족 중에 한 두명은 진학을 하여 인천에서 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 인천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던 정기 항로는 1930년대에 처음 설치되었고 1979년에 폐지되었다.
이런 독특한 연결성의 뿌리는 무엇일까? 內浦는 '서울·경기 지역과의 연결성'으로 정의된다. 태안도 내포에 포함이 되므로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가야산 동쪽 삽교천 유역과는 차이가 있다. 홍성, 예산, 당진 등 삽교천 유역은 하천이 길고 배후 산지도 높아 큰 마을을 이루고 살기에 유리하다. 「擇里志」는 '여러 대를 서울에 사는 집으로 충청도에 전답과 주택을 마련해 생활의 근본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집이 없다.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제일 좋은 곳이다”로 적고 있다. 그 결과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은 곳'이 되었다.
그러나 가로림만, 태안반도 일대는 큰산이 없고, 따라서 물이 적기 때문에 논농사에 기반을 둔 대규모 종족촌락이 발달하기가 어려웠다. 대신에 염전, 목장, 封山, 사냥터 등으로 활용되었다. 이들은 모두 조정과 왕실을 위한 公的 토지 이용으로 이를 원활히 수행하려면 서울과의 교류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즉, 조선시대 내내 서울·경기지역과 태안군 사이에는 물자와 사람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 밤섬 나루
▶ 구도-인천을 오가던 여객선이 들르던 항구
청정한 갯벌에서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어패류의 서식지가 가로림만이다. 간조 때에는 어부들의 쉼터로, 만조 때에는 새들의 쉼터인 상여바위가 북쪽에 자리를 잡고, 큰골을 오가는 어선들의 등대 역할을 해주는 돛단여바위는 남쪽에 좌정한다. 이 두 바위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알밤같이 생겼다 해서 율도 또는 밤섬이라고 부른다. 큰골에서 잡은 갯벌낙지는 가로림만 최고의 명품이다. 한때 밤섬은 인천과 구도를 오갔던 여객선이 선착장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명절에는 많은 손님들이 북적거렸고 나루터에는 사람들 행렬이 제법 길었던 곳이다. 한때나마 흥청거렸던 부두는 "과거를 묻지마세요" 유행가 가사처럼 이름만 살아있는 나루터가 됐다. 가로림만의 산뜻한 공기를 마시니 온 몸으로 새로운 기운이 스며든다(최경자, 2015, 「가도가도 꿈길, 태안」, 태안군).
▶[드론 영상] 밤섬나루터, 밤섬
▣ 청산리 나루터
▶ 청산리 석회암 지대
▶ 호리곶 안쪽에 숨어있는 가로림만 속의 작은 만 -이원면 사창리(청산리 나루터 북쪽 곶)와 팔봉면 호리(주벅배 남쪽) 사이에 가장 좁은 해협(약 300m).
▶ 인천과 거래하던 포구
가마봉, 이화산, 이적산. 모두가 주변 산세가 좋은 곳이다. 푸른 산 밑에 위치하고 있어 靑山里로 불리고 있다. 해로 320리, 128km 거리에 있는 인천으로 목선들의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절의 청산나루터 인기는 대단했다. 두툼한 전대를 허리에 차고 귀항하는 상인들의 가슴을 설렁이게 했던 객줏집 주모의 구성진 흥타령에 전대가 슬슬 풀렸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 날 구성진 목소리로 뭇 남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휘어잡았던 주모는 간데 없고 한가로이 낚싯배 몇 척만 나루터를 지키고 있다. 나루터에는 현대식 부교가 예쁘게 설치 되어 있다(최경자, 2015, 위의 책).
▣ 시우치저수지
이적산과 이화산의 경계선이 만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곳이다. 다양한 어종들이 살고 있어 살을 맺던 곳이라 살찐개라 불려지기도 했다. 이원면 사람들이 걸어서 태안을 다니던 시절에는 시우치를 지나 목네미로 다니던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이화산과 이적산에서 벌목한 나무들이 인천으로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나무를 싣고 떠났던 해상들이 덕적도에 젓갈을 싣고 온 부보상들과 물물교류를 하던 상설시장이 있었다. 외상으로 주고 간 후 보리 철엔 보리로, 가을 추수에는 벼로 물건 값을 받아가던 물물교류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원북면 마산 1,2리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을 막은 이후, 북적댔던 어시장이 지금은 강태공들의 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화산과 이적산의 저수지 물속으로 빠져있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다(최경자, 2015, 위의 책).
▶ 시우치저수지 자리에는 예전에 석회석 광산이 있었다.
▣ 갈두천
▶ 소나무숲을 지나 갈두천 하구로
갈두천으로 가는 길은 변성암 지대를 지나는데 식생이 풍부하여 멋진 숲길을 이루고 있다.
▶ 변성암을 관입한 화강암, 하천은 두 암석의 경계를 지난다
갈두천 하류는 쥬라기 흑운모화강암(동쪽)과 선캄브리아기 호상편마암의 경계를 따라 흐른다. 화강암 지역에서는 노출된 바위 덩어리와 토르 등을 볼 수 있으나 서쪽에서는 노출된 바위를 보기 어렵다.
▶ 변성암 지대 수원지
지류는 서북쪽, 즉 변성암 지대에 주로 길게 발달한다. 반면에 동남쪽 화강암 지대의 지류는 거의 발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하천의 수원은 변성암 지대라고 볼 수 있다.
▶ 서풍이 강한 지역
▣ 드론 영상: 청산리나루, 갈두천, 시우치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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