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보령

성주리: 아직도 남아 있는 광산 취락의 자취

Geotopia 2022. 9. 2. 11:46

▣ 드라마틱한 경관 변화를 경험한 성주리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는 20세 후반 탄광 취락의 대명사라 할만 하다. 더욱이 사십여 년의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성장과 쇠퇴를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 탄광 개발 이전의 성주리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백제 때 호국사찰로 시작하여 신라 고려시대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국가 이념을 지탱하는 장소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유명 종족촌락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찌기 지질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광산 개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55년에 비로소 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하여 7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80년대 이후 내리막으로 치달아 90년에는 폐광과 함께 쇠퇴 일로를 겪었다. 지금은 과거의 유산을 활용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면서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 세대에 불과한 짧은 시간 안에 성장과 쇠퇴라는 드라마틱한 역사를 경험한 흔치 않은 지역이다. 가까운 과거임에도 빠르게 옛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자취가 살아 있다는 것은 지리학도로서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다.

▣ 폐쇄적인 지형

바래기재, 뱁재(뱀재), 비듬재, 수리재, 상수리재 등 높은 고개를 넘어야만 보령이나 남포, 청라 등 외부로 나갈 수 있었다. 유일한 평지는 물이 빠져나가는 남쪽뿐인데 남쪽은 협곡이 발달하고 있다.
좁은 계곡이 발달하므로 마을이 들어서기에 불리하다. 먹방과 심원동이 만나는 지점부터 성주4리에 이르는 지역이 전통적인 마을 입지 지역이었다. 이곳에 성주사지가 있었고 전통 마을들이 자리를 잡았다. 탄광이 개발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마을인 성주8리는 퇴적사면에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 단구상의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다. 물난리가 난 적은 없을까?

▣ 석탄산업과 함께한 역사

1955년 개발된 후 1994년 마지막 폐광. 탄광 수 200여 개. 1975년 최고 흑자 기록.
보령탄광은 1955년 처음으로 민영 탄광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1967년 대한석탄공사가 인수하면서 급 성장하였다. 1960년대 당시 최대 61개 까지 탄광이 개발되었으나 품질이 떨어지는 한계 때문에 70년대 초반에 급속하게 석탄 산업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1973년 국제적 석유파통으로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어 1975년에는 보령 석탄 산업이 사상 최대의 수익을 냈다. 1977년에는 종사자 수만 1,500여 명을 넘어서면서 사택을 건설하고 복지 관련 시설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가정용 연료로 석유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석탄 산업은 전반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마침내 정부는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바로 이듬해부터 보령의 석탄 산업도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여 1991년에 대부분 폐광되었다. 1994년 심원탄광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 행정구역 변화와 마을들

조선시대 남포면 북면-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1914) 보령군 미산면-석탄산업이 발달하면서 1967년 성주1리, 2리, 3리로 분리-성주출장소(1970) 설치하여 개화리와 성주리 관할. 성주4리 분할(1975), 성주5리 분할(1980). 성주면 독립(1986)년. 성주 6,7,8리 분리(1987). 보령시 성주면(1995)
1리: 심원동, 2리: 백운골, 수원골, 3리: 먹방, 4리: 장군리, 5리: 원래 성주리 중심지, 성주, 탑동, 벌뜸, 속뜸, 양지뜸, 6리: 성주천 오른쪽 삼거리(탄광 전성기 중심지), 오카브, 바래기뜰, 7리: 6리 남쪽 창터골, 중뜸, 8리: 6,7리 건너편 신사택

 

▣ 석탄 생산량의 변화와 인구 변화

보령지역 석탄 생산량의 변화(단위 톤)  *자료: 강홍준, 2002, 충남 성주지역의 광산 취락 연구, 공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성주지역 탄광 종사자 수 변화  *자료: 강홍준(2002)
1975년 성주8리(신사택)   *국토지리정보원(1:25,000)
성주8리(신사택)에는 지금도 옛 광산취락의 자취가 남아 있다. 구사택으로 불리는 마을은 하류쪽 개화리에 있다.

 

성주1리(심원동) 가옥 분포 변화(1970-2000) *자료: 강홍준(2002)
보령시 인구 변화  *자료: 충남지리지(2020)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던 미산면(1986년 성주면이 미산면에서 분리 독립함)의 1977년 인구는 15,780명으로 보령군 내 오일한 읍이었던 웅천읍(16,424명)에 근접하는 숫자였다. 이후로도 계속 증가하여 1983년에는 17,208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이는 그해 웅천읍 인구(15,031)를 넘어선 숫자로 석탄 산업의 영향으로 인구가 계속 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보령군 전체 인구가 1982년에 정점에 달했고 1983년에는 감소 일로에 들어섰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 석탄산업의 영향력을 잘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