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의 지리환경/구석구석 이것저것

남관리(南館里)

Geotopia 2021. 2. 26. 02:16

천안시 풍세면 남관리 공사(貢士)마을 입구에 정려각이 있다. 충신, 열녀 정려 4위가 함께 있는데 창원유씨 유언겸(1496~1558)  일가의 정려각이다. 유언겸 효자 정려는 중종 21년(1526년)에 내려졌다. 비문에 따르면 유언겸은 효자 정려와 함께 관직(사직서 참봉/종9품)을 제수받았다고 한다. 

정려는 종족촌락의 주요 경관 요소이다. 사당이나 가묘 등은 종족촌락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관요소지만 정려는 나라에서 내리는 것이어서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남관리 정려각은 눈길을 끈다.

 

유언겸, 유경인, 유명립 효자 정려, 칠비 열녀 정려가 함께 봉안되어 있는 정려각

 

중종 때 내려진 정려가 어떤 이유로 훼손되었다가 1798년(정조22년)에 중수되었다. 중수기는 조병덕(趙秉悳)이라는 인물이 지었다고 한다. 정려 앞에 있는 비문은 중수기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유언겸의 효행에 대한 내용이다.

 

유언겸 효자 정려 중수기. 1798년(정조22년)에 중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홍직필(洪直弼, 1776년(영조52)~1852년(철종3))이 묘갈명을 지었고, 그의 문인이었던 조병덕(趙秉悳, 1800년(정조24)~1870년(고종7))이 이를 근거로 정려비문을 적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중수비가 세워졌다고 하는 1798년은 조병덕이 태어나기 전이며, 홍직필은 약관 22세였다. 갑자로 연대를 기록했던 관례로 미루어 보면 중수비가 세워진 연대는 비문에 기록된 1798년 보다 60년 뒤인 1858년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비문에는 조선 후기 성리학을 휩쓸었던 호락논쟁의 단초가 보인다. 즉, 유언겸의 효행에 호랑이가 큰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人物性은 같다'는 낙론 학자들의 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우화 형식이다. 묘갈을 지은 홍직필은 당시 호론의 거두였던 남당 한원진과 철학적 입장을 달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병덕은 홍직필의 문인이었다. 내포(內浦)와는 달리 서울과 가까웠던 천안은 서울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낙론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人物性同論'으로 한원진과 논쟁하면서 호락논쟁을 촉발한 외암 이간이 이곳과 가까운 아산 사람이다.

 

 

유언겸 효자 정려는 연대가 '중종11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 정려가 후대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왕의 묘호는 사후에 지어지므로 재위 당시에는 쓸 수가 없다. 정상적인 경우는 중국(당시에는 명나라 정덕(正德)) 연호를 쓴다. 유경인 정려와 유명립 정려 역시 숙종과 영종이라는 묘호를 쓰고 있어서 모두 후대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경인(유언겸의 아들) 효자 정려. 명정(命旌) 연대가 숙종4년(1678년)으로 연대로 볼 때 사후에 하사 받은 것이다.

 

유명립(유경인 아들) 효자 정려. 명정 연대가 영종(英宗/英祖)3년(1727년)으로 역시 유명립 사후에 하사 받았다. 또한 정려가 세워진 시기는 정조~고종 연간임을 알 수 있다. 영종이 영조(英祖)로 격상된 것은 고종29년(1889년)때이다.

 

 

[스크랩] 조(祖)와 종(宗)의 의미 ~영종이 영조로 바뀐 까닭~

전에 소드에 올렸던 건데요 이번에 댓글에서 이 얘기가 나와서 오래된 글이라 못 보신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다시 올려봐요 제가 읽은 문서에서 발췌한거고요 출처는 아래 적혀 있어

blog.daum.net

 

'남관(南館)'이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에 도독부를 두고 이곳에 남관을 두어 군사를 주둔시켜서 지어졌다고 한다. 천안의 태조산은 태조 왕건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며, '五龍爭珠'라고 일컬어지는 천안의 지세 역시 태조 왕건과 관련하여 탄생하였다. 남관리도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을 유래를 설명한 비문

 

마을 안에 마을의 유래를 설명한 비문이 서있다. 선비가 많이 나서 '공사(貢士)'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내용과 매년 7월에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기리는 마을제를 지낸다는 내용, 그리고 유언겸 일가의 정려에 대한 내용이다. 대개 마을제는 민간 신앙과 관련이 있어서 유서깊은 사대부 종족촌락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마을제와 성리학이 공존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마을 앞에 있는 3백년 된 소나무 동산

 

소나무 동산 옆의 연못

 

3백년 된 소나무가 자라는 동산이 마을 앞에 있다. 주변이 모두 논으로 범람원의 배후습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산 옆에 있는 작은 연못은 이곳이 습지였음을 보여준다. 소나무 동산은 마을을 가려주는 비보(裨補) 숲으로 만들어졌음직한 모양이지만 특별히 비보와 관련된 전설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대가 상대적으로 높아서 개간과정에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난산(卵山), 또는 알미산이라 하는데 큰 홍수가 나서 취암산에서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 지명유래 > 풍세면 > 읍면동 > ]

천안군 소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공사동, 난산리, 소동면의 남관리, 군남면의 공사동을 병합하여 남관리라 하고 풍세면에 편입되었다. 남관(南館) :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에

www.cheonan.go.kr

 

 

 

 

유언겸 - 디지털천안문화대전

[정의]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겸지(謙之)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정랑을 지낸 유백순(兪伯純)이고,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유보정(兪輔鼎), 어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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