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의 지리환경/답사기

세계사 속의 아산만: 청일전쟁

Geotopia 2019. 10. 26. 20:45

▣ 1894의 세계사적 의미


  "1894"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났으며 갑오개혁은 시행되었다. 두 사건은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권력의 부패와 민중의 저항, 그리고 무능한 권력은 외세의 침략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갑오개혁은 신분제도 철폐 등 근대화로 가기 위한 긍정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 과정이었으며 결국 그 과정을 거쳐 일제 강점기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894년 외세의 개입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청일전쟁은 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사와 한국사를 연결하는 문제는 역사 시험의 단골 메뉴였는데 언제나 어려웠다. 맥락을 모른 채 연대만 외우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서로 연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사가 변화해 온 과정을 보면 인류는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시기적으로 발전 단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역사가 진행되어온 과정은 비슷한 측면이 많다.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출발하여 고대, 중세를 거쳐 산업혁명과 현대사회에 이르는 과정은 큰 틀에서 전세계적인 공통점이 있다. 영향을 미치는 공간적 범위의 차이와 시차가 있었지만 인류는 모종의 영향력을 주고 받았음이 분명하다.


▣ 아산·천안 지역사와 한국사, 그리고 세계사

 

  "청일전쟁",

  동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했던 중국을 종이 호랑이로 전락시키고 일본을 일약 세계 무대로 부상시킨 인류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청일전쟁이 조선의 갑오농민혁명으로 촉발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두 나라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갑오농민혁명은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만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청일전쟁이 조선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아산만,

  청일전쟁의 서막을 알린 戰場이 바로 아산만 일대였다.


▣ 淸軍의 동향: 아산만 상륙 후 직산·공주으로 이동


  1894(갑오)년 4월, 고부군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혁명이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산해가자 위기를 느낀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6월6일 2,46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아산 백석포에 상륙시켰다. 백석포는 수심이 얕아서 큰 배가 들어올 수 없었으므로 청군은 아산만 복판에 있는 돌섬(영옹암)에 배를 정박하고 둔포 등에서 징발한 작은 배를 띄워 청군을 나눠 태우고 백석포로 들어왔다.


[영옹암과 풍도 *자료「대동여지도」]


  청군이 아산만으로 들어온 이유는 농민군의 서울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백석포에 상륙한 청군은 둘로 나누어 일부는 공주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직산으로 이동하여 월봉산(성환읍 성월리)을 본진으로 삼아 성환 일대에 진영을 구축하였다. 청군이 주둔한 곳은 삼남대로가 지나는 곳으로 호남에서 북상하는 농민군 주력부대의 예상 이동 경로였으며 동시에 일본군의 남하 예상 경로이기도 했다.


▣ 일본軍의 동향: 제물포 상륙 후 한성 진입


  청나라는 텐진조약에 의거 파병 사실을 일본에 알렸다. 일본은 이미 조선 파병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출병하여 인천으로 들어왔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의 출병에 항의하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6월8일 제물포에 4,5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하지만  6월11일 전주성에서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농민군이 해산했고 이에 조선 조정은 양국에 철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을 기회로 생각하고 오히려 추가 병력을 파견하여 6월22일 조선에 도착하였다. 7월19일 일본은 정예 군함으로 투입하여 연합 함대를 조직, 전쟁 도발을 준비하는 한편, 7월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하였다.


▣ 풍도 해전: 청일전쟁의 시작


  풍도(風島)는 아산만 외곽 서해 상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속한다. 한반도 남쪽에서 한성으로 가는 뱃길이 지나는 경로상에 있어서 풍도는 수로상의 요충지였다. 신미양요(1871)때도 미군이 풍도 앞에 함대를 정박시키고 작은 배로 강화도 일대를 정탐하였다. 청나라는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지원하기 위해 증원군 및 보급품을 보냈는데 풍도 앞바다는 이들 함선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청군의 보급 통로는 아산만 뿐이었으므로 만약 아산만을 봉쇄당하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이에 청군은 아산에서 철군하거나, 평양으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함대를 몰고 일본군이 있는 인천을 공격하는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아산만을 봉쇄한 후 한성에서 육로로 남하하여 아산의 청군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양측의 전략은 일본의 선제 공격으로 일본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지 이틀이 지난 후인 7월25일 아산만을 출발한 청나라 군함(済遠, 広乙)은 보급함(高陞/영국 상선)과 그 호위함(操江)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 순양함 2척(요시노, 나니와)이 청나라 군함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청나라 군함 済遠은 도주하였고 広乙은 해안에 피신하여 병사를 하선시킨 후 자폭하였으며 高陞은 격침되었다. 操江은 나포되어 1965년 퇴역할 때까지 일본군이 사용하였다.

  풍도해전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아산의 청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반면 일군은 원래 계획대로 고립된 청군을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선을 잡아 크게 사기가 고무되었다.


[격침되는 청국 군함 '高陞']


▣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


  청군은 성환 월봉산 일대에 본진을 치고 북쪽으로 안성천까지 나아가 망루(望軍臺)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남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군의 망루는 대략 옛 안성교 부근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망루를 구축한 이유는 삼남대로가 통과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다리가 있었는데 '아교(牙橋)', 또는 '애교'라고 하였다.

  「동여도」에는 군물진(軍勿津)이라는 포구가 안성천 하안에 표기되어 있는데 안성천과 성환천이 합류하는 지점 부근이다. 이 일대는 안성천의 가항종점이었다. 가항종점의 바로 위쪽으로 대로가 지났고 그곳에 아교다리가 있었다. 곡교천의 가항종점 바로 위쪽에 고분다리(曲橋)가 있었던 것과 같은 이유이다. 즉, 감조구간이 끝나는 부분은 하천의 폭이 좁아지는 곳이기 때문에 다리를 놓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청구도」의 군물진]


  판소리 「춘향가」중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는 대목에서 삼남로 상의 마을들이 나오는데 애교다리를 비롯한 청일전쟁의 현장을 지난다.


  지지대 올라서 참나무쟁이를 얼른 지나 교구정 돌아 들어 팔달문을 내닫는다. 상류천, 하류천, 대황교, 진겨골, 떡전거리 중화하고 중밋오뫼, 진위, 새뚝거리, 희도원, 참나무쟁이, 감주거리, 칠원, 소새비들, 상유천, 하류천, 애교다리를 지나 가룡, 홍경이, 성환…           (판소리 「춘향가」중 에서)


[1872 지방지도에 표기된 아교(牙橋)]


  한편 한성에서 남하한 일본군은 안성천 북쪽 소사벌(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일대)에 진을 치고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의 일촉즉발 위기상황에서 나온 말이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말이라고 한다. 지금은 많이 쓰지 않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이 일대에서 꽤 회자되던 말이었던 모양이다.


[소사들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일본군]


▣ 망근다리, 몰왜보, 청망이들

 

  1894년 7월 27일 새벽 마침내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아교다리 건너편에 매복하고 있던 청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혼란에 빠져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됐다. 당시에는 모내기철에 하천에 보(洑)를 막아 농업용수로 활용했는데 애교다리 부근에는 군두보라는 보가 있었다고 한다. 마쓰자카대위를 비롯한 일본군 선봉대가 하천에 뛰어들었다가 군두보 깊은 물에 빠져 몰살당하였다. 이후 군두보는 일본군이 몰살당했다는 뜻으로 ‘몰왜보(沒倭洑)’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전투 초반은 청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청군이 이겼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황은 점차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병력 및 물자 보충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청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져 있었다. 청군의 방어선을 뚫고 안성천을 건넌 일본군은 안성천 남쪽 넓은 들판에서 청군을 괴멸시켰다. 패전한 청군의 주력부대는 공주로 후퇴하여 후에 청주로 우회하여 평양으로 이동하였고 본진에 합류하지 못한 자는 아산만 일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군을 완전히 제압한 후 8월1일에서야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일대에는 전쟁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지명이 만들어졌다. 청군의 망루가 있던 곳의 다리는 '망근다리'로 불렸다. '望軍', 또는 '亡軍'의 의미로 주민들이 붙였다 한다. 아교 자리에 1957년에 안성교가 준공되었는데 이 다리도 옛 이름을 이어받아 '망근다리'로 불리웠다. 또한 청군이 크게 패전한 성환읍 안궁리 일대의 너른 들판은 지금도 '청망이들'이라 하는데 이는 '淸亡'의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개월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지명들이 생긴 것을 보면 지역민들의 삶에 전쟁이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일전쟁 관련 장소 *자료: 지형도(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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