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수도는 아니었다고 봐야한다. 즉, 천도할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듯 하다. 왜냐하면 고대 도시는 방어 중심이었는데 이곳은 왕국 외곽에 성벽이 없다. 대동여지도에도 城이 그려져 있지 않다.
왜 익산이었을까?
-부여와 지리적으로 가깝다. 수로교통으로는 더욱 접근성이 좋다.
-금강과 만경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수로교통이 편리하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신라와 연결하는 위치라는 견해(이병호)도 있지만 이곳에서 신라로 가려면 노령산지와 소백산지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신라와의 연결에 좋은 위치는 아니다. 오히려 백제와 신라가 자주 부딪혔던 곳은 추풍령-옥천-대전-논산-부여 라인이었다.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부여창(위덕왕)이 승리를 했지만 성왕이 격려차 이동 중 매복중이던 신라군에게 삼년산성(보은) 인근에서 사로잡혀 살해당한 역사가 있다. 이 통로가 바로 백제와 신라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통로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익산은 오히려 신라와의 접근성이 떨어져서 방어에 유리한 위치였다고 볼 수도 있다.
-帝釋寺: 帝釋面은 조선시대까지 쓰이던 지명으로 1914년에 없어졌다. 宮坪은 지금도 제석사지 일대를 부르는 이름이다.
-마동설화를 지질구조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금과 화강암이라는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광물자원을 배경으로 한다. 무왕이 익산에 궁을 세우고 이 지역을 중요시했던 이유 중에 화강암과 금이 풍부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무왕의 개인적 연고지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 귀족세력들의 발호를 억누르기 위해 본거지를 움직이고자 하는 시도를 했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선대의 혜왕과 법왕은 재위 기간이 각각 1년에 지나지 않았다. 극도로 정치가 불안했던 이유는 귀족의 발호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조의 천도계획이나 성왕의 사비천도 역시 비슷한 원인으로 단행된 정책이었다.
-백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장치였다. 왕궁 안에 대규모의 공방이 있었다(이병호, 2019). 이곳에서는 사치품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규모로 볼 때 단지 왕실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 이상으로 제품들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왕궁리
중국 도성 조성 원칙 적용. 주례고공기. 문 3개, 2:1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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