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금강 하류

금강변의 포구들

Geotopia 2018. 11. 19. 20:56

▣ 감조권에 발달한 河港

 

  부여에서 하구에 이르는 금강의 하류 구간에는 많은 河港이 발달했었다. 이 지역은 금강의 감조권으로 포구가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조권(感潮圈)은 만조때 배가 강의 흐름을 쉽게 거스를 수 있는 구간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많은 포구들이 발달했었다.

  감조권 중에서도 포구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자연적 조건으로 수심이 깊어야 하며, 인문적 조건으로 주변에 취락이 많이 발달해야 한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하항

 

 

  금강 감조권의 주요 포구들을 대동여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고성진(부여읍 군수리), 대왕포(부여읍 중정리) 구랑포(부여 장암면 석동리), 장암진(부여 장암면 하황리), 점다진(부여 세도면 반조원리), 저포(논산 성동면 우곤리), 낭청진(부여 세도면 가회리), 증산포(논산 강경), 청포진(부여 세도면 청포리), 남당진(부여 임천면 칠산리), 상지포(부여 양화면 상촌리), 피포(익산 웅포면), 웅포(익산 웅포면 웅포리), 후포(서천 한산면 용산리), 죽산진(서천 화양면 죽산리), 와포(서천 화양면 옥포리), 나리포(군산 나포면 나포리), 아포(서천 화양면 망월리), 서지포(군산 나포면 서포리), 용당진(서천 장항) 등이다.

 

 

[<대동여지도>의 금강 하류 부분]

 

  *일제 강점기 지형도에 표시된 하항

 

  구교리(구드래), 백강(부산 아래), 규암, 장암, 장하리-두암도(斗巖渡), 봉두정리(석성 파진산), 불암리(논산천 하구), 가회리(세도), 다근리진(세도 청포리), 입포진, 웅포리-신성리, 나포리-용산리, 서포리-와초리(瓦草), 창선리·용당(장항)-용당도(군산 신흥동),

 

▣ 본류와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 수심과 인구

 

 

  이들 포구들은 대개 하천의 공격사면이나 지류와 본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발달한다. 특히 지류와 본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발달한 포구들이 많은데 이는 수심을 확보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지류 연안에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가 분포했기 때문이다. 특히 내륙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발달하여 인구 및 물자의 이동이 편리한 곳에 큰 포구가 발달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강경이다.

 

 

[금강하류의 포구 *원도: Google earth]

 

규암: 감조구간 종점에 발달한 포구

 

  규암은 감조구간의 종점 부근에 있는 포구였다. 인근에는 구드레나루, 왕지진 등이 있었다. 부여가 백제의 수도로 번성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 감조구간의 종점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한 이후로는 그 위치적 장점이 크게 발휘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가 되면 강경이 상업 중심지로 크게 번성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쇠락을 거듭해왔다.

  그런데 왜 강경이었을까, 부여가 아니고? 부여보다 20km나 하류에 있는 강경이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배후지의 규모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강경의 배후지는 은진, 연산, 노성 등 오늘날의 논산시 지역을 포괄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산, 진잠, 회덕 등의 내륙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반면에 부여의 배후지는 정산현 정도에 불과했다. 넓게 잡아도 청양현 정도였는데 청양은 내포권과 겹치는 교역권이었다. 인접한 석성, 임천 등은 배가 닿았기 때문에 부여를 거칠 필요가 없었고 홍산현은 임천, 또는 서천과 더 가깝다.

  규암은 부소산 아래를 지나온 백마강이 급회전을 하는 구간이어서 하안이 침식을 받아 급사면을 이룬다. 따라서 수심이 깊어 포구가 발달하기에 유리하다. 부여에서 홍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규암 나루를 이용하여 백마강을 건너야 했다. 규암 나루는 일제 강점기에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다. 규암에서 홍산까지 연결된 너른 평야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으로 적출하기에 가장 적당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강경: 자연적, 인문적 조건을 갖춘 금강 최대의 河港

 

강경은 금강의 대표적인 하항으로 조선후기 충청도의 대표적인 상업 중심지였다. 금강 하류의 감조 구간에 위치하여 바다와 쉽게 연결되었으며, 금강의 공격사면에 해당하여 옥녀봉, 황산 등 암반이 노출된 하안이 이어져서 수심이 깊었다. 뿐만 아니라 논산천, 강경천 등 규모가 큰 지류들이 유입하여 수심을 유지하기 유리하고 배후에 넓은 배후지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과 함께 강경은 수운과 육상교통이 만나는 적환지였다. 때문에 해산물과 육지 산물들이 만나 교류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곡의 수합 및 수송 등 교통로를 이용한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금강의 감조권은 하구로부터 약70km 지점(오늘날의 부여)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 일대의 하안에는 수많은 하항들이 발달했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강경이 특히 상업 중심지로 발달하게 된 이유는 당시 충청도의 주요 내륙 중심지였던 공주와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를 잇는 삼남로가 지났기 때문이다. , 수상교통과 주요 육상교통이 만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부 내륙 지방의 농산물, 임산물과 서해의 해산물, 그리고 선박을 이용해 수송해온 타 지역의 생산물들이 결합하였다.

조선 후기인 1890년대부터 호남선이 개통(1914년)된 191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당시에는 충청남도와 전라도의 22여 개 군, 그리고 경기도 남부에 이르는 상권을 거느려 점포수가 900여 개, 시장에 모이는 인원이 평균 7천 여 명에 이르렀다. 상주인구만 3만 여 명에 상업 관련 유동 인구가 더해져서 10만 여 명이 주민이 생활하고 있었다.

 

* 교통수단의 변동과 강경의 성쇠

 

 

경부선의 부설로 대전 등 중부 내륙 지역이 강경의 상권에서 벗어났고 결정적으로 호남선의 부설과 함께 강경은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전북 지역이 강경의 상권에서 이탈하였고 군산이 대일 무역항으로 급성장한 것도 강경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강경은 양곡 수탈과 해산물 집산지로서 상업 중심지의 면모를 유지하였다.

해방 이후에 강경은 급격한 쇠퇴 일로에 들어섰다. 양곡 수탈 거점 기능을 상실하고 한국전쟁으로 논산훈련소가 생기면서 중심 이동이 가속화되었다. 수산물 집산지 기능은 젓갈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육상교통이 논산을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행정기관이 논산으로 이전함으로써 강경의 쇠퇴가 더욱 가속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강경 상권의 변화 *자료: 전국지리교사모임(민석규)]

 

  * 강경 젓갈

 

  강경은 수산물을 수입하고 이를 내륙 지역에 분배하기에 유리한 위치였으므로 수산물 가공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전근대 시대 수산물 가공은 염장이 중심이었다. 특히 젓갈은 내륙 지역에 해산물을 공급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많은 염장류들이 강경에서 판매되어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근대 교통의 발달과 함께 상업 중심지로서 강경의 중심성이 크게 떨어졌다. 과거의 영화는 옛 건물 등으로 조금씩 남아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과거의 영화를 여전히 잘 보여주는 유산이 바로 젓갈이다. 광천, 곰소 등 한 때 번성했던 포구는 같은 이유로 젓갈이 유명하다.

 

임천-남당진, 한산-후포: 포구와 내륙 중심지의 결합

 

  그런데 한산의 중심지는 금강으로부터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포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산까지는 직접 배가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입지는 전통시대에 전형적인 입지 형태였다. 특히 해안에서는 이런 형태의 입지가 발달했었다. 예를 들면 동래는 부산포를 교역항으로 거느렸으며 영덕은 강구항을 외항으로 하여 발달하였다. 이런 조합들은 해안지역에서 흔히 발달했었는데 해거(海居)를 기피했던 입지관과 관련이 깊다. 금강 하구 일대도 해안과 조건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한산 뿐 아니라 '임천-남당진' 역시 거의 유사한 형태의 조합이다.

 

 

 

한산 모시: 포구를 배경으로 발달한 산업

 

  한산, 임천 일대는 예로부터 모시가 유명한 지역이다. 전통시대의 농업 특산물은 대개 자연적 조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남북으로 기후차가 크게 나타나는 우리나라는 특히 기후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모시는 다년생 식물로 뿌리가 얼어죽지 않아야 하므로 겨울 기온이 낮으면 재배가 불가능하다. 보통 지하 온도가 -3℃~-5℃ 정도가 되면 뿌리가 대부분 얼어 죽는다. 하지만 지하 온도가 그 정도가 되려면 지표 온도는 -10℃ 정도가 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시 재배가 불가능한 지역은 우리나라에서는 개마고원 일대 등 평안북도, 함경북도 일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장 적당한 기후는 연평균 10.5℃~12℃ 정도이며 다습한 기후로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서천군의 평균기온은 약 12.6℃로 최적의 조건에 비해 약간 기온이 높은 편이다. 그렇다면 한산 모시가 유명해진 것은 기후 조건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기온 뿐만 아니라 다른 기후 요소도 영향을 미치고, 토질 등 다른 자연적 조건들도 모시의 생육에 영향을 미치므로 모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모시는 생필품이라기 보다는 고급 소비재에 가깝다. 여름철 옷감의 소재로 서민들은 보통 삼베옷을 많이 입었고 색깔이 곱고 손이 많이 가는 모시는 주로 부유층들이 소비했던 옷감이다. 따라서 한산에서 모시가 많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그 생산물들이 자급자족용 생필품이 아니라 교역을 위한 상품이었다는 뜻이다. 상품 경제가 번성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좋은 품질의 상품을 만들어도 판로가 없어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산은 금강 하구에 가까워서 하항이 발달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실제로 한산군 주변에는 죽산진, 오포, 상지포 등 포구들이 발달하여 교역이 활발했었다.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모시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산은 소곡주가 유명한데 소곡주가 유명해진 것 역시도 번성한 상업 기능과 함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금강철새조망대에서 바라본 옥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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