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금강 하류

백마강변 마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Geotopia 2018. 11. 13. 00:21

▣ 자연지리적 배경: 퇴적사면으로 유입하는 지류 연안의 범람원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는 백마강의 퇴적사면에 위치한 마을이다. 서북서쪽에서 내려오던 백마강이 마을 건너편의 용머리산(석성면 현내리)을 만나서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빠져 나간다. 백마강이 직각으로 꺾이는 부분의 안쪽에 이 마을이 있다. 이런 부분은 하천의 유속이 떨어지기 때문에 보통 퇴적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곳은 상황천이라는 작은 지류가 유입하는 곳이기도 하여 일반적인 퇴적 지형 형성 조건과는 약간 다른 지형 구조를 하고 있다. 하천의 퇴적 사면에 형성되는 퇴적 지형을 포인트바(point bar)라고 하는데 이곳은 지류와 본류가 만나는 위치여서 전형적인 포인트바가 발달하기는 어렵다.

  운반 물질이 증가하는 홍수시에 퇴적사면에 물질이 퇴적되는데 이곳은 지류가 유입하므로 지류를 따라 백마강 물이 역류할 가능성이 크다. 물이 역류하여 범람하면 하천의 양안에 물질이 퇴적되어 범람원이 발달한다. 그러므로 이곳은 상류쪽으로는 포인트바가 발달하고 지류가 백마강으로 유입하는 부분에는 범람원이 발달하여 두 지형이 결합된 지형이 발달하였다.



[장하리 위성영상 *Google earth]


▣ 저습지: 촌락 입지에 불리한 조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촌락은 배산임수형의 산록부를 지향하였다. 비교적 넓은 평지가 발달하는 하천 주변보다는 지류 연안의 산록부를 더 좋아했던 이유는 홍수 때문이었다. 전통시대에 治水는 농업의 성패를 넘어서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물을 얻는 것도 중요하고 물을 피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중에서도 물을 피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했다. 우선 '물 피하기'는 '물 얻기'에 비해 기술적으로 훨씬 어렵다. 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수로를 만들고 우물을 파는 현실적 방법이 있었지만 홍수를 피하기 위해서는 훨씬 고도의 토목 기술이 필요하였다. 특히 큰 강 하류 연안에서 홍수를 막는 것은 과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름철에 거의 매년 빠짐없이 발생하는 집중호우는 지금도 하천 주변에 큰 홍수를 일으키곤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집중호우가 심해서 지금도 자주 홍수 피해를 입는다. 그러니 과거에는 어땠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 사람의 힘으로 홍수를 다스리기가 어려웠으므로 20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하천 하류 범람원들이 미 개간지로 남아 있었다. 큰 하천일수록 정도가 심했으므로 큰 하천 연안, 특히 하류 연안은 사람이 거주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중상류의 계곡 주변은 물을 얻기 쉬울 뿐만 아니라 계곡 연변에서 비교적 넓은 경지도 얻을 수 있었으므로 하류 연안에 비해 훨씬 유리한 입지였다. 유서 깊은 종족촌락들은 대부분 중상류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장하리는 금강 하류의 연안에 인접한 마을이다. 전통적 입지로 볼 때 마을이 자리잡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고 볼 수있다.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백마강의 범람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며,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홍수를 막기 위해 자연과 싸워왔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면서 번성한 마을을 이룰 수 있었다. 


▣ 마을 만들기: 범람을 막고 농토를 확보하는 과정


  이 일대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의 증거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이 이 마을에 있다. 그런데 과거의 절터였던 이곳은 금강과의 거리가 1km에 불과하다. 저습지 개간이 어려웠던 조건을 고려하면 홍수를 피하기 어려운 위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해발 20m 안팎의 고립 구릉으로 금강 수면과의 고도차가 10여m에 달하여 홍수로부터 안전한 위치이다. 따라서 이와 비슷한 위치, 즉 강과 거리가 떨어진 산기슭은 오래전부터 거주가 가능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번성한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경지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마을 주변의 저지대는 홍수의 위협이 커서 경지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위치였다. 집은 산기슭에 짓는다고 해도 경제적 기반인 경지를 확보할 수 없다면 마을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는 하였으나 충분한 경제적 토대인 토지를 확보하기 어려워서 번성한 마을이 성립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915지형도 *조선총독부]


  일제 강점기 초기(1915)까지 지금의 검신들(걸고 기름진 들이라는 의미라고 함)은 상당 부분 개간이 되지 않은 저습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방이 축조되기 전으로 자연제방은 荒地 상태로 방치되거나 활엽수림이었다. 논으로 개간된 곳도 있었으나 제방이 축조되기 전이었으므로 홍수 피해를 자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방을 보강하고 안쪽의 경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20세기 초 강석기라는 인물이 금강변 자연제방에 15,700평의 포풀러 숲을 조성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姜錫箕(1862~1931)는 일찌기 대종교를 받아들이고 개화사상을 접한 인물로 후에 독립유공자(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로 지정된 인물이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추모비 내용에 의하면 생전에 대종교 '종문도사교성사(倧門都司敎聖 師)'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에 세워진 추모비의 내용을 요약하여 강석기의 일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서문호 임하공의 맏아들. 어릴적부터 영특하여 천재라 하였다. 일곱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고, 아홉에 홍산군 백일장시회에 나가 장원. 한양 박동 김정승집에 유학. 광무4년에 경흥감리로 부임. 이후 성진, 길주 감리 역임. [*감리: 대한제국 때 통상 사무를 맡아보던 감리서의 으뜸 벼슬] 1906년 홍성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한성공업전습소 설립. 수입한 포플러 금강 연변에 재배하도록 권장. 이후 낙향하여 공주, 강경에 농공은행 설립. 80여개 노동학교 개설. 1909년 대종교 입교. 1913년 중국 화룡현으로 이전 포교 활동. 1919년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고 복역 중 교도들의 구명 운동으로 해외거주 금지령을 받고 국내로 강제 송환됨. 1920년 대종교도사교위리(최고위직)가 되어 구한말 고위 관료 출신들을 대거 입교 시킴. 1922년 차남 철구(대한군정서 총재비서장)의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5가족이 체포됨. 이듬해에 방면. 1931년 사망(조천). 종리문답, 도화신서, 천산도설, 애오가시조집, 인지록 등의 글을 남김.


[마을 입구에 서있는 강석기 추모비]



  일제강점기 이후 진주강씨 종중(虎網契)을 중심으로 배후습지 개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검신들의 대부분 토지가 진주강씨 소유일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의 토지는 '강OO외 14인'으로 등기되어 있다. 이는 진주강씨 종중 땅으로 일반적으로 종족촌락의 종중 땅은 등기부상의 명의가 종중으로 되어 있는 것과 구별이 된다. 공동 노동으로 토지를 확보하고 이를 공동 소유했음을 알 수 있다.


[토지 소유주별 경지 분포도(1999년 경지정리 직후) *전종한, 2005]

 

▣ 진주강씨 종족촌락: 民村


  현재 장하리는 진주강씨 종족촌락이다. 진주강씨가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시기는 대략 17세기 중반경으로 추정된다. 최초 입향은 기존 거주민과 결혼을 하면서 이루어졌는데 17세기 중반 이 마을(후포리)에 거주하던 신창맹씨와 혼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후포리(後浦, 뒷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에 포구였다. 강쪽으로 돌출한 구릉지여서 포구가 발달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금강 자연제방 뒤쪽의 범람원을 경지화하면서 마을을 장악하였다. 지금도 마을에 있는 농경지는 대부분 진주강씨가 소유하고 있다.


[장하리 검신들과 후포(앞의 작은 동산), 그리고 산기슭에 자리잡은 장정마을]


  그런데 장하리는 마을을 이룬 주체가 평민인 民村이다. 일반적으로 종족촌락은 형성의 주체가 양반계급(班村)인 것에 비춰보면 이례적인 예이다. 장하리의 민촌적 성격은 여러가지로 확인이 된다. 조선시대 사족(士族) 촌락의 일반적인 입지였던 溪居와는 거리가 먼 저습지라는 점, 촌락 내에 뚜렷한 유교적 경관이 거의 없다는 점, 최초의 족보 편찬이 20세기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점, 근대 시기까지 마을 내에 무당집이 여섯 개 정도 있었다는 점, 이웃 마을인 상황리·하황리의 풍양조씨家門과는 신분상의 차이로 통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반면, 최초 입향 때 혼인을 했던 신창맹씨는 포구에서 상업과 관련된 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등이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는 풍양조씨 마을과 생사를 다투는 갈등이 있었는데 대개 전쟁 당시의 갈등은 전통적 신분격차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되고 있다(박찬승, 2000). 조선총독부 자료(朝鮮에는 장하리에 대하여 '宗統을 계승한 奉祀孫은 학문 및 지식이 부족하고 특기할 만한 명망이 없으며 재산도 단지 궁핍하지 않을 정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민촌(民村) 경관


  장하리에는 천진전(天眞殿)이라는 대종교 사당이 있다. 단군 영정을 봉안한 신전으로 매년 개천절에 天祭를 올린다. 장하리 천진전은 20세기 초 저습지 개간을 선도했던 인물인 강석기가 대종교 성직자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곳에 봉안된 단군영정은 강석기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것으로 장남이 물려받아 비밀리에 보관해 오다가 해방후인 1949년 천진전을 건립해 봉안하였다. 그 이후로 매년 천제를 올리고 있다. 단군영정 원본은 현재 정림사지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천진전]


[천진전에서 바라본 장하리 장정마을]



 [장하리 사지와 삼층석탑]


  일반적으로 반촌에서는 유교 이외의 경관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불교 경관은 잘 나타나지 않는데 抑佛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의식적으로 불교를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속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종교는 불교나 무속과는 다르지만 탄생한 시기가 1909년으로 일제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던 때이다. 따라서 역사적 연원이 오래된 종족촌락에서는 관련 경관이 나타나기 어렵다.

 

▣ 주변 마을과의 갈등과 협력


  장하리 주민들의 통혼은 대부분 가까운 부여군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접한 마을인 상황리, 하황리와는 통혼관계가 거의 없다. 역시 인접한 마을인 북고리와도 18세기까지 통혼이 이루어진 경우가 전혀 없다. 이는 풍양조씨(상황리, 하황리), 남평문씨(북고리)와의 신분적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북고리 남평문씨와 통혼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상호 인척관계가 긴밀해졌다. 그러나 풍양조씨와는 이후로도 통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하리 진주강씨 가문과 상황리·하황리 풍양조씨 가문 간의 소원한 관계는 한국전쟁과 함께 증폭되어 발현되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풍양조씨家의 2人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사망하였다. 이때 면 당위원장, 면 치안 대장 등 요직이 장하리 출신이었다. 일찌기 강석기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를 접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9.28 수복 후에는 이에 대한 보복의 성격으로 장하리 주민 10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인한 감정의 골로 전쟁 이후에는 상대편 마을을 오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며 오랫동안 초등학교(지금은 폐교된 남산초등학교가 두 마을의 가운데에 있었다) 운동회는 두 마을 어른들의 격투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남산초등학교]


  1964년에 획기적인 변화의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강호동지회'라는 마을 연대 모임이 그 시발점이었다. 상황리, 하황리, 장하리, 북고리 등 네 마을과 풍양조씨, 진주강씨, 남평문씨 세 가문이 연합하여 결성된 이 모임은 한국전쟁 당시 면 치안부대장으로 전후 옥고를 치른 인물이 갈등 치유 차원에서 제안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결성 4년 후인 1968년 자연제방의 포풀러를 베어내고 1차 제방을 쌓는 사업을 벌였는데 이 사업이 강호동지회의 첫 사업으로 이후 지역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협력체로 성장하였다.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을 함으로써 마을 단위를 넘어선 지역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풍양조씨 공덕비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강호동지회 비]


▣ 새로운 정체성 만들기: 독립운동가 마을


  20세기 초반부터 개간 사업을 주도하여 경지를 확보함으로써 오늘날 제방 안쪽의 너른 들판이 대부분 진주강씨 소유이다. 검신들의 대부분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주도권 장악한 장하리는 최근 '독립운동가 마을'로 스스로를 이름짓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애국지사 마을'이라는 커다른 표지석을 세워놓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 추모탑과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추모비와 묘비 등을 한 곳에 모아놓고 공원화함으로써 마을 이미지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애국지사마을 표지석과 추모탑, 여러 기의 비석들이 모여 있는 추모 공원]


  '애국지사 마을'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동원하고 있는 형식은 비석 등 유교적 경관이 주를 이루는 흥미로운 경관을 보여준다. 이웃한 상황리, 하황리의 유교적 비석군들과 외형상 유사한 형식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고나 경관은 그 본질이 의미를 잃은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형식이 잔존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적 경관이 21세기에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장하리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  이웃마을 상황리


  상황리는 장하리와 인접한 마을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다른 점들을 보여준다. 두 마을의 경계 부근에는 전형적인 유교 경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흥학당(興學堂)이라는 건물로 풍양조씨 문중에서 학문 강론을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조선시대 과천현감을 지낸 조태징()을 배향하기 위해 1770년(영조 46) 건립된 남산사()의 부속건물이다.


[풍양조씨 가문 학당인 흥학당]


  상황리는 금강 본류로 유입하는 지류(상황천) 연안에 자리잡은 마을로 전형적인 溪居형 입지를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금강 본류 연안의 배후습지에 비해 면적도 좁고 비옥도도 떨어지지만 과거에는 안정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또한 이 마을에는 가묘와 사당, 정려 등 전형적인 유교 경관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세거해온 종족촌락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상황리 마을 앞에 있는 정려]


[열녀 전주이씨: 上之五年甲寅(철종5년, 1854)禦侮將軍(정3품 당하 무관), 효자 조화진: 上之十三年癸酉(순조13, 1813)通德郞(정5품 문관)]


*이 글은 <전종한, 2005, 근·현대 民村의 사회공간적 성격과 영역성-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의 사례, 대한지리학회지(40-6)>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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