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강화도

강화도 답사[Ⅲ]: 교동향교, 대룡시장, 인사리

Geotopia 2016. 7. 13. 14:01

▶ 소풍의 점심 : 그냥 먹어도 맛있는 북한식 청국장


  교동도에는 우리 대식구가 함께 들어가서 점심 식사를 할 곳이 마땅하질 않다. 전체 인구가 3천 명 정도로 대형 음식점의 최소요구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작은 면 소재지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한 잔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소풍'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은 우리 일행이 다 들어가지 못해서 주인이 옆집에 한 팀이 들어가도록 주선을 해 놓았다. 비좁고 덥기는 했지만 청국장 맛은 일품이다. 짜지 않아서 밥 없이 그냥 먹어도 구수한데 주인 아주머니 말씀이 교동 콩으로 만들어서 그렇단다. 북부 지역으로 갈수록 음식이 짜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교동도는 황해도 출신들이 많은 것도 이런 맛의 원인인 것 같다.  청국장 뿐만이 아니라 교동도 주민들이 먹는 전통 음식은 대부분 북한 음식이다. 황해도 음식 중에 교동에서 유명한 것으로 젓국갈비라는 것이 있다. 갈비를 젓국으로 양념한다는 얘긴데 맛이 어떨까?

  청국장에 들어있는 두부도 맛이 보통이 아니다. 물컹물컹하고 젓가락을 대면 그냥 잘라져 버리는 여늬 두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딱딱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단단한 식감이 일품이다. 반찬은 가짓 수가 많지는 않지만 역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원료로 만든 것들이다. 고구마묵이 단연 인기짱인데 '속 노란 고구마'로만 만들어야 된다고 한다. '속 노란 고구마'는 호박고구마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쓰는 고구마 품종 이름이다. 긴 이름이 곧 설명이니 묻지 않아도 뜻을 알 수 있는 낱말이어서 재미있다. 속노란고구마묵은 투명한 느낌의 갈색인데 역시 젓가락으로 집어도 끊어지지 않고 잘 집힐 정도로 단단하고 쫄깃한 육질을 자랑한다. 근데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그 상차림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 교동도 정체성


  많은 손님을 치르느라 정신없이 바쁜 중에도 주인 아주머니는 교동도식 음식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느낌이다. 오후 일정 중에 만났던 교동향교 전교님, 우리누리평화운동 대표님에게서도 같은 느낌이 풍겨나왔다. 대룡시장에서 만난 상인들도 한결같이 활달하고 자기 지역 상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촌사람의 주눅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희소성을 부각시키는 느낌이라고 할까? 

  음식점에 굴러다니는 전화번호부도 눈길을 끈다. 전화번호부가 없어진 것이 벌써 오래 전이다. 그런데 교동도에서는 여전히 전화번호부가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내부 네트워크가 탄탄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강화도와 연결되는 다리가 생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화도의 서북쪽 끝에 붙어있는 오지여서 독특한 문화적 특성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작은 섬이라는 고립성이 더욱 강하게 유지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어쩌면 가치관을 공유하고 유지하기가 쉬웠을 수도 있었겠다. 피난민이라는 독특한 입장도 동질성을 형성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 결속력이 배타성으로 흐르지 않고 잘 발현되고 있는 느낌이다.


<교동면 전화번호부  *손 모델을 해주신 김석용샘 감솨^^>


<식당 뒤편 텃밭에 쌓여있는 연탄재. 연탄재를 부숴서 객토를 했다>



▶喬桐향교 : 관성은 깨달음을 방해한다


  교동도의 '교동'은 당연히 '校洞'이려니 생각했었다. 최초의 향교가 있는 곳이니까. 향교의 자취는 교동, 향교말, 교촌 등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곳은 '喬桐'이다.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었던 모양이다. 의문이 풀린다. 이곳은 강화향교가 있는 곳이 아니고 교동향교가 있는 곳이다. 즉, 강화군과는 무관하게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교동군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곳에 강화향교가 있는 거지??  '교동'이라는 말은 당연히 '향교말'이라고 생각하는 관성이 간단한 사실도 깨닫지 못하도록 사고를 옭아맸던 것이다. 교동군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간단히 정리되는 것을… 답사 때 실내 연구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교동도가 독립 행정단위였던 역사는 꽤 유서가 깊다. 고구려때 이미 고목근현이 설치되었고 신라 때 교동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교동도는 작은 섬이지만 강화도의 서쪽에 있어서 개경과 한성으로 연결되는 뱃길이 지나는 요충지였다. 그래서 조선시대까지 郡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읍치는 섬의 동남쪽에 있었다. 지금도 읍내리라는 이름으로 과거 읍치의 자취가 남아있다. 읍치의 규모는 작았지만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아 방어상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후기 삼도수군통어영이 바로 교동읍성에 있었다.

  원래 안향이 공자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의 초상과 서책 등을 가지고 와서 이곳에 임시 봉안을 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교동향교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개경에 가까운 화계산의 북쪽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화계산 남록으로 옮겼다.

  향교의 양쪽으로 능선이 뻗어 나가는 형국으로 전교님 말씀에 의하면 '玉女滿開'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향교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풍수적 입지 보다는 성리학적 입지를 따랐다. 향교의 위치는 '주례고공기'에 의거하여 左祖右社의 원칙을 지켰다. 즉, 공자 등 선현의 위폐를 봉안하는 文廟이므로 군현 관아의 왼편에 세웠던 것이다. 교동향교도 읍치의 왼편, 그러니까 읍내리의 동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풍수적 입지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성리학을 표면에 내세우면서도 암암리에 풍수가 입지 선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 조선사회였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이 국가의 기틀을 잡았던 초기에는 성리학적 입지가 잘 지켜졌으나 후대로 갈수록 풍수의 영향이 커져갔다. 현재의 위치에 향교가 자리를 잡은 시기는 영조 17년(1741)으로 풍수가 사회적으로 꽤 널리 펴졌던 시기였으므로 풍수가 입지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교동향교의 위치는 교동읍성의 왼쪽으로 주례고공기를 따랐다. 하지만 옥녀만개형으로 풍수적 해석을 하기도 한다>


<향교 입구의 비석들. 선정불망비류의 이런 비석들은 대부분 가렴주구의 상징일 뿐이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그 이름 석자를 남기려고…>


<지방 수령도 공자님 앞에 오면 말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 홍살문 앞에 세워진 하마비>



▶ 도포자락 휘날리며


  난생 처음 도포란 것을 입어봤다. 전교님께서 대성전을 참배하는 체험을  직접 주관해주셔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순전히 나이 많은 탓으로 체험단에 끼게되었다. 도포란 것이 생각보다는 덥지는 않았다. 색깔도 시원한 하늘색 계열이고 재질도 얇은 모시옷(합성섬유겠지만) 느낌이다. 온통 낯선 한자어로 진행되는 참배 절차는 약간 따분하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믿는 사람이 공자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다니…


<공자 초상과 위패. 초상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이 중국에서 그려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전교님의 사전 안내. 무더위 속에서 관복을 입은 채 고생하셨다. 전교는 종9품직의 대우를 받았단다>


<대성전에 오르기 전 손을 씻는다. 당상관에 오르신 박병석샘>


<대성전 공자 위패 앞에서>



<대성전 앞에서>



▶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다고?

 

  조선 수군의 역할은 주로 왜구를 막는 일이었으므로 수군의 주력부대는 하삼도에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맡았던 삼도수군통제사가 바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3도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5도(경상좌도, 경상우도, 전라좌도, 전라우도, 충청도)에 수영을 두었는데 충남 보령에 있었던 충청수영이 조선에 설치된 수영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교동도에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다니?

  삼도수군통어영은 경기, 황해, 충청도의 수군을 관할하는 기관으로 1633년(인조 11)에 처음 설치되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하삼도를 관할했던 삼도수군통제사 관할권과 교동의 삼도수군통제사 관할권에 똑같이 충청도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추측해보건대 아산만 주변까지는 교동에서, 충청수영을 포함한 그 아래쪽은 통영에서 관할했던 모양이다.

  기왕 소설을 쓴 김에 더 질러보자. 삼도수군통제사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 각 도의 수군절도사를 통괄할 필요가 있어서 만들어진 직책이었다. 그러니까 삼도수군통제영이 만들어진 이유는 왜군의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교동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된 것은 이보다 40년 뒤인 1633년(인조 11)의 일이다. 중국에서 청나라가 강성해지고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업신여기면서 청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국 방어기지가 필요했을 것이고 가장 적합한 위치가 바로 이곳, 교동도였을 것이다. 중국과 가깝고 한강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였으므로.


▶ 대룡시장 시계포: 곧 돌아갈텐데 뭐하러 새로 사나?


  대룡시장은 1박2일 덕분에 교동의 명물이 되었다. 인구 3천 명으로는 번성한 시장이 유지되기 어렵다. 하지만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여 독특한 중심성을 유지하고 있다. 원래는 북한에서 건너온 피난민들이 연백시장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풍경들이 많다.

  시장이 작고 한산해서 '대룡시장 명장'으로 알려진 황세환어르신 시계포는 금세 찾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 마침 어디로 출타를 하셔서 가게 문을 닫았다. 이 시계포가 유명한 이유는 물론 수리하는 솜씨가 좋아서겠지만 수리 수요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은 면단위 중심지에서 수리 수요가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황해도에서 잠깐 피난을 왔던 사람들이어서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분단이 길어지고 고착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러니 물건을 새로 사기 보다는 고쳐서 쓰는 것이 일상이 될 수밖에.


<황세환시계포>


<시계포 유리창을 이용하여 인증샷>


  그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어느 가게 처마에 얕으막하게 지은 제비집이다. 아직 둥지를 떠나지 못한 게으름뱅이 제비가족인데 부리에 노란 띠를 아직도 못 벗은 세 마리 새끼가 어미를 기다린다. 가게 주인 할머니가 뭔가 심통이 나셨다. 네 마리였는데 사람들이 하도 들여다봐서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알아서들 하슈~' 일갈을 날리고 어디론가 가 버린다. 2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 안내 문구를 어기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할머니는 왜 심통이 나셨을까?


<제비집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다>


<엄마를 기다리는 새끼들>


<꽃차를 파는 가게인데 소품이 인상적이다. 강남콩 껍질로 딱지를 접어서 뿌려 놓아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여주를 세로로 잘라 말리는 모양이다>


<다양한 종류의 꽃차들. 모두 이곳 교동에서 채취해서 말렸다고 한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주변과 잘 어울려서 편안하다>


<술집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있다>


<골목길>


<시장 골목의 낡은 건물 문이 자물쇠를 굳게 잠겨있다. 장사가 잘 안된다는 뜻인 듯>


<강화쌀. 영양염이 풍부한 간척지쌀이라서 맛이 좋다고 한다>


<옛날 생각이 나게 하는 전자제품 판매점>


<알록달록 꽃신들>



<카트 아이콘이 잘 안 어울리는 대룡시장 안내판>

  아기자기한 대룡시장을 구경하면서 선생님들이 각각 콩, 옥수수, 땅콩 등 농산물이나 건어물 등등을 조금씩 사신다. 막걸리, 식혜 같은 주전부리도 빠질 수 없다. 마눌님은 만원짜리 꽃차를 두 병 샀다. 모양은 이쁜데 과연 맛나게 먹을 수 있을까 싶다. 향교 전교님과 면사무소에서 강의를 해주신 우리누리평화운동 대표님을 모두 시장에서 다시 만났다. 동네방네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작은 시골 마을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시장 끝에 있는 건어물 가게에서 마침내 강화도 특산물을 발견했다. 말린 꽃새우다. 색깔이 선홍색인 꽃새우는 씹어보니 고소한데 속은 텅 빈 느낌이다. 머리와 꼬리의 꺼끌꺼끌한 느낌과 함께 나름 별미다. 미션 수행비 만원에 딱 맞게 한 봉지에 만원씩이다. 4월부터 6월 사이에 남산포 주변에서 주로 잡힌다는데 새우젓 만드는 새우보다 크기가 약간 크다. 남산포는 교동도의 남동쪽에 있는 포구로 새우를 잡는 곳은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의 해협 일대라고 한다. 새우잡이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적다는 주인은 '직접 잡아서 말렸다'를 강조한다. 남편은 고기를 잡고 아내는 판매를 하는 분업화가 되어있을까 싶었는데 함께 배를 탄다고 한다. 새우잡이 배에서 젊은 여인은 워낙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한 가지 실망(?)스러운 것은 햇볕에 말리지 않고 건조기에서 말린다는 사실이다. 햇볕에 말리느냐고 물었더니 파리떼를 어떻게 당하느냐고 나를 나무란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조금 아쉽다. 하기사 햇볕에 말리면 날씨가 좋다고 하더라도 며칠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건조기에서는 불과 네 시간이면 마른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겠다. 선홍색의 때깔도 햇볕 보다는 약간의 열을 가하는 건조기에서 나올 것 같다. 갑각류들에 열을 가하면 껍데기가 빨개진다. 갑자기 왜 새우나 게를 익히면 빨개질까 궁금해진다. 궁금할 때는 검색질이 최고다.


  새우 껍데기에는 세 가지 색소가 있다. 원래 붉고 분해가 잘 되지 않는 클러스터세올빈, 황색을 띠는 헤파토크롬, 그리고 시아노크립탄이라는 녹청색의 색소다. 이중에서 시아노크립탄은 열과 산, 알칼리 등을 만나면 잘 분해되며 이때 클러스터세올빈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게나 새우 등 갑각류를 삶거나 구우면 시아노크립탄이 분해되어 클러스터세올빈으로 변화되며 이 과정에서 헤파토크롬과 함께 작용하여 붉거나, 붉은 오렌지색으로 변한다.


▶ 인사리 철책 :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분단의 상징인 '철책'은 강원도 산악지대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강화도의 철책은 좀 이채롭다. 철책 너머로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북한 땅이 잘 보이기도 하지만 철책 바로 앞까지 거의 자유롭게 통행을 할 수 있다. 철책 바로 옆까지 농사를 짓는 것은 물론이다.

  서른 몇 명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철책을 따라 걸으니 군에서 출동을 한다. 금세 지프차 두 대가 출동해서 찍은 사진을 모두 지우란다. 통행은 제한을 하지 않지만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군인들의 임무려니 이해를 하면서도 좀 아쉽기도 하다. 사실상 Google earth만 통해도 철책선 일대를 다 볼 수 있다. 사진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친다면 별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국내 포털사이트는 모두 영상을 삭제했지만 구글에는 모두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거야말로 외국 기업을 이용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최근 구글에서 국내 지형도 자료를 요청했지만 국방부가 거부를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구글이 지도정보를 요청한 것은 당연히 글로벌 거대 자본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 순전히 '안보'차원의 거부였다. 구글에서 현재 서비스하고 있는 지형도가 국내 어느 포털사이트 정보보다 나은데도 말이다. 이번 주에는 닌텐도가 '포켓몬고'라는 게임을 발표하여 온 세계가 시끄럽다. 하지만 게임 천국인 우리나라만 조용하다. GPS기반의 게임인데 지도정보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구글 데이타 뱅크를 거부해서(데이타 내용을 정부에서 볼 수 있게 하라는 요구를 구글이 거부하고 서버를 싱가포르로 보냈다) 엄청난 국익 손실을 자초한 바 있다. 세상의 변화를 똑바로 보고 그에 맞는 대책을 합리적으로 세워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공감을 바탕으로 튼튼한 안보를 구축할 수 있다.


<철책 사진 대신 철책에서 반대쪽으로 찍은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 남은 소소한 이야기들


-지렁이가 귀여운 아이


  최보길샘은 귀여운 아들을 데리고 오셨다. 향교 명륜당 앞에 커다란 지렁이가 튀어나와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만지작 거리며 논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런 커다란 지렁이를 보면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뱀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우리 세대는 얼추 비슷하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지렁이를 가지고 논다. 최샘 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렇다. 뱀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으며 쥐며느리를 콩벌레라며 귀엽다고 한다. 장성한 우리 아들들도 그러니까 이런 문화가 만들어진 지가 꽤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파충류나 곤충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하면 맞는 말이 아니다. 어쩌다 벌이나 날파리가 교실 안으로 날아들어오기라도 하면 교실이 한바탕 난리가 난다. 콧수염이 거무스름한 고3 짜리들이 꿀벌 한 마리에 이리뛰고 저리뛰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내가 창문을 열어 내보내기만 해도 박수를 치고 난리다. 부득이 책으로 후려쳐 잡기라도 하면 무슨 민족 영웅 대접을 한다. 초여름에 방충망이 덜 갖춰진 상태에서 갑자기 날파리가 들끓어서 야간자습을 중간에 그만둔 날이 있었을 정도다.

  거미는 열에 아홉이 다 무서워한다. 예전에 우리집 아이들이 하도 무서워해서 장마철에 집에 커다란 거미가 거미줄을 쳤을 때 일부러 이름까지 지어주고 잡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거미에 대한 공포는 다 큰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얼까?

  겨우 짚히는 것이 있다면 직접 파충류나 곤충류를 접했던 우리와는 달리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책이나 영상물을 통해 이들을 접한다는 점이다. 특히 거미류는 '독거미'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다큐나 영화에서 그런 모습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커다란 지렁이와 놀고있는 아이>


- 교동 옥수수 : 수분이 끝나면 수꽃을 자른다


  특별히 교동도가 옥수수 생육에 유리한 점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 있다. 첫 째는 같은 지역인데 수확기가 많이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이미 수확이 끝나 줄기를 모두 잘라서 밭고랑에 거름으로 깔아놓은 곳이 있는가 하면 바로 옆에서는 한창 옥수수가 여물어 가고 있다. 원래 기온이 낮아도 잘 자라므로 일찍 심을 수도 있고 늦게 심을 수도 있는 것이 옥수수의 특징이기는 하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풍경은 옥수수의 수꽃을 모두 잘라버렸다는 점이다. 암꽃인 수염이 마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수분이 끝나고 잘 여물어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왜 수꽃을 잘라버리는 것일까? 할 일을 마친 수꽃은 아마도 영양분 만을 허비하는 쓸모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녀석을 잘라버리면 그 영양분이 열매로 가는 모양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번식을 마친 수컷은 찬밥 신세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년 이후에 황혼 이혼을 당하는 남편도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수확이 끝난 옥수수밭>


<바로 옆 밭에는 옥수수가 한창 여물고 있다. 수꽃을 모두 잘라버렸다>


<인사리 옥수수밭 한 켠의 옥수수가 한쪽 방향으로 넘어졌다. 돌풍이 불었었나?>


-알면 사랑하게 되나니


  버스에 타려는데 낯 익은 꽃이 보인다. 얼마 전에 선배님을 만나러 갔다가 선배가 보여줬던 꽃이다. 예뻐서 조금 얻어다가 교정 한  켠에 심었는데 이태만에 조금 번식을 해서 늘었단다. 그런데 한 열 줄기 정도 될까? 껑충한 키에 작은 꽃이 매달려서 한 눈에 보기에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군락을 이루면 이쁘다는데 내년에 학교를 옮겨야 하는 선배님이 얼크러설크러진 꽃밭을 보기는 글렀다 싶었다.

  그 꽃을 만난 것이다. 그 때 이런 모양을 이야기했던 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나름 운치가 있는 꽃이다. 여전히 이름은 모르지만… 그때 그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내 무딘 눈에 이 꽃이 들어왔을리가 없다.


<꽃이 작아 엉성한 모양이지만 모여있으니 제법 모양이 난다. 근데 이 꽃의 이름이 뭐더라…>


-도대체 중국 어선이 들어와서 고기를 잡아간다는 한강하구가 어디?


  지리교사로서 쪽팔리는 얘긴데 뉴스에 한강하구 중국어선 퇴출작전 얘기가 나올 때마다 궁금했었다. 도대체 한강 하구 어디에 중국 어선이 출몰한단 말인가? 우리도 가지 못하는 곳인데… 물어보려는 참인데 우리누리평화운동 김영애대표의 브리핑 자료에 지도가 나온다. 교동도의 서남쪽 해상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한강하구'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하구라면 해수와 담수가 교차하는 곳이어야 할텐데 여기는 바다라고 해야 맞겠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한강하구 작전 수역>


-서울 사람들


  대부분 서울, 경기도에 근무하시는 샘들이신데 대룡시장의 제비집이나 옥수수를 보면서 놀라는 등 촌 사람이 보기에 놀라운 장면들이 의외로 많다. 철책선 앞에 끝물 수박들을 잔뜩 버린 곳이 있다. 이건 무슨 품종의 수박이냐며 놀라는 샘이 계시다. 음~ 이런 것도 아는 척할 거리가 되기는 하는 걸까?


<끝물 수박을 모아서 거름으로 만들고 있다>


-강화도에서 찍고 싶었던 장면들


  답사를 오기 전에 강화도에서 찍고 싶은 장면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봤다. 또아리집, 난정저수지(양수식 저수지), 포구(월선포)의 경관 변화(과거에는 입구였던 곳이 다리가 생기면서 버스 종점이 됐다), 평화전망대(이름의 다중적 의미), 북한 땅 등등. 일정에 들어있지 않아서 못 찍은 곳이 여럿이다. 또아리집은 인사리에도 몇 채는 있을 것 같은데 전형적인 모습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쉬운대로 길 옆에 민가를 한 채 찍어보는데 모양이 아니다. 어쨌든 폐쇄적인 구조라는 점은 이 지역 가옥의 공통점이다.

  김석용샘의 말씀에 크게 공감이 된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중국 실크로드를 또 가신다는데 이유가 정말 재미있다. 밭에도 물을 가두고 벼가 아닌 밀이나 보리를 심는 것이 이 지역 농법이라는 사실을 지난 번 중국 답사 때 깨달으셨단다. 그런데 깨달은 순간 이후로는 그런 경관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문제의 그 장면을 사진에 담지 못하고 돌아오셨다는 말씀이었다. 그 장면이 얼마나 눈에 아른거리셨을까? 결국 그 장면을 다시 만나기 위해 올해 또 중국을 가신다는 말씀이었다.

  나 역시 때때로 그런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끝내 사진을 찍지 못하고 돌아오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강화도가 그런 곳이다. 사진을 못찍은 그곳들을 부담없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다.


<폐쇄적인 교동도의 가옥. 강한 바람이 이런 구조를 만든 원인일 것이다>



▶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를 헤엄칠 때는


  몇 년 만에 온 강화도다. 아내랑 마니산에 올랐던 것이 벌써 4년 여 전이다. 돌아갈 길이 바빠 겨우 마니산에만 올랐다가 길을 재촉했던 지난 번에는 이런 답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지리샘들과 함께하는 지리답사는 언제나 재미있다. 이번 답사에서도 많이 보고, 듣고, 배웠다. 그리고 지리학습 이상의 '배려'를 배운 것이 지리 공부보다 더 큰 수확이다. 공부하고, 또 서로를 확인하면서 힘을 얻는 지리학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를 헤엄칠 때 여유롭고 우아한 겉 모습과는 반대로 물 속의 두 다리는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물갈퀴질이 없다면 우아한 백조의 모습은 있을 수 없다. 이번 답사에서도 우아한 백조가 부럽지 않게 재미있고, 의미있고, 힘을 얻었다. 그것은 백조의 물 속 두 다리처럼 끊임없이 고민하고 움직이는 분들 덕분이다. 이 글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다음 답사는 또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