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강화도

강화도 답사[Ⅰ]: 연미정, 평화전망대

Geotopia 2016. 7. 11. 23:10

▶ 답사일: 2016.7.9(토)


▶ 함께 한 분들: 전국지리교사모임. '경계에서 찍는 지리사진' 직무연수 참가자


▶ 주요 답사지

  -燕尾亭, 강화 제적봉 평화 전망대, 교동향교, 대룡시장, 인사리 철책



<답사경로  *원도: Google earth>



▶ 깨알 배려: 500원짜리 동전에 감동 받다


  먹을 거리를 한 봉지씩 포장으로 나눠주는데 500원짜리 동전이 하나 들어있다.


  "?? 뭐지?"


  그렇지!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전망대 망원경 보려다가 동전이 없어서 못 본 적이 분명히 있었다. 누구라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용케 알고 이렇게 준비를 해주다니! 이참에 나도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답사 때 써먹어야겠다. 깨알 배려가 또 있다. 대룡시장 미션이다. 조별로 수행비 1만원을 주고 강화를 대표할 만한 물건을 사고 답사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그 이유를 발표하는 것이다. 조별로 좌석을 미리 지정해서 소외되는(?) 사태를 예방한 것도 참 깊은 배려다. 아내와 같이 가는 바람에 나는 특별 대우를 받았지만, 면식이 없는 다중이 모이는 모임에서는 꼭 필요하겠다.

  코스 만들고, 내용 준비하고, 이것이 그동안 내 답사의 전부였다. '내용으로 승부한다'는 근거가 희박한 자만심이 그 발로였을까? 하지만 그 이상을 만난 오늘은 내 삶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날이다. 출발부터 기분이 좋다. 답사를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 많은 것을 배웠다. 배려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한다. 배려란 사람을 먼저 생각할 때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 주 첫 만남도 기억이 난다. '지리, 답사, 여행 빼고 좋아하는 것 말하기'였다. 지리학도의 얘기는 당연히 그 셋이 주요 소재일 수밖에 없다. 똑같은 관심사를 얘기하다 보면 재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자칫하면 '누가누가 잘하나'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빼니 생각하지도 못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나야 생면부지, 처음 온 사람이니 모든 분들의 이야기가 다 새롭지만, 여러 번 만났던 샘들도 서로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도 잘 기억했다가 밴치마킹을 해야지!


▶ 강화에 살면 강화 사람이 된다


  강화에서 두 분의 선생님께서 답사 안내를 맡아 주신다. 삼량중고등학교 박재을선생님과 산마을고등학교 최보길선생님이시다. 아이들과 강화 답사를 계속하고 계시다는 박재을샘은 충남 예산 출신인데 강화 지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이십여 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토박이 보다 더 굳건한 향토애를 갖게 되신 것 같다. 

  최보길샘 역시 마찬가지다. 강원도 동해 태생이신데 강화에 오신지 10여 년이 넘었다고 하신다. 대안학교인 산마을고등학교에서 '강화사'를 교과목으로 개설해서 올해 첫 강의(그것도 3학년 교과로)를 시작했다는 얘기만 들어도 최샘의 강화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매주 세 시간 답사를 계속하고 있는 중인데 강의 교재로 <강화도의 기억을 걷다>라는 책을 쓰셨다. 


▶ 燕尾亭에서: 내 땅에서 유엔군만이 송아지를 구출할 수 있다니…


  제비 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연미정에서는 한강의 마침표라고 할 수 있는 유도가 보인다. 1997년 홍수 때 북한에서 황소 한 마리가 떠내려와서 유도에 표착을 했었단다. 남북 어느 쪽에서도 섬에 갈 수가 없으므로 황소가 굶어 죽는 비극을 눈뜨고 지켜봐야할 판이었다. 시민들이 나서서 송아지 구출작전을 펼쳤는데 결국 유엔사령부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행스럽게도 유엔사령부 주도로 황소를 구출하여 번식시키는 데까지 성공을 했다. 유도가 김포시에 속하기 때문에 이 황소는 김포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사육되었다. 주인공 황소는 2006년 자연사했지만 그 후손들은 지금도 '김포통진두레놀이(무형문화재 제23호)보존회'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평화의 소'라 이름을 짓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모양인데 나는 그 이야기를 우리 답사 자료집에서 처음 접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분단, 통일, 시민의 염원, 유엔, 주권, 찻잔 속 태풍… 정리가 될 듯 말 듯한 낱말들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닌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유도>


<월곳돈대와 연미정>


<연미정>


<연미정에서 바라본 월곳돈대 성벽.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은 고려산(436m)이다>


<무당벌레 한 마리가 연미정 기둥에 붙어 최샘과 박샘, 두 분의 열강을 훔쳐 듣고 있다>



▶ 배가 한 척도 없는 바다


  최보길샘의 경험담이 인상적이다. 국경에 배가 없는 곳은 이곳 뿐이라는 사실을 압록강에서 아셨단다. 조중 국경인 압록강에서 사람들이 수영도 하고 수상스키도 타는 장면이 매우 이상하게 보였는데 알고보니 배 한 척 없는 우리의 한강 하구가 비정상인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답사를 오면 종이배라도 띄우도록 하신단다. 학생들이 배가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커다란 통일교육이 되겠다. 


<배가 한 척도 없는 바다. 멀리 바다 건너로 보이는 곳이 황해도 개풍군이다>



▶ 침략자들이 굳이 鹽河를 고집한 이유는?


  수레 천 개 분량을 배 한 척에 실을 수 있었으니 근대 이전에는 수로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염하는 서울로 가는 세곡미가 마지막으로 모여서 이동하는 통로였으므로 그 중요성은 쉽게 짐작이 된다. 섬 바깥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또 외해와 면해서 위험했기 때문에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안면도를 잘라서 천수만 일부 구간이나마 안전하게 이용하려고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판옥선이 파도가 심한 외해를 지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모두 이 염하에서 일어난 것을 보면 이곳의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다. 외세가 굳이 군대를 이끌고 왕을 제압하려고 했다면 그들은 분명 염하를 피해 외해로 우회하는 전술을 썼을 것이다. 외세가 곳곳에 방어기지가 있는 이 길을 굳이 선택한 것은 이 길, 즉 세곡로의 이동 통로를 막아 조정에 통상 압력을 가하려고 했던 것이다. 세곡미는 대동법이 존속했던 조선말까지 염하를 거쳐 한성부로 이동했다. 19세기 후반(1879년)에 외국 증기선을 도입하여 세곡을 운송했던 것을 보면 조선왕조의 핵심 수취체계였던 조세의 금납화(대동법)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월곳돈대에서 바라본 염하>


  '鹽河'라는 이름이 재미있다. 얼핏 보기에 하천처럼 생겼지만 육지와 강화도 사이의 해협이므로 엄연히 바다이다. 하천처럼 생긴 바다이니 염하라는 이름이 딱 맞기는 하다. 옛날에는 우리말로 '짠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제국주의 침략기에 서양인들이 이를 'salt river'로 번역했고 나중에 역으로 다시 우리말로 옮길 때 '鹽河'라는 한자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鹽河'라는 표현이  제국주의 침략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통적으로 썼던 이름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데 아직까지 제국주의 침략기 이전 기록에 '염하'가 등장하는 것은 딱 한 번 뿐이라고 한다.


▶ 강화인의 자존심: '서울 내려간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강화 사람들이 '서울 올라간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보다 먼저 수도였으므로 그때 관례로 '서울 내려간다'고 표현한다고 한다.  고려 망명 정부(1232년~1270년)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므로 한성보다 먼저 수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팔백여 년 전의 역사를, 그것도 겨우 38년의 역사를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는 것은 핍박의 역사에 대한 강화인의 심적 저항이 아닌가 싶다.

  연미정 일대는 '월곳리'이다. '곳'은 '곶'의 오기가 분명하지만 강화사람들은 굳이 고치려 하지 않는다. '서울 내려간다'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강화 자존심'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박재을샘의 말씀에 의하면 '남산'도 왕의 입장에서 명명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남산은 서울, 경주, 강화뿐이라는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한다. 또한 스스로를 '江都', '강도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이며 놀라운 얘기다. 놀라운 이유는 그런 사실을 이방인인 우리 대부분이 모른다는 점이다. 아무리 정보 유통이 많아도 알아야 할 지역 특성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 이름은 대북정책을 웅변한다: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북한 땅을 볼 수 있는 전망대는 여러 곳에 있다. 이곳 강화도를 비롯하여 오두산·도라산(파주), 애기봉(김포), 그리고 강원도의 철원과 고성 등이다. 강화도와 철원은 '평화전망대'로 부르고 나머지는 '통일전망대'라 부른다. '평화'와 '통일'은 얼추 한 몸이니 어느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는 따질 수가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이름이 여섯 개 가운데 가장 긴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에 담긴 역사는 한번 쯤 짚어봄직하다.

  원래 이 봉우리의 이름은 '制赤峰'이었다고 한다. '원래'라는 표현은 좀 어패가 있기는 하다. 왜냐하면 유신시대 김종필이 지었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길어야 50여 년 전에 지은 이름이 제적봉인데 '붉은 무리를 제압한다'는 의미로 냉전 논리를 잘 드러내고 있는 이름이다. '敵'도 아니고 '赤'인 것은  당시의 red complex를 잘 나타낸 표현이 아닌가 싶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에 제적봉 위에 이 전망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2009년 9월에 완공되었다. 당초 전망대의 이름이 '강화평화전망대'로 지어졌으나 이명박정부 때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로 바뀌었다. '제압'과 '평화'라는 상반된 가치가 공존하는 '철학적인(?) 곳'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햇볕정책이 '공존을 통한 평화'였다면 이명박정부와 현 정부는 '제압을 통한 평화'를 표방하고 있다. 그런 정책의 변화가 전망대의 이름에 담겨있다.


<전망대 입구>


  전망대 북쪽에는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노래가 여러가지 버젼으로 나오는 장치가 있다.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로 손꼽히는 곡인데 가사를 보면 냉전 논리를 담고 있다. 만들어진 때가 1961년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는 1961년 판과 1972년 판, 두 개의 버젼이 있다. 최보길샘께서 <강화도의 기억을 걷다>에 자세히 써 놓으셨다고 하는데 두 버젼 중에 어느 것이 더 강한 냉전 논리를 담고 있을까? 나는 당연히 1972년 버젼이라고 생각했다. 유신이 선포된 해였고 냉전 논리가 강화되었던 시기였으므로. 하지만 반대다. 1961년에 처음 만들어진 원 가사의 냉전 논리가 훨씬 강했다. 

  영구집권을 꾀하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에 유신을 선포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7월에 남북공동성명을 추진하였다. 남북 교류가 이루어졌고 평양에서 남측의 공연이 성사되었다. 이때 무대에 이 곡이 올려졌는데 지나치게 냉전 논리가 강했기 때문에 가사를 수정하게 된 것이다.


  통일을 염원하는 전망대와 '그리운 금강산'은 자연스러운 결합으로 받아들였는데 알고보니 그 작사자(한상억)가 이곳 강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화에서 태어나 북녘 땅을 바라보며 자랐을 시인에게서 나옴직한 가사다.



1절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2절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

흰 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아래 산해 만 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3절

기괴한 만물상과 묘한 총석정

풀마다 바위마다 변함없는가

구룡폭 안개비와 명경대물도

장안사 자고향도 예대로인가

(후렴)

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을 계기로 작사자가 직접 일부 가사를 수정하여 ‘더럽힌 지 몇 해’는 ‘못 가본 지 몇 해’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은 ‘우리다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는 ‘예대로인가’로 바뀌었다. 이후 남북화해 분위기와 남북 이산가족 상봉,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공연 등을 통해 통일 염원의 상징적인 가곡이 되었으나 북한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